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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행전 박영환

 

2019년 3월1일(금)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를 찾았다. 문복산 아래 자리잡은 마을로 수몰이 되기 전에는 여러 자연 부락이 있었고 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곳에도 오강재, 추모재, 효진재 재실이 있다.  

 

 

 

 

 

오강재(梧岡齋)

 

관리문중: 밀성박씨

 

소재지: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175

운문사행 도로를 타고 가다가 운문사 입구에 이르기 전 좌측에 동리를 알리는 안내 표석이 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가면 동리 경로당이 있고 그 뒤편 마을 산기슭에 제우당 묘소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 붉은 벽돌기둥(대문은 달지 않음) 입구를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웅장한 콘크리트 벽돌 구조 건물이 있다. 지붕은 팔작 기와지붕이며 마당은 자갈을 깔았고 블록담장을 둘렀다. 건물 우측에 건물을 지을 때 공헌한 후손들의 헌성비가 있으며 재사 뒤편에는 푸른 대나무가 있다.

 

배향인물: 1)제우당(悌友堂) 박경전(朴慶傳)[1553 명종8-1623 인조1]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효백(孝伯), 호는 제우당(悌友堂이모당(二慕堂). 할아버지는 박하담(朴河淡),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박이(朴頤), 어머니는 만호(萬戶) 예신충(芮信忠)의 딸 의흥 예씨(義興芮氏)이며 이서면 수야리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배위는 군수 박옥형(朴玉衡)의 딸 순천 박씨로 아들 박정(朴珽)과 박기(朴璣)를 두었다.

박경전(朴慶傳)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부친상을 당하여 상주의 몸으로 여막을 지키던 중, 1592 4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에 이어 울산, 김해, 양산 등이 함락되고 마침내 20일에는 청도까지 왜적이 침범했다.

이때 박경전은 통곡하여 가로되 시운이 불행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기울어진 이때 비록 상주의 몸이지만 어찌 작은 허물을 피하여 대의를 허물게 하겠는가, 마땅히 나라를 위해 지킬 것이다.” 하며 부친 묘전(墓前)에서 아우 경윤, 경선과 함께 삼형제가 기의(起義)를 공서(共誓)한 후 형제·조카 및 동민을 따르게 하여 성현준령(省峴峻嶺)을 거쳐 청도 산동 지역 운문산 일대에 이르러 1592 5 1일부터 총 34회 출전하여 수많은 적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고, 경주와 울산 전투에도 참전하여 전과를 올렸다.

1598년 창녕현감(昌寧縣監)에 봉해졌고, 1605년 선무원종(宣武原從) 2등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뒤 1816(순조 16) 병조판서 자헌대부 겸 지의금훈련원사에 추증되었으며 청도군 이서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아우 박경윤과 함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예부운략(禮部韻略)의 판본을 복각(復刻)하였으며 제우당문집(悌友堂文集)이 있다.

 

연혁: 1854년에 창건했다. 처음에는 4칸 한옥이었으나 건물이 노후되어 헐고 2016년에 양옥으로 신축했다.

 

 

 

 

 

다음은 추모재입니다.

 

 

 

 

추모재(追慕齋)

 

관리문중: 함창 김씨

 

소재지: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236번지

마을 뒷산인 구뫼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 3(고방, 출입문, ) 솟을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팔작지붕 와가 3(2, 마루1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홑처마이며 자연석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청 벽에 벽진(碧珍) 이태일(李泰一)이 근찬한 추모재기’, 중앙 전면에 재사 이름인 追慕齋 현액이 있으며 기둥마다 주련이 있다. 좌측에 3칸 하당이 있고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을 둘렀다. 재사 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배향인물: 김재일(金載日)의 선재(先齋)로 후손들이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연혁: 1840년에 창건했으며 2015년에 기와를 번와하는 등 부분 수리를 했다.  이 동리에 함창 김씨가 입촌한 것은 250년 정도 되었으며 전에는 20호 정도 살았으나 현재는 7호가 살고 있다

 

 

 

다음은 효진재입니다.

