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53)
김면(金沔)과 김귀천(金貴千) 선생의 충의를 기리는 효양재(孝養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청도문인협회 회장


청도군 매전면 동산2리, 효양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김해김씨 문중의 효양재(孝養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김면(金沔)과 김귀천(金貴千) 선생이다. 두 분은 문간공(文簡公) 매천(梅川) 김시(金蓍)의 주손으로 2품 벼슬에 올라 공신들에게 주는 채읍을 물려받았다.
김면은 조선 중종 때 정국공신으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뜻이 맞아 개혁에 적극 동참했는데 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변을 당할 때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귀양지에서 돌아온 뒤 청도에 내려왔다.
아들인 광천공(光川公) 김귀천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을 따라 참전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김천일이 순사(殉死)하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충청도 방어사, 경상도 방어사 등을 역임한 충의공(忠毅公) 권응수(權應銖)의 진영으로 달려가 참전하여 공을 세워 도총부 부총관 직책에 올랐다. 부친상 뒤 3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은 효양재기(孝養齋記)에 “ (전략) 두 분의 선생은 자손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조상이다. 광천공(廣川公)이 청도에 들어오신 것이 조선 중종 기묘년(1519)에서 신사년(1521) 이후이다. (중략) 하늘이 이미 효양산 한 구역에다 두 선생이 숨어서 수양할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가 마침내 묘소를 쓸 자리까지 허락해주었는데 지금은 ‘효양’으로써 재실의 편액을 만들어 거니 ‘효양’ 두 글자는 진실로 김씨의 백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소중한 자산이다. ‘중용’에 이르기를 ‘효도’란 것은 사람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람의 일을 잘 기술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여러 군자들이 능히 두 분 선생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적을 잘 기술한다면 어진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나라에도 공훈을 세울 수가 있으며 또한 효양산의 산신령에게도 사례할 수 있다고 이르노라.” 했다.
효양재는 전면 대문 위에 ‘孝養齋’가 편액되어 있으며 팔작지붕 4칸이다. 사손(嗣孫) 종환(鍾煥) 등이 지은 시 2편과 ‘예빈관기’, ‘중건기’, ‘효양재기’가 마루에 걸려 있고 마당 오른편에는 양옥 3칸인 ‘예빈관禮賓館)’이 있다. 1910년에 창건했으며 1979년에 중수하고 2014년에 ‘예빈관’ 구 건물을 헐고 새로 양옥으로 지었다.
이 마을을 구 동창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1518년(중종 13)에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가 옛절을 이용하여 주민 구휼(救恤)을 위해 동창(東倉)을 설치했고 뒤에 매전 농협 뒤쪽으로 옮겨가면서 그곳이 신 동창이 되고 이곳이 구 동창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보아 광천군(廣川君)과 소요당, 삼족당이 이곳에서 도학을 논하며 교유를 했을 것 같다.
이 마을 입구에 보험금을 타낸 수령 500여 년의 당산나무가 있다. 1990년대 말 펌프카가 나뭇가지를 부러뜨린 뒤 동리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 펌프카가 가입한 보험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하여 대법원 판결에 의해 보험금을 받게 되었다.
‘효양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효양산은 품이 참 넓다
조 정암과 함께 나라개혁에 앞서다 귀양을 갔던 아버지
임란이 발발하자 왜적에 맞서 목숨을 걸고 칼을 뽑아들었던 아들
두 분의 살아생전에는 지친 몸을 달랠 거처를 마련해주고
사후에는 만년을 편히 쉴 유택을 내어주었다
이어서 그 후손들까지
품어서 다독거려 삶의 향기가 가득한 곳
그 넓은 품을 이어가며 조상의 충의를 기리는 곳이 바로 효양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