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암/ 행전 박영환
2017년 8월 9일(수), 청도문화원 '우리문화바로알기' 회원들이 운문면 소재 공암을 찾았다. 공암 앞의 들판은 운문댐에 들어갔으나 동리는 언덕에 남아있다. 공암은 용머리 모양의 풍벽위에 자리잡은 바위굴을 말한다. 굴 속에 돌을 던져 넣으면 처음엔 낭랑한 소리가 들리다가 나중에는 소리가 없어져 끝간데를 모른다는 말이 생겼다.
얼른 보기에는 입구도 좁고 그렇게 큰 굴이 아닌 것 같아도 속에 들어 갈수록 매우 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공암에서 따와 마을 이름도 '공암'이 되었고 심지어 운문면 이전에 면 이름도 공암이 된 것이다.
요즈음 가뭄 때문에 운문댐의 저수율이 20% 정도이다. 물이 빠져 풍광은 못한 지 모르지만 집터며 들판, 도로 등 수몰되기 이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가늠할 수 있어 오히려 더 의미 있는 답사가 되었다.

공암 孔巖
나는 거기에 있어야 한다
목마른 용의 입이 된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채워야 하고 들려주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나의 업이다
사람들이 와서 이름을 붙여주고
동리 이름에 심지어 면 이름까지도
나를 내세웠다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바위에 글월을 새기고
슬며시 다가와
동의를 구한다
나의 입에 돌을 던져 넣는다
애써 낭랑하게 메아리를 만들어 주지만
지치면 대답을 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사람들은 끝 간곳을 모른다고 한다
운문댐이 생기면서 수억 년 같이 살아온 들판이
천형처럼 물바다가 되었다
괜히 서럽지만
나는 여기를 떠나지 못한다
아직 채워야 하고 전할 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행전 박영환 '공암')

공암 마을

<공암 마을 앞에 있는 거연정 - 옛날 건물이 쇠락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거연정(居然亭)
박윤제 청도 문화원장은 거연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공암리에는 거연정이 새로 지어져 있다. 거연정은 운문댐 축조(築造)과정에서 보존(保存)이 되었으면 하는 조사자의 의견도 무시당하고 방치하였다가 2000년경에 완전히 붕괴되었었다. 최근에 다시 지었지만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居然亭은 공암리 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이다. 기중윤봉한(岐仲尹鳳翰)이 지었다고 한다. 후손 윤제웅(尹濟雄)씨가 이 집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청수헌(聽水軒)은 윤봉한(尹鳳翰)선생의 호이고 그의 유고가 남아 있다고 한다.
거연정은 계곡 가에 지어진 자그마한 정자(亭子)로서 글을 읽고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별장(別莊)이다.
처음 이곳을 답사했을 때는 집이 약간의 퇴락(頹落)한 점은 있었지만 건물(建物)의 형태(形態)는 별로 파손된 것이 없었으나 두 번째 답사 때는 일부 기와 밑으로 물이 스며들어 섯가래가 섞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청도군청 문화재과에 보고도 하였으나 무의미하였고 세 번째 답사에는 완전히 무너져서 목재를 한곳에 모아두었으나 사용하지 못하고 버려졌다.
처음에는 현판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나 인근의 주민들이 가지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새로 지었지만 옛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새로 지은 집은, 집의 구조(構造)도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거주할 수 없도록 지어졌고 마당에 있었던 글이 새겨진 돌들도 일부 없어지고 지당(池塘)도 옛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집 뒤의 바위에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글과 개울 바닥에 새겨진 글은 그대로 있는데 관심을 가지고 찾지 않으면 알아 볼 수도 없거니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공암 마을 근처에도 '활수원' 등 바위에 새겨진 글귀들이 있다



산고 수장

청도문화 연구회 회원들이 박윤제 문화원장의 설명을 들었다. 종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 만큼 청도의 문화 탐방에 관심이 높아진 증거이다. 다음은 박원장이 설명한 내용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은둔처 공암풍벽
(여름과 가을에 이름이 달라지는 공암풍벽)

<공암풍벽>


<2장의 사진은 2020년 10월 31일 다시 찾아 올린 사진입니다.>
공암(孔巖)은 용이 물을 찾아 물가로 내려와 물을 마시는 형국의 큰 암산 용의 머리 부분에 사람이 하나 들어갈 만큼의 큰 구멍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때로는 공암(孔巖)대신에 두암(竇巖)이라고도 한다. 옛날에 이 고개를 넘는 행인들이 구멍에 돌을 던져 넣으면 처음에는 돌 굴러가는 소리가 낭낭(朗朗)하게 나다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서 끝 간 곳을 모른다고들 하는데 이는 각종 지리지에 빠지지 않고 기술된 얘기다.


