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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및 이운룡함 명명 기원 행사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및 이운룡함 명명 기원 행사

 

 2019년 3월 1일(금),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청도 독립만세운동의 효시가 되었던 장연리 의거를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장연리 918-10, 경북 청소년 수련원 입구)이 있었다. 이 행사의 주최는 매전초등학교 총 동창회이며 장연리 기념비 제막은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가 주관했으며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이운룡함 명명 기원행사는 매전초등학교 총 동창회 및 온막리 향우회가 주관했다. 홍보행사는 이운룡 장군의 생가가 있던 온막리 솔정에서 매전초등학교까지 대구 국악취타대를 선두로 매전초등학교 운동장까지 행진이 있었으며 이어서 기념식이 있었다.  

 

 

 

 

 

 

 기념비 제막 

 

 

기념비 취지문

기미년 3.11 장연리 대한독립만세 시위

 

  일제 강점기 폭압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의 울분은 1919 3 1일 민족대표 33인의 3.1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자 목숨을 건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져갔다

  청도군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이다. 1919 3 11일 장연리 길명의 농민 김집이(金集伊. 28)는 이 마을 고성(固城) 이씨(李氏) 이원당(李元塘) 문중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비분강개를 금할 수 없었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이만(盧二萬, 34), 이선이(李善伊, 32), 이작지(李作之, 30), 이용술(李龍述,31), 최두천(崔斗千, 27), 이학천(李學千, 29), 배돌이(裵乭伊, 30) 등과 함께 그날 밤 9시와 이튿날 밤 9시 두 차례에 걸쳐 연인원 100여 명의 주민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마을 골목을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길명 마을의 독립운동가 이동기(李東基) 선생 집 앞에서 다시금 모여 해산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 주재소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인지하고 주동 인물을 수소문하여 주동자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선생 등을 검거하여 고문 후 대구 검찰청으로 이송하였지만 모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김집이 선생과 노이만 선생은 함께 도주하였는데 후일 노이만 선생만 검거되어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김집이 선생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행방불명이 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이후 일제의 갖은 탄압으로 만세운동 관련 선생들의 가족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며 이 마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우리 청도군 3,1운동의 효시가 된 장연리의 3 11일 대한독립만세 시위 기념비 건립은 장연리 출향인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금을 모으고 청도군청 관내의 많은 사회단체에서도 성금과 후원을 하여 건립하게 이르렀다.

개인이 겪어야 할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독립 만세운동에 나선 여덟 분의 독립운동가, 또 그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불렀던 장연리 사람들의 이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며, 우리들 가슴 속에 새기고 후손 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이렇게 높고 아름다운 비석을 세우는 바로다.

 

                                                           2019 3 1

                            장연리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공동추진위원장 이순주, 이원희/ 글 이종암/ 진행 김욱/ 사료 김진태

 

 

 

 

 

 

 

 

 

 

장연리 기념비에 새겨진 취지문을 이종암 시인이 읽고 있다, 왼쪽은 이순주 기념비 건립추진위원장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분들의 후손이 인사말씀을 드리고 있다

 

 

장연리 3.11만세 시위에 관한 사료를 발굴한 김진태 향토문화운동가 

 

 

대구 국악취타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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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하신 분들의 단체촬영

 

 

 

 

장연리 3.1운동 기념비 시

 

우리고장은 임란의 영웅 식성군(息城君이운룡(李雲龍장군이 태어나고 독립운동가 매운(梅雲이정희(李庭禧선생겸산(兼山김정기(金定基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열께서 목숨을 바쳐 왜적에 맞선 항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은 장연리 사람들 1919년 3월 11청도에서는 맨 처음으로 일제에 맞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느니그 횃불과 함성은 꺼져가는 민족의 앞날을 밝히는 등불이요스러져가던 나라를 살린 생명의 숨결이도다이 고귀한 등불과 숨결이여육화산처럼 드높고 동창천처럼 푸르고 끝없어라. 2019년 31

시인 현담 이종암 짓고 서예가 솔뫼 정현식 쓰다.

