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운문면 순지리 운곡정사/ 행전 박영환
2018년 7월 26일(목)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를 찾았다. 원래 운문면 대천리와 마주하고 있었던 마을이나, 지금은 모두 운문댐에 수몰되고 운곡 정사 등 몇 가구가 남아 있다.
종손인 김병돈 씨의 안내로 운곡정사 및 원모재를 둘러봤다.


운곡정사(雲谷精舍)
◯관리문중: 경주 김씨
◯소재지:청도군 운문면 순지리 342-2( 운문면 운문로 2297)
운문면사무소에서 순지리 방향 국도 69호선을 따라 2,5킬로미터 올라오면 길 우측 언덕에 운문댐을 바라보며 서북방향으로 좌정하고 있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칸(마굿간1, 방1, 출입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一’자형의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二’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안채 뒤편 언덕에 별도의 공간에 사당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1.2미터 정도의 석축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집이다. 정면 4칸(고방1, 방2, 마루1, 중당협실형) 측면 1칸 반인데 좌측 온돌방의 전면에는 중간 설주 등 고식의 수법이 남아 있다. 마루 앞에 ‘雲谷精舍’ 편액이 걸려 있으며 안쪽에는 ‘三石亭’도 걸려 있다.
고방 좌측에 인접된 건물이 있는데 세면대와 농기구 창고로 사용한다. 우측에도 1.5칸이 인접되어 있는데 1칸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며 반 칸은 서고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는 정면 4칸(부엌, 방2, 마루1) 측면 1칸 규모의 우진각집이다. 사당은 3칸규모의 뱃집이다.
운곡정사는 건물의 구조와 건축양식이 건축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랑채 전면의 일반형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영창 등은 건립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이다.
쌍영창은 17세기 후반부터 점차 줄어들어 18세기 들어와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남부 지방인 영천 등지에서는 18세기에도 쌍영창이 발견되고 있어 운곡정사는 쌍영창 사용의 하한 연대를 조명하는데 의미 있는 건물로 생각된다.
◯연혁: 이 건물은 운문면 순지리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경주 김씨 종택으로 김경의(金慶誼)[1696- 1751]가 건립한 1700년대의 건물이다. 김경의의 증조부는 학덕이 높아 남천서원에 봉향하고 있는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이고 할아버지는 운계(雲溪)김주(金柱)[1612-1678]이며 아버지는 입향조인 김필강(1653- 1690)이다.
대대로 가업을 계승하여 번창했으며 취죽당의 8대손인 김몽로(金夢魯)[1828∼1884]는 학행으로 고을에 존경을 받았다. 그의 자는 성우(聖遇)이고 호는 경재(敬齋) 또는 소운(小雲)이다. ‘경재유고(敬齋遺稿)’ 2권이 전하고 있다.
‘운곡정사’란 현판은 경재의 아버지 김지목(金志穆)[1810-1833]의 글씨이다.
이 종택은 원래 순지리 406번지에 서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운문댐이 축조되면서 마을이 수몰 되어 1993년 현재 자리로 이건하였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13대 종손 김병돈(金炳暾)[1958- 현재]이 가업을 이어 관리하고 있다.







원모재(遠慕齋)
◯관리문중: 경주 김씨
◯소재지: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 342-2
경주 김씨 종택인 운곡정사 옆에 운문댐을 바라보며 서북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3칸(방2, 출입문)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4칸(방2, 마루2), 측면 4칸(방3, 마루1) 규모의 ‘ㄱ’자형 재사가 있다.
화강석 2단으로 구성한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마루와 방은 사분합들문으로 필요에 따라 전 5칸을 하나의 공간으로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전면에 툇칸을 두어 마루와 방을 연결시켰으며 좌툇간 뒤쪽으로는 온돌방과 마루방 2칸을 수직으로 연결시켰으나 온돌방과 마루방은 독립성을 주고 있다. 측면과 뒷면에 퇴를 달아 전체 평면의 원활한 연결을 돕고 있다.
