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한옥마을
2016년 3월 2일/ 행전 박영환
오래전부터 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늘 벼르기만 하고 가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무작정 택시를 타고 기사님께 '북촌'에 데려다 달라고 했다. 딸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데도 오늘따라 길이 많이 막혀 시간이 꽤 걸리고 택시비도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차에서 내렸지만 막상 어디를 들어가야 할 지를 몰라 주민께 여쭈어봤다. '돈미약국' 쪽에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과연 그쪽 길에 많은 사람들이 붐비었다. 내국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외국인들이었다. 타고 온 관광 버스만 해도 여러 대 있었다.
한국의 옛 모습을 소개하기에 좋은 곳이기에 관광코스로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북촌 한옥마을은 시간이 정지되어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곳으로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도 생활한옥촌은 전주한옥마을 정도를 제외하면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도심에 어우러진 북촌한옥마을의 생생한 체취를 느끼는 즐거움은 의미가 있다. 이곳은 한옥들만을 따로 모아 전시 형태로 꾸며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고향마을에도 한옥이 조금 남아있고 나도 지금 한옥에 살고 있다. 요즈음 시골도 가옥을 양옥으로 개량하는 추세이기에 한옥이 많이 없어졌는데 우리마을은 그에 비하면 꽤 남아있는 폭이다. 사실 이렇게 된데에는 나의 공도 약간은 있다. 퇴직을 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나도 약간 고민을 했다. 몸채는 나름대로 공을 들인 목재 기와집이기에 보존을 하고 그동안 비워놓는 통에 많이 허술해진 사랑채는 해체를 할까하는 생각도 했다. 형제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이 집을 정성스럽게 지어 지키시던 할아버지, 아버지 생각을 하게되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한옥을 전문으로 하는 목수 분과 논의하여 사랑채도 겉모양은 그대로 살리고 안은 약간 바꾸었다. 즉 3칸은 서재로 만들었고 한 칸은 정자로 만들어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한 것이다. 물론 몸채는 구들방을 살려 따끈따끈하게 살고 있다.
그 이후 우리마을에 나와 같이 객지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분들이 몇 명 있는데 이분들도 우리집을 고쳐놓은 것을 보고 당신들의 선대가 살던 한옥을 헐지 않고 적극 수리를 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고쳤지만 북촌 마을에 비하면 소박한 시골집일 뿐이다. 북촌 마을의 집들은 한결같이 크고 웅장하며 화려했다. 다만 우리 마을은 평지이며 마당이 이곳보다 넓은 것 같았다. 이곳은 건물에 비해 마당 넓은 집이 별로 보이지 않고 지대가 높아 눈비가 올때는 약간 힘이 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또 청와대와 경복궁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통의 마을이란 큰 긍지는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이 마을을 지탱하는 큰힘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은 좋은데 이렇게 많이 몰려오니 불편한 점도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담장도 높이 쌓고 대문도 꽁꽁 닫아걸어두고 있었다. 대문마다 주민들이 거처하는 곳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開門萬福來' 란 입춘서를 붙여놓고 날이 새면 문부터 먼저 열어놓는 우리 마을과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 마을의 어떤 집은 아예 대문도 없다.
아무튼 북촌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이마을 분들은 사생활에 엄청 피해를 입는 등 참 고생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당국에서도 약간의 배려는 하겠지만 충분히 지원을 하여 고생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가까이 청와대가 보인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구한말에 신학문을 통한 교육구국(敎育救國)·교육입국(敎育立國)의 취지에서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중앙고등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