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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삼족대가 있는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삼족대가 있는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행전 박영환

 

  삼족대는 한국 100대 정자 중에 하나이다. 아래에는 동창천의 푸른 물이 흐르고 아득히 먼 산들이 첨첩이 이어져 한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는 선경을 이루고 있다. 연중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절경을 감상하며 삼족당 김대유 선생을 기리고 있다.

<삼족대의 여름 모습>

 

삼족대에서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정자에 오르면 삼족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단아한 모습으로

솔바람과 푸른 물결을 벗 삼고 계시다가

자리 하나를 내어줍니다 

지난번에 올 때는 발자국 소리를 다스리지 못하고 

숨소리가 거칠었던지 어른이 계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또 계시지 않는구나 

냇물에 낚시를 하러 가셨습니까, 새 소리 바람 소리 따라 운문산에 가셨습니까, 아니면 명유들과 더불어 시를 소리 높이 읊고 계시는지요 

 

선생을 뵈오면 꼭 물어볼 게 있습니다

벼슬이란 게 무엇입니까

누구는 손발이 닳도록 빌어서 얻고, 누구는 남을 밟으면서까지 얻는데  

나라님이 벼슬을 주겠다고 부르는데도

일부러 병을 얻어 사양하고 초야로 돌아오셔서

계산(溪山)풍월(風月음아(吟哦)가 족()하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삼족(三足)이라 하셨으니   

그 깊은 뜻에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잠깐 수령으로 머물 때, 백성들이 신명(神明)으로 받드셨다지요

비록 물러나 있어도

소요당 박하담과 더불어 사창(社倉)인 동창(東倉)을 만드셔서 

백성을 구휼하시는데는 만족함이 없었으니  

그것이 진정한 목민관 아니겠습니까

남기신 탁영연보는   

무오년 사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귀중한 증언이요

고매한 인품에서 우러나온 시문들은 

후학들에게 삶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동창에서 유래된 동창천은 오늘도 흠모하고 느꺼워하는 마음을 담아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행전 박영환 '삼족대에서)   

 

 

 

<삼족대의 겨울 모습>

 

 

삼족대(三足臺)

 

관리문중: 김해 김씨

 

소재지: 매전면 금곡리 901번지

매전면사무소가 있는 동산에서 국도 20호선을 따라 1.2 정도 가면 우측 동창천(東倉川) 우연(愚淵)의 언덕 위에 유유한 동창천을 바라보면 동남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동북쪽으로 난 사주문을 들어서면 정면 3(2, 대청1) 측면 2칸의 건물이 있다. 구조는 얕은 기단과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온돌방에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았다. 북쪽 2칸은 통으로 된 방이며, 퇴와 툇마루를 두어 마루와 연결하였다. 대청은 통마루로 되어 있으며 남쪽 면과 뒷면에는 두 쪽으로 열수 있는 판문을 내었으며 온돌방 앞쪽에는 양쪽으로 열수 있는 두 개의 문으로 만들어져 있다.

정면 툇마루 벽에는 건물 이름인 三足臺가 현액되어 걸려 있으며 대청 벽에는 김용희가 근서한 삼족대 중수기’, 율곡 이이가 찬하고 김희연이 쓴 삼족당 서 박재상이 찬한 삼족대 중창기’, ‘삼족당기 김용정 등이 쓴 삼족대 운 등 여러 편이 편액되어 걸려 있다.

건물 뒤편에 자연석 큰 바위가 자리잡고 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서북쪽으로 낸 또 하나의 출입문을 열고 내려오면 한단 낮은 대지 위에 三足堂金先生 神道碑가 서 있다.

또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면 높은 벼랑 위에 쉼 없이 흐르고 흐르는 동창천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육각 정자가 있다. 높은 축대 위에 두리기둥이 받치고 있으며 마루에는 높은 험함을 둘렀다.

 

배향인물: 삼족당 김대유(1479-1552)

()는 천우(天祐)이며, ()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직제학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고, 탁영 김일손의 장질(長姪)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 계산(溪山)이 족()하고, 풍월(風月)이 족()하고, 음아(吟哦)가 족()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하고, 1519(중종 14) 삼족대(三足臺)를 건립하여 후진을 교육했다.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도의심교(道義深交)를 하였으며, 증직(贈職)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이다. 현량과(賢良科)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선암서원, 우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현재는 이서면 서원리 자계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연혁: 1519년 창건되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삼족당 김대유는 모든 직을 사임하고 향리(鄕里)에 은거하면서 후진들의 교학과 휼민 사업에 힘쓰게 되었는데, 이때 강정(講亭)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건립한 것이다.