 

 

 

효진재(孝眞齋)

 

관리문중: 재령 이씨

 

소재지: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846-1

문복산 아래 소진마을 개울가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 팔작지붕 4칸 와가이며 자연석 초석 위에 사각 기둥을 세워 구체부를 구성했다. 마루에 효진재기가 걸려 있으며 좌측에 관리사가 있다. 뒤에는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고 재사 입구에 큰 은행나무가 있다.

 

배향인물: 이종명(李宗明)

본관은 재령이며 자는 철보(哲甫)이다. 향산(鄕山) 이백신(李白新)의 손자이고 지암(砥巖) 이결(李潔)의 아들로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다. 이재사는 그의 묘재이며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가 찬한 묘갈명이 있다.

 

연혁: 1924년에 지었으며 그 후 몇 차례 중수했다.  자손들은 청도군 이서면 금촌리에 집성으로 살고 있다.

 

 

 

 

오진리 (梧津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  소개된 오진리는 다음과 같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오이동(梧耳洞)과 소진동(小津洞)을 병합하여 오진동이라 하였다. 마을로는 상리(上里), 오이동(梧耳洞), 숲 안, 용방(龍坊), 정상(頂上), 점 터, 소진(小津) 등이 있었다.

 

상말[上里]은 오진동에서는 가장 위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옹강산 기슭에 금수탕이라는 약수가 있고, 지금은 인가는 없다. 숲 안은 오이골 안쪽에 숲 안에 위치한 마을이다. 점 터[점 터골]는 오릿골과 숲 안 마을 중간에 있는 마을로 운문 솥이 생산되던 곳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때부터 제철(製鐵)을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증명할 만한 문헌 기록은 없다. 솥을 만든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일찍부터 쇠를 다루었다는 것은 운문산 일대에 많이 남아 있는 슬러지(sludge)로 보아 알 수 있다.

 

오이동은 용방(龍坊) 또는 오릿골이라고도 하며, 오진리의 중심 마을이었다. 마을 지명 유래지 운문댐 발굴 조사 보고서에는 옛날 큰물 난리 때 인근 주민들이 오동나무 배를 타고 피신하여 재난을 넘겼다고 해서 오이동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지만, 골이 깊어 오리나 된다고 해서 오릿골이란 설도 있다.

 

정상은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과 경계이며 먹방 정상과 멀지 않다. 정상이라는 말은 고개 마루라는 뜻이다. 소진은 마을 지명 유래지에는 작은 나루가 있어서 소진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원래 이름은 쇠징이다. 쇠징이란 작은 점 터라는 뜻으로 이곳에도 쇠를 다루던 점 터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형성 및 변천]

운문사와 함께 있었다는 소보갑사가 있었던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아래쪽에는 혈거지가 있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이위면(二位面)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오이동과 소진동을 병합하여 오진동이라 하고 운문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오진동에서 오진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문복산 줄기에서 형성된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운문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져서 무적천을 이루고, 운문댐으로 들어간다.

 

 

[현황]

2012 6월 현재 면적은 14.05이며,  109가구에 180[남자 85, 여자 95]의 주민이 살고 있다. 북동쪽은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일부리, 북서쪽은 운문면 방음리, 남쪽은 운문면 신원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수몰 이전에는 오진리에는 상리(上里), 오이동(梧耳洞), 숲 안, 용방(龍坊), 정상(頂上), 점 터, 소진(小津)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다. 옛날 마을은 대부분 수몰이 되었고 수몰이 되지 않은 자투리 부분과 소진 마을에만 일부 주민이 살고 있다.

 

농경지는 대부분 운문댐에 수몰되었고, 오진리 입구에 있는 농경지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부분 한국 수자원 공사에서 지원을 받아 표고버섯을 주 작물로 재배하고 있다. 또 논밭에는 토마토를 재배하여, 관광철에 주민들이 길가에서 판매하고 있다. 남서쪽으로 국가 지원 지방도 69호선이 방음리, 순지리와 연결되고 있다.

