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제1문. 변강쇠, 옹녀묘/ 지리산 오도재
행전 박영환/ 2012.5.19.

□ 오도(悟道)재 ‘지리산 제1문’
해발 773미터,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버스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도재 정상, 지리산 제1문에 힘들여 올라왔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5월이 만들어 놓은 신록의 향연이 전개되었다. 열 수 있는 가슴은 전부 열어놓고 큰 숨을 들이쉬었다. 이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너무 풍성하고 아름다운 정경에 그저 '좋다'라고 뇌이다가 '위대하다'란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튼 '제1문'이 맞겠다고 쉽게 동의를 한다. 예부터 이곳에는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방장 제1문이 2개 있었으나 나무로 된 문은 6.25때 불타고 없어졌으며 돌로 만든 문이 아직 남아있다. 2005년 초에 오도재 옆 금대산에서 돌로 만든 방장(方丈) 제1문의 표지석과 바위에 새겨진 방장 제1문에 관한 칠언시를 찾아냄으로 지리산 제1문의 역사성이 증명되었다.
경남 함양군은 지난 2006년 11월 지리산 북쪽 삼봉산과 법화산 사이 자리한 오도재에 ‘智異山 第一門’을 세웠다. 높이 8m, 폭 7.7m, 문루 81㎡에 38.7m의 성곽도 갖추었다. 현판 글씨는 함양에 살고 있는 서각가 송문영씨의 작품이다. ‘오도’라는 이름은 청매 인오조사가 이 고개를 오르내리며 득도했다고 하여 붙여졌다. 김종직, 김일손, 유호인, 정여창 등 시인묵객이 지리산을 찾을 때 걸어갔던 길이자 임진왜란 때는 서산과 사명대사, 청매 등의 승군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다른 분도 그렇지만 특히 탁영 김일손 선생의 이름이 반갑다. 선생은 청도 출신이고 고향집 뒷산에 묘소가 있어 친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던 분이기 때문이다. 청년시절, 아마 일두 정여창 선생과 같이 지리산 등반을 한 것 같다. 일두 선생은 하동 정씨이다. 그 후손 중에 내가 형님처럼 따른는 정문현 교수가 있다. 근래에는 하동 정씨 종친회장을 맡고 있다. 이 분이 당신의 선조가 탁영 선생과 가까웠던 것을 상기하며 탁영의 유적지를 안내해달고 부탁을 한 적이 있어 얼마 전에 탁영을 모시는 자계서원이며, 산소와 종택을 안내한 적도 있다.
지리산 문학 기행, 호연지기를 배웠던 님들의 기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가 되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정경