 현재 신도비가 있는 자리에 삼족대의 관리사로서 방 2칸과 부엌과 방앗간이 자로 배열된 하당(下堂)이 있었고 삼족대 언덕 아래 벼랑에는 물에 뜬 강정(江亭)도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여러 번 중수했으며 지금 건물은 후손 김용희에 의해 새롭게 단장한 건물이다. 별장의 터와 별장의 모습 연구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五曲은 어데메요 奇異하다 三足사라

能淸能白 높은  千秋까지 말이 있네

漁鳥들도 서로친해 혼 無恙하니

꿈엔들 잊을소냐 勝地에 노던일을

- 도주지에 소개된 운문구곡가 중에서

 

 

 

 

 

 

 

 

 

 

 

 

 

다음은 유현재입니다

 

 

 

 

유현재(惟賢齋)

 

관리문중: 김해김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504

청도군 매전면 사무소에서 운문댐 쪽으로 20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우측 삼족대 밑 금곡마을 뒤편 삼족당 묘소 앞에 서향으로 좌정했다.

건물구조: ‘자은문(自隱門)’현판이 있는 3(2, 출입문1)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 골기와 5(3, 마루2, 중당협실형) 웅장한 재사가 있다. 1미터 정도 되는 대리석 석축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쌍여닫이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으며 전면에 재사보호를 위해 유리창을 달았다. 마루와 방 사이에는 사분합들문을 달아 필요시에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전면에 있는 툇마루 양쪽에 별도의 문이 있으며 마루 뒤에도 널판문이 설치되어 있다.

대청 정면에 재사의 이름인 惟賢齋 현액이 있으며 대청 마루 벽에 문학박사 이동영(李東英)이 근찬하고 방후손 김종쾌(金鍾快)가 근서한 국한문 혼용 유현재기가 걸려 있다.

하당은 3칸이며 마당은 자갈을 깔았고 대문에서 재사로 가는 중앙통로는 대리석을 깔았다. 재사주변에 시멘트 석축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삼족당 김대유(1479-1552)

()는 천우(天祐)이며, ()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직제학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고, 탁영 김일손의 장질(長姪)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 계산(溪山)이 족()하고, 풍월(風月)이 족()하고, 음아(吟哦)가 족()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하고, 1519(중종 14) 삼족대(三足臺)를 건립하여 후진을 교육했다.

남명(南冥) 조식(曹植)과 도의심교(道義深交)를 하였으며, 증직(贈職)은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이다. 현량과(賢良科) 천목(薦目)에서 기우(器宇)가 뛰어나고 견식(見識)이 명민(明敏)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연혁: 1998년 삼족당의 묘재로 창건했다.

 

 

 

 

 

 

 

다음은 충의재입니다

 

 

충의재(忠義齋)

 

◯관리문중: 고성 이씨

◯소재지: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749번지

매전면 사무소에서 국도 20호선을 타고 운문쪽으로 가다 보면 삼족대 건너편에 ‘충의재’라고 새긴 작은 표석이 있다. 여기에서 산길로 100여 미터 올라간 금곡리 웃마실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구조: 약 2미터 정도의 축대위에 골기와 4칸 전퇴(방2, 마루2칸, 중당협실형)의 재사가 있다. 겹처마이며 두리기둥을 세워 벽을 치고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대청벽에 ‘三湖齋’ 옛 현판과 후손 승헌이 국한문 혼용으로 쓴 ‘忠義齋記’가 걸려있다. 툇마루 양옆에 별도의 출입문이 있으며 재사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배향인물: 이경(李磬)

본관은 고성이며 모헌공 이육의 손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공은 문중 종숙질간인 이해(李海), 이잠(李潛), 이염(李濂), 이철(李澈)과 결의하고 가재(家財)를 풀고 창의 맹약문과(倡義 盟約文)과 격문(檄文)을 발표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맹세했다.

공은 청도, 매전, 금천의 장정 및 적천사 스님과 합세하여 유천과 오례산성을 방어하며 왜군의 증원군과 주둔군을 국지전과 유격전으로 교란시켜 적의 사기를 꺾었다. 특히 적의 칩입 길목인 유천에서 격전을 벌여 적병 다수를 참륙했고 그 뒤에도 야간 복병 및 기습 작전 등으로 적의 후방 보급을 차단시켰으며 곽재우 장군의 부대에도 합류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대구 망우당 공원에 세워진 영남 호국 창의단에 모셔져 있으며 화양읍 유등리 임란호국 충의단에도 배향되고 있다.

 

 

◯연혁: 1996년에 창건했으며 처음에는 삼호재(三湖齋)로 명명했다가 뒤에 충의재로 바꾸었다.