 

 

 

동창천 

 

다음은 이운룡함 명명 청원 행사입니다

 

 

 

 

1. 해군 함정 이운룡 함 명명 청원서

 

청원요지

우리 고장 식성군(息城君이운룡(李雲龍, 1562-1610) 장군은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충무공(忠武公이순신(李舜臣장군을 도와 화합과 통합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경상 전라 수군의 연합함대 구성을 이끌었고 옥포한산대첩에서 선봉장으로 용감히 싸워 왜적의 서해 진출을 저지함으로 임진란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구국의 영웅입니다장군께서 목숨을 걸고 보여준 용기와 지략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나라 사랑 정신이기도 하여 그의 혜안과 충정을 높이 기려 우리 해군 함정에 그의 이름을 명기함으로써 필승 해군은 물론 우리 전 국민의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1) 공적사항

이운룡 장군은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명대동(온막리)에서 남해 이몽상(李夢祥)의 아들로 출생, 1585년 무과에 합격하여 1587년 선전관(宣傳官), 1589년 옥포만호(玉浦萬戶), 1593년 웅천현감, 1595년 통정대부(정삼품), 경상좌수사, 1604년 선무공신 삼등에 녹훈 식성군에 봉해지고 1605년 2월 도총부부총영포도대장 겸 화기제조 비변사당상같은 해 9월 삼도 수군 통제사, 1607년 함경남병사, 1609년 충청수사를 역임한 후 고향에서 전상 후유증인 종기의 악화로 병사하신 분으로 중요 공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592(선조 25) 4월 13일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하자 경상 좌수사 박홍은 적군의 거대한 형세에 눌려 진영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이어 적군이 거제로 향하자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전선과 무기를 모두 침몰시키고 군졸 10,000여 명을 흩어버린 후 남해 앞바다에 떠돌아다니다가 육지로 도주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이때 원균 휘하 옥포만호로 있던 이운룡 장군은 원균을 찾아가 나라의 중책을 맡고 있으니 의리상 마땅히 그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절(死節)해야만 할 것이고 이 지역은 곧 전라충청도의 방어선이니 이 지역을 잃게 되면 전라충청도를 잃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국사는 낭패가 될 것이요지금 우리 군졸이 피폐할지라도 그래도 보수할 수 있을 것이고 전라 수군이 건재하니 구원을 청해서 견내량을 막아 적군의 길을 끊어 적군이 거제도로 지나서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한다면 남방의 일은 성공할 수가 있을 것인데 어찌 이 일을 하지 아니하고 어디로 가려 하오?”라고 상관에게 직언하고 전라 좌수사 충무공 이순신의 협력을 얻어 같은 해 5월 7일 옥포 해전에서 경상우수군과 전라좌수군의 연합함대가 왜군과 대치할 때 선봉장으로 왜적을 공격하여 적의 예봉을 꺾고 적선 50여 척을 불태우는 임진란 최초의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데 이바지한 공이 지대한 분입니다.

 

1592(선조 25)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 이운룡은 충무공과 상의하여 고성 견내량을 지나가려는 적선 100여척을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 후 배를 돌려 선두에서 적선을 공격함으로써 적선 50여 척을 격파 및 불태우고 적군 수만 명을 죽여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는 전과를 올림으로 거제도 서쪽지역의 바다가 평온해지고 전라충청의 해로가 막히지 않게 되어 우리의 군량 보급과 명나라와의 연합군 활동도 원활하게 됨으로써 임진란의 전국을 수세에서 승리로 만회시켜 국가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게 한 것입니다.

 

이후 사천포 안골포부산포 등 여러 해전에 참가하여 항상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왜적의 기세를 꺾어 적군의 남해 진출을 막고 우리의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케 하는 데에 수훈을 세웠습니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 시충무공을 대신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하여 죽고 수군의 형세가 약해지자 도원수 권율장군의 명에 의하여 이운룡 장군은 경상병사 권응수와 합세하여 영천 창암 들에서 적군을 무찌르니 적이 다시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이북 지역이 평온하게 되었습니다.

 

1598(선조 31) 경상 좌수사 이운룡 장군은 서애 류성룡의 뜻에 따라 영남의 곡물을 도성으로 운송하여 조정과 명나라 지원군의 군량을 확보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는 명나라 군과 왜군을 공격할 때 왜적을 사로잡아 적장 풍신수길의 사망 정보를 먼저 입수하여 조정에 보고한 후 군대를 정돈하여 부산항에서 돌아가는 적군에 타격을 가했습니다.