변강쇠와 옹녀
행전 박영환
“우리의 봄날은 야유회를 갈 수 있을 때까지인 것 같습니다.”
사하 문인협회 문학기행에 나서면서 장광자 회장이 한 말이다. 옳은 말씀이다. 그런데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우리의 봄날은 변강쇠와 옹녀를 생각하면 감정이 일어날 때까지가 아직도 우리의 봄날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 주변에는 흥미를 끄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변강쇠와 옹녀’ 이야기 만한 것도 드물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변강쇠와 옹녀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한두 번 듣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 듣는 이야기인지라 약간은 식상할 만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들어도 들어도 입가에 푸근한 미소를 머금게 되는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것, 쉬쉬하면서도 꺼지지 않고 때로는 직유로 때로는 은유로 은밀하게 숨어드는 이야기에 푹 빠지면서 슬며시 변강쇠를 부러워하고 옹녀를 선망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라고 핀잔을 하면서도 은근히 한 자락은 붙들고 있는 것은 이 무슨 심사인지.
근래에는 사람들의 이런 관심을 지역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한 곳도 있다.
전북 남원에서는 자연적 환경이 이미 요상하게 이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태생적 비화로 승격시켜 공원을 만들고 어떤 이는 그 입구에서 벼락 맞은 나무로 변강쇠와 옹녀의 심벌들을 제작하여 손님들을 모으고 있다. 마침 우리 일행이 방문을 한 날, 가게가 휴업을 하여 좋은 작품(?)을 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창문에 눈을 붙이고 잠시 눈요기를 하다가 바깥마당에 전시된 작품들을 과감하게 촉수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남원에 이어 고개 너머 함양 사람들은 변강쇠와 옹녀 부부가 함양 땅에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구비문학이긴 하지만 '성두본 변강쇠가'를 분석해보니 이 두 사람은 틀림없이 함양군 휴천면과 마천면의 경계인 오도재 일대에 살았던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원래 변강쇠와 옹녀는 개성 청석관에서 만나 도방살이(도회지 삶)를 하게 되며, 옹녀는 가정을 꾸리기 위해 들기름장사 등 행상을 하나, 천하에 패륜아 변강쇠는 가정사는 돌보지 않고 늘 술타령, 싸움질, 강간 등을 일삼았으니 살림살이는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렇게 되자 모두들 변강쇠를 경원시하게 되어 그 어디에도 그가 몸을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지역이 그를 내쳤지만, 지리산 자락 함양 땅이 받아주었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참으로 품이 넓은 산이다. 변강쇠 부부뿐만 아니라 빨치산, 흉악범 등등 그 어느 것도 가리지 않고 받아주지 않았던가.
'지리산 중을 찾아가니 첩첩한 깊은 골에 빈집 한 채 서 있으되, 임진왜란 8년 동안 어떤 부자가 피난하여 이집을 지었는지 오간 팔작 기와집이 다시 사람 살 일 없고 흉가로 비어있어서 누 백년 도깨비 동청이요, 묏 귀신의 사랑(舍廊)이라'.
변강쇠 부부가 산속의 빈 기와집에 들어가 살게 된 집의 표현을 이렇게 했다.
함양군은 '누 백년 도깨비 동청'과 '묏 귀신의 사랑'은 다름 아닌 오도재의 산신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산신각은 천수백년 전부터 오도재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70여 년 전에 허물어져 터만 남아있었는데 다시 복원했다.
또 군은 이외에도 변강쇠전의 배경이 함양군이라는 근거로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면서 '등구 마천 백모촌'의 초군들을 만나게 된다는 내용을 들고 있다.
이들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되기 전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을 지칭한 것으로 ‘등구'는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등구 마을 일대를 지칭하고, '마천'은 오늘날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가흥리 군자리 일대를 말하며, '백모촌'은 마천면 백무동의 옛 명칭이라는 것이다.
또 변강쇠가 나무는 하지 않고 나무 대용으로 장승을 뽑게 되는데, 그 장승이 서있던 곳이 '등구 마천 가는 길'에 서있던 장승이며 그 장승은 변강쇠에게 불 태워지게 되자 억울한 귀신이 되어 대방전 장승(인간세계의 임금에 해당됨)에 변강쇠의 악행을 고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되는데, 성두본 원문에 '소장(小將)은 경상도 함양군에 산로(山路) 지킨 장승'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변강쇠가 불로 땐 그 장승의 신분은 함양군의 산로를 지키는 장승, 즉 함양군의 지리산 가는 길을 지키는 장승임을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변강쇠전에 등장하는 초군들이 부르는 노래 속에 '저 건너 행화촌'이 나오는데, 오늘날 '살구징이'라고도 불리는 행화동을 일컫는 것으로 오도재 정상으로부터 600여 m 아래에 실존하는 마을이다.
함양군은 "변강쇠전은 인문학적으로 소중한 함양군의 지적 재산"이라면서 "앞으로 변강쇠를 모티브로 한 다양한 문화관광, 식료품 관련 사업들을 펼칠 것"이라고 오도재에 공원을 조성했다
남도속요(南道俗謠)의 정타령(情打令)에는 연령대별로 남녀 간의 성을 불에 비유해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다.
‘지학(志學), 10대의 정은 번갯불 정이요, 이립(而立), 30대의 정은 장작불 정이며, 불혹(不惑), 40대의 정은 화롯불 정이요, 지천명(知天命), 50대의 정은 담뱃불 정이며, 이순(耳順), 60대의 정은 잿불 정이요, 종심(從心), 70대의 정은 반딧불 정이다’라고 했다.
변강쇠와 옹녀의 불도 이렇게 변했을까. 그들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바라건대 끊임없이 활활 타올랐으면 한다. 만약 나이에 따라 점차 식어졌다면 그들은 이미 변강쇠가 아니고 옹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근래에는 월평리라는 마을이 또 변강쇠와 옹녀와의 연고를 주장하고 있다. 변강쇠 부부가 ‘지리산 제1문(智異山 第1門)’ 근처에 있는 등구 마천 마을에 정착하기 이전, 오도재 북쪽 월평리에 먼저 살았는데 노래 중에 ‘폐기와집 빈 대궐터’가 바로 월평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변강쇠 타령’의 그 대목을 중시한 유지들이 월평리 능선에 옹색하나마 변강쇠, 옹녀 무덤을 쌍분으로 조성하고, 주변에 돌로 만든 조형물을 세웠다.
잠시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산길을 접어들었다. 묘지로 가는 길 입구에 옹녀 샘이 있었다. 물속에 옹녀가 발가벗고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나상(裸像)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넘어져 있는 것이 많았다.
그 중에도 제일 인기가 있는 것은 옹녀와 변강쇠가 한 몸이 되어 있는 석상이었다. 앞은 옹녀이고 뒤는 변강쇠이었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이 되어 흥미를 끌었다. "너무 만지면 부풀어 올라 터집니다." 누군가 한 마디 하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일단 변강쇠, 옹녀에 관한 연고지 기행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하산을 하면서 문득 이 노래는 단순히 음란한 성에 대한 유희가 아닌 하층 유랑민의 비극적 생활상이 광대들의 자술적 전기와 결부되어 있다는 또 다른 주장이 떠올랐다. 즉 이들의 유랑은 19세기 농촌공동체의 경제적 분화 과정에서 발생한 유민층이 농촌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집단에 의해 패배해 간 사회적 현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패배의 아픔 속에 유랑 걸식을 했던 변강쇠 부부, 그러고 보니 성씨도 하필이면 '변'이다. 이는 똥으로 통한다. '즉 똥 같은 녀석이 한 개만 세다', 그 센 것도 비정상적이어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을지 모르겠다.
별 생각 없이 성에 대한 말초적 감각으로 덧칠을 했던 일이 죄스러워진다. 변강쇠 부부, 이제 모든 괴로움 다 내려놓고 이승에서 다 못한 평화와 안식을 누렸으면 한다.

변강쇠, 옹녀 쌍분


옹녀탕





제일 인기가 있는 나상 - 앞은 옹녀이고 뒤는 변강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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