13대손 이승목이 재사 터전을 제공하고 이승일이 재사 4칸을 지어 헌성했다. 그 뒤 삼호회 기금 6천만원과 후손 이승헌의 6백만원 성금으로 관리사 부지를 확보하고 도장과 조경 축대를 쌓았다.

 

 

 

 

 

 

금곡리(金谷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금곡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명칭 유래]

금곡은 쇠실 또는 쇠골이라 하는데, 철광맥이 있어서 쇠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연 부락인 버꾸는 예전에 법이동이었다. 이곳으로 올라가는 계곡 좌우로 철광을 채취했던 곳이 있다. 해방 전후로 텅스텐을 캐던 광산이 있었는데 채산성 관계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형성 및 변천]

이서국 당시와 신라에 복속된 직후에 솔이산현(率伊山縣)이 되었다가 대성군(大城郡)이 되었을 때 소산현(蘇山縣)으로 바꿔진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상남면의 지역으로 쇠실, 쇠골 또는 금곡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당시 법이동을 병합하여 금곡동이라 해서 매전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금곡동에서 금곡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금곡리는 동곡재와 어성산을 뒤[북쪽]로 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앞으로는 동창천이 흐르고 있어 남저북고(南底北高)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버꾸[법이]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동창천에서 만나서 우연(愚淵)을 이루고 있는 언덕 위에 삼족대가 있다. 버꾸에도 농지가 별로 없고 담안 역시 농지가 없으나, 윗마을과 아랫마을에는 산을 개간하여 과수를 전업으로 하고 있다.

 

 

[현황]

2012 7월 현재 면적은 8.81이며,  79세대에 157[남자 82, 여자 75]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금천면 사전리·동곡리·신지리, 서쪽은 매전면 상평리·하평리, 남쪽은 매전면 동산리·당호리, 북쪽은 금천면 김전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국도 20호선 청려로가 지나고, 매전교 삼거리에서 지방도 919호선이 분기하여 남양리로 이어진다.

 

우연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이 해수욕장을 방불케 하는 곳이지만, 우연에는 물의 아래쪽이 회돌이가 생겨 1년에 한두 명씩 희생이 되기도 한다. 또한 물이 깊어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동창천 언덕 위에 삼족당 김대유가 별서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던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인 청도 삼족대가 있으며, 이율곡의 시편이 남아 있다. 김대유는 칠원 현감으로 재직하다 돌아와서 삼족대를 짓고 이곳에서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한편 청도군지(1991)에는 다음과 같이 금곡리(金谷里)를 소개하고 있다.

 

 

법이산(法耳山) 준령이 중천에 옹립하고 대곡산(大谷山)령 등으로 산의 품에 안긴 마을이다. 주위의 산봉들이 겹겹이 둘러있고 산 계곡에 마을로 남으로만 동창천에 흘러드는 계곡물을 주위를 따라 짧게 열려 있을 뿐이다. 법이산(法耳山) 비탈에 경사를 따라 층층이 취락되어 있고 한 마을은 계수변(溪水邊)에 자리잡고 있으나 지대가 상당히 저지대로 길보다 아래이 있다.

 

금곡리(金谷里)와 법이동(法耳洞)이 합쳐진 마을로 1600년 말경에 밀양 박씨가 정착하여 여러 방면으로 마을을 쇄신해 나갔다는 것이다. 아래 마을에도 윗마을과 같은 연대에 진주 강씨가 입촌했다는 것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고 1700년 중엽경에 경주 최씨가 입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쇠실, 쇠골, 금곡(金谷)은 옛날부터 금과 철광이 나왔다고 쇠실, 쇠골이라 하였는데 표기를 금곡(金谷)으로 했다. 이 곳에는 현재도 철광맥이 있어 매장량도 풍부하나 채산이 안 맞아 채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이(法耳)는 버구, 버귀라 한다. 이는 마을이 고봉에 둘러싸여 있고 일종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와는 첩첩이 차단되어 있어 외부의 소식에 어두웠다. 지봉수태(支烽燧台)가 일시적이나마 있을 때 소식이 빠른 귀 역할을 하였다 한다. 귀자를 넣어 저(봉수대를 가르킴)귀가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변하여 저귀로 저귀가 버구, 버귀로 다시 변하고 표기로는 법이(法耳)로 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담안, 장내(墻內)는 돌이 많아 집터 및 밭갈 때 나온 돌들로 돌담을 쌓았기 때문에 불러지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상촌(윗마을) 하촌(아랫마을)은 위치상으로 구분한 것인지 다른 뜻은 없다.

 

*참고자료

-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국역 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 김해 김씨 및 고성 이씨 후손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