 

전후 1605(선조38) 2경상 우수사 겸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충무공의 유업을 계승하여 전함을 비롯한 수군의 전열을 재정비하였고 1606년에는 선조의 명으로 통영에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렬사를 건립하였으며 1607(선조 40)에는 함경 남병사로 임명되어 군비를 정돈하고 갑산성을 중수하는 등 북방의 국방 경비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2, 선조 임금의 인정

1604(선조 37)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는 선무공신 3등 식성군에 봉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력으로 강구(强寇)를 대적했으니 장하게도 명장의 기풍이 있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급급했지만 오직 그대만이 칼을 들고 대적하였네적벽의 웅위에 비교해 볼만하다.매우 강성한 적의 기세를 꺾은 것은 이것이 누구의 힘이었던가이미 추락된 왕의 존엄을 떨치게 한 것은 다만 그대의 공이었다

그런데 이운룡이 이렇게 전공이 있는데도 3등공신이 된 것은 우선 전사를 하지 않았고 또 원균의 수하 장수이기에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것으로 사료됩니다선조실록 권 제57에는 이순신의 부하 장수들은 대부분 당상관으로 승진되었으나 원균의 수하 장수로서 우치적과 이운룡 같은 사람은 그 공은 매우 많은데 그 상은 도리어 다른 못 미친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많은 동료들의 천거

1605(선조 38) 경상 우사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누가 적임자인가 라고 물었을 때 영남의 여러 장수 모두가 이운룡이 수전에 익숙하니 삼도수군통제사 적임자라고 하여 도체찰사 한음 이덕형의 천거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것을 보면 이운룡은 모두가 인정하는 명장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 수군의 해사(海史)에 남긴 공적

이운룡 장군이 남긴 거영일기와 계본등록이 있습니다.

(1)거영일기는 이운룡 장군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1605년 7월 30일부터 1606년 9월 1일까지 1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로 좌수사와 동래부사로부터 받은 왜와 관련된 정황만호나 대장 등의 소속 군사에 대한 처벌의 경우풍수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배를 움직여 표류하고 잃어버린 경우수유(受由)를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행동한 경우 그리고 그의 업무 중 주요한 부분이었던 군사와 전함점열조선소순시 등의 기록이 있습니다.

(2)계본등록은 2책으로 되어 있으며 수군 통제사로서 국왕께 올렸던 장계 138건이 기록되어 있고 수군의 활약상과 화기전선(戰船)에 관한 기록 및 전후의 수군 편제인물훈련과정방비상태를 비롯 각진의 군비 상황수군력 강화와 정비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이두식 토를 달아 일반인들이 보기 쉽게 한 것이 특징이고 당시 우리나라 수군의 화기 및 각종 전선에 관한 기록으로 특히 판옥선이 전투에 편리하고 또한 왜군을 판옥선으로 격파하였으며 화전화시(火箭火矢)의 효과가 컸다고 왕에게 진언하는 모습은 뒷사람에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5)해군 강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해군

향후 해양 강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 해군에서 차기 KDR-(4800t)급 이상 구축함을 건조하여 진수할 때는 이운룡함으로 명명하여 주시길 청원합니다.

 

*근거자료

조선왕조실록(이운룡 관련 기록 59)

식성군 실기(이운룡 관련 재령 이씨 가전 문서집, 1947)

거영일기(1605.7.30. - 1606.9.1. 진중일기)

임란 수군과 이운룡 장군(이재호 저, ‘軍史’ 2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2016년 12월 5

 

                                 청원인 대표 청도군수 이승율

 

 

장연리 기념비 및 이운룡함 명명을 위해 앞장서서 추진한 총동창회 김욱 총무가 거리 행진 중 대한민국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운룡 장군이 심었던 용송유지 - 매전면 온막리 솔정, 이 근처가 이 장군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김덕수(매전면 지전 출생, 해군소장 전역) 공동추진 위원장이 이운룡 함 명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이종평(매전면 온막 출생, 대경대 부총장 역임) 공동추진위원장, 오른 쪽은 매전초등학교 총동창회 이순주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