상부 가구는 5량가이며 전면 툇간 상부는 널판 우물천장을 올려 치장하였으나, 평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재사 전면 중앙에 ‘遠慕齋’를 현액하였으며 대청에 조양제가 근찬한 ‘원모정기;, 후손 순영이 근찬한 국한문 혼용 ‘원모재 이건기’, 박용운이 근찬한 ‘원모재 상량문’이 걸려 있다. 시 2편과 ‘樂善’, ‘仰景’등도 있다.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으며 재사 주변에 방형의 석축 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운계(雲溪) 김주(金柱)[ 1612∼1678]
본관은 경주이며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1593∼1647]의 아들로 호는 운계이다. 학행이 높았고 유고(遺稿)가 있다.
◯연혁: 정확한 건축 연대는 모르나 1967년에 중수했다. 1993년 수몰지역 순지리에서 이건하였다.
건축 양식이 독특하고 건축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32호로 지정되었다.
종손 김병돈이 ‘운곡정사’에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경재 곽순 유허비
원모재 옆에 경재(警齋) 곽순의 유허비가 있다. 이 유허비 뒷면에는 ‘숭정4 무자 구월 입’이라 새겨져 있다.
곽순(郭珣)[1502∼1545]은 조선 전기 청도 운문산에서 은거한 문신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백유(伯瑜), 호는 경재(警齋). 아버지는 사재감 첨정 곽수녕(郭遂寧)이고, 어머니는 김철단(金哲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곽효원(郭孝元), 증조할아버지는 곽성기(郭成己)이다. 부인은 정언수(鄭彦脩)의 딸이다.
그는 1524년(중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중종 23) 27세에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호조 좌랑·형조 좌랑·진보 현감(眞寶縣監)·춘추관 기주관(記注官) 등을 거쳐, 1543년에 사예(司藝)가 되었다. 이듬해 장령으로서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한 후에는 홍문관 교리로서 경연의 시독관을 겸했고, 봉상시 정·사간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교리로 재직한 초기에 어진 사람을 골라 세워야 한다는 택현설(擇賢說) 때문에 곤욕을 겪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소윤과 대윤간의 세력 투쟁이 심해지더니 소윤 윤원형(尹元衡)의 횡포가 심하게 되자 관직을 포기하고 청도 운문산에 입산하였으나 을사사화 때 장살당하였다.
1568년(선조 1)에 관직이 환수되었고, 영천(永川) 송곡 서원(松谷書院)과 청도 우연 서원(愚淵書院)에 제향되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에 유허비가 있다.
(위의 내용은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박홍갑)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순지리(蓴池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집필자: 박윤제)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명칭 유래]
마을 앞에 늪이 있었고 늪에 순채 나물이 많이 돋아서 순지라고 했다고 한다. 순늪, 범뫼[호산(虎山)], 까막미기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다.
순늪은 운문사에서 내려오는 속칭 운문천과 경주시 산내면에서 내려온 물이 만나는 곳에 범산이 툭 튀어 나와 연(淵)을 이루고 늪이 된 곳인데 지금은 수몰되어 있다. 범뫼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범으로 인해 인가에 피해를 받아서 범산이라고 한다. 까막미기는 오항(烏項)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먹방의 입구라는 뜻이다. 운문사에서 보면 정확히 북쪽이 먹방굴이 있는 곳인데, 이곳에 묵방동이 있었다. 묵방은 북쪽 방향을 가리킨다. 묵은 검다는 뜻과 통하여 까막미기가 된 것인데, 까마귀와 연관시켜 한문으로 표기해서 오항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형성 및 변천]
1720년에는 동이위면(東李位面)에 속해 있었으며, 1832년에는 이위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운문면으로 되었으며, 오항동을 병합하여 순지동이라 하였다. 1988년 순지동에서 순지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천리과 더불어 운문면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었으나 운문댐 축조로 인해 수몰된 지역이다. 1996년 운문댐이 완공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동하였다.