 

2008년 산림청의 산촌 생태 마을로 지정되었으며, 2010 4월부터 생태 마을 조성사업으로 총 사업비 14억 원을 들여 청정 임산물 가공 창고 1, 표고버섯 재배 하우스 18, 산촌 녹색 체험관 6, 등산로 등이 조성되어 2012 7월에 완공되었다.

 

운문댐 끝 부분에 혈거지가 있었나 지금은 모두 물에 잠겼고, 소보갑사가 있었던 곳은 남양 홍씨들의 묘지가 되었다.

 

  한편 청도 군지(1991)에는 오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문복산(文福山)의 산줄기들과 운문산의 연봉들이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감아 돌면서 여기 저기 골을 이루고 계곡마다 계천이 흘러 깊고 얕은 계곡들이 무수한데 시냇가에 취락이 형성된 마을이다. 오직 남북으로 운문천을 따라 골이 열려 있어 앞 뒤 할 것 없이 산봉(山峰) 또는 산등(山嶝)이 솟아 있어 산중다운 정취가 풍기는 곳이다. 오진리는 인근의 운문사 즉 오작갑사(烏鵲岬寺)와 지연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가슬갑사(嘉瑟岬寺)를 중심한 이 일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자 원대한 국책을 수립하여 실천에 옮길 때 이곳도 화랑들이 발자취가 스며든 곳이라 하겠으나 당시의 내력은 인위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소멸되고 다만 1600년을 전후하여 남평인 문진호 공이 입주하였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설에는 밀양 박씨라고도 한다. 소진(小津)에도 임란을 전후하여 김해 김씨가 정착하여 동의 기틀을 잡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이(梧耳), 오릿골

옛날 대홍수로 주민들이 피신을 할 때 오동나무 배를 타고 이곳에 닿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산중에 배가 있을리가 없고 그렇다고 위태로울 때를 미리 헤아려 배를 미리 마련한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오동나무 토막에 의지하여 구명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오동나무 토막을 배로 비유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또 다른 설은 이 곳에 오동나무가 많아서 오릿골 즉 오곡(梧谷)이라 부르다가 변한 음이 오이골로 되어 오이(梧耳)로 표기한 것이 아닌가 믿어진다. 구전대로라면 오주곡(梧舟谷)으로 마을 이름이 지어져야만 타당할 것으로 믿어진다. 아무튼 오동나무와는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진(小津)

옛날에 대홍수가 나면 다리가 없어 배로 건너다니던 작은 나루터라고 소진으로 마을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진이란 동 이름이 운문댐으로 인해 다시 글자 그대로 현실화가 된 것 같다. 공사가 완공되어 역시 배편 이용이 가능하다. 당시에 산골이 급류와 암석투성이의 운문천을 과연 배로 건너다닐 수가 있었겠나 하는 점에는 의문이 가나 지명대로 현실과 부합되는데는 신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쟁이, 정상(頂上)

경주와 경계지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고 정쟁이 즉 정상으로 표기한 것이라 여겨진다. 지대가 높은 곳을 뜻한다.

 

제부리(製釜里)

솥을 구워낸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제부(製釜-솥을 만듦)의 내력은 신라시대부터다. 이 마을은 당시에 철을 산출하여 신라군의 무기를 생산한 곳으로 이런 곳은 경주로 가는 길목에 허다하다. 현재도 점터의 유적지가 확인되고 있다. 이런 환경 하에서 철()을 다루던 기능공의 후예들이 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신원리, 방음리 등지에서 생산된 운문솥은 일제시대까지도 전국에 명성이 높았다. 이런 배경에는 기능공과 철과 목탄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기타 자연부락으로는 용방(龍坊)과 상말(上里), 숲안이 있다. 화랑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던 시대는 군산 비밀기지로 일절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문헌이 거의 없으니 애석하기가 말할 수 없다.

 

참고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밀성 박씨 제우당파, 함참 김씨, 재령 이씨 후손, 마을 주민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