[자연 환경]
운문사 계곡인 무적천의 물이 공암리에서 내려오는 공암천과 합쳐져서 큰 내를 이루는 곳에 있었던 순지리는 산을 등지고 하천을 안고 있는 배산임수의 지형이었다. 그러나 남쪽이 산으로 막혀 있고 북쪽이 열려 있으며 낮은 지역에 마을을 정했다가 하천의 범람으로 인해 마을이 계속 높은 지대로 이동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물속에 완전히 잠긴 상태이다.
[현황]
2012년 6월 현재 면적은 3.07㎢이며, 총 7가구에 16명[남자 11명, 여자 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남쪽은 운문면 방음리, 서남쪽은 운문면 방지리, 북쪽은 운문면 대천리·서지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본래 순늪, 범뫼[호산], 까막미기 등의 자연 마을이 있었으나 운문댐 축조로 다 수몰되고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까막미기는 안 동네와 바깥 동네가 있었지만, 지금은 운문댐으로 인해서 모두 객지로 나가고 1가구만 살고 있다.
농경지는 없고 산비탈에 남아 있는 밭에는 한국 수자원 공사에서 지원해서 표고버섯을 주로 경작하고 있다. 운문호를 따라 국가 지원 지방도 69호선이 지나고 있다.
원래 순지리 마을에 있었던 경상북도 민속 자료 제90호 운곡 정사는 지금 도로 남쪽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에는 고가인 운곡 정사와 사묘인 원모재가 있고 그 옆에 경재(警齋) 곽순의 유허비가 있다. 이 유허비 뒷면에는 ‘숭정4 무자 구월 입’이라 새겨져 있다. 운문댐 축조 발굴 조사 때에 고인돌과 고분군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당시 발견된 토기 조각은 원삼국 시대의 것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운문댐 관리 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운문산, 가지산, 억산(億山)에서 뻗어온 연봉이 줄줄이 갈라지면서 까치산 기슭에 층층이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공암천(孔岩川)과 운문천이 합류하고 그 너머로 문복산(文福山) 줄기가 병풍처럼 가리고 있다. 고분들이 도굴되고 황폐된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보아 오랜 옛날부터 주민이 자리잡아 살던 마을이다.
신라시대의 고분이 대부분 도굴된 흔적이 있고 파편 또한 산재해 있는 이 마을의 역사는 전해오는 구전이 없어 1600년 중엽부터 기록을 할 수밖에 없다. 경주인 김필강 공이 자리잡고 살아서 오늘의 순지리 동의 기반을 가다듬고 닦아 왔다.
이 마을도 운문천의 범람으로 수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마을도 차차 높은 지대로 옮겨갔다는 사실을 고분의 위치로 보아 알 수 있다. 자연의 재해는 마을의 변천을 무상하게 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순지(蓴池-순늪), 순호(蓴湖)
홍수로 마을 하단부에는 언제나 물이 고여 있는 곳과 하천 지하수로 수초인 수채사(水蔡絲-순채)가 곳곳에 자생하여 못 아닌 못인 늪이 많았다고 하며 부근에는 정자나무도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현상으로 인한 동명의 생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순차가 많은 늪인 순늪을 순지로 표기한 것으로 이는 자연 형태 그대로의 동명이라 하겠다.
오항(烏項), 까마귀목, 까막미기
마을의 뒷산 모양이 까마귀 형상이고 마을은 까마귀 목 부분에 위치했다고 붙여져 풍수설에 입각한 자연발생적인 동명이라 하겠다. 표기가 오수(烏首)라 하지 않고 목덜미 항자인 항(項)으로 한 것이 묘미가 있다.
호리(虎里), 범뫼, 호산(虎山)
오항과 같은 자연현상적인 이름으로 산모양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겠다.
*참고자료
-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운곡정사 김병돈 종손
-운곡정사 실측보고서(1992.4), 청도군,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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