<박윤제 문화원장이 공암 앞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는 청려로를 따라 경주로 가는 맨 마지막에 있는 동네이다. 이곳은 윤필용 장군과 박대성 화백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구한말에는 이위면(二位面)의 한 마을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용암(龍巖:용바우. 용방) 공암(孔巖). 중리(中里). 상리(上里). 하신기(下新基). 하동경(下東京).을 합해서 공암동이라 하고 운문면에 편입하였다.
자연환경을 살펴보면 공암의 옛 터전인 공암동은 현재 수몰이 되어서 물이빠지면 들어가 옛 자취를 엿볼 수 있으나 만수위가 되면 그 흔적도 찾을 수없다. 용의 모습을 한 공암은 구룡산에서 내리 달리는 듯한 용이 물을 마시기 위해서 개울에 달려와 물을 마시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갈룡음수(渴龍飮水)의 형국을 하고 있다.
용바위를 감싸고 있는 듯한 산의 모습은 산내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공암바위 앞에서 감돌아 나가는 곳에 있어 마치 어미가 새끼를 품고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물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달라 보이기 때문에 꼭 꼬집어 “이것이다.” 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암(孔巖)풍벽(楓碧)에서 북동으로 바라보면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그 끝자락 양옆에 마을이 매달려 있는 듯하다.

<수몰되기 전 들판, 가운데 흰 점이 있는 부분이 주막터라고 한다>
왼쪽에 골짜기 자락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은 공암리이고 오른쪽 산 언저리에 있는 마을은 동경(東京)이 된다. 거리는 공암리가 가깝고 동경이 멀리 떨어져 있다. 처음 운문 댐을 축조하고는 이 일대가 수몰이 되었는데. 어느 해인가 운문 댐의 둑에 물이 샌다고 난리가 난적이 있다. 이때 물 넘이 막을 2m 이상 낮추었기에 현재는 물이 담기지 않는 부분이다. 이 들 은 지금은 휴경지가 되었는데 중간쯤에 왼쪽 부분에 큰 바위가 하나 있다. 바위에 몇 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바로 학가대(學稼臺)이다.

수몰이 되기 전에는 상리와 중리, 용방, 작은용방,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상리에만 주민이 살고 있고 용방과 작은 용방 등의 마을은 모두 수몰이 된 상태이다. 용방은 산의 끝머리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용바우라고 했다고 하는데 줄여서 용방이라고 했다고 한다. 개천 건너에 10여가구가 살았는데 이곳은 작은 용방이다.

<옛 들판>
현재 공암마을은 농경지가 없고 대부분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농가가 많다. 중리 부근에는 고인돌 7기가 있었다. 원래10여기가 있었는데 과수원을 만들 때 3기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회원들이 산길을 올라가다>


바위 사잇길도 지나고

<더 이상 가지 못한다. 반환점이다>
옛날 서지 마을에 서지역이 있었다. 그리고 서지에서 공암을 거쳐 경주로 가려면 신작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바위산 중허리를 넘어서 다녔다. 해서 바위산 사이로 난 길이라 해서 암도(巖道)라 불렀다. 여름엔 바위 아래 흐르는 물에 푸른 나뭇잎과 하늘이 비치여 '공암창벽'이라 했고 가을엔 주변의 나무들이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 공암풍벽(孔巖楓壁)이라 했다. 이곳은 청도의 팔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고 있다.

공암풍벽 앞에 옛날 버스길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마을 앞 경주로 가는 신작로는 다리며 길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지금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

공암 풍벽 아래로 흐르는 개울

회원들이 물이 빠진 운문댐을 바라보고 있다.

공암으로 가는 길은 데크가 잘 설비되어 있다


운문댐이 생기기 전에는 바위 앞에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 공암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이고 또 18세기에는 도자기를 만들었던 가마가 있었으며 청도에서 경주로 가는 버스 정류장도 있었다.
앞서 얘기한 바위길 벼랑위에는 시문이 각자되어 있으나 정확하게 판독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된다. 주변에 풍호대(風呼臺)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고 또 곡천대(曲川臺)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옛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풍호대>
곡천대(曲川臺)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선생이 지은 정자이고 건너편에는 경재(敬齋) 곽순(郭珣)선생의 장구지소인 사간정(司諫亭)이 있었다. 사간정은 근세까지 유지되고 있었지만 운문댐 축조당시 맏종부가 팔아서 다른 곳으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건너편에 그 유허비가 남아 있다.



부앙대

박 원장이 풍호대에 새긴 글을 종이에 옮기고 있다


<부앙대>
군수(郡守)유진(柳袗=서애(西厓)유성룡(柳成龍)의아들)이 청도군수로 (1627.2)에 부임해 왔다가 그해 12월에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이중경선생을 찾아와서 한 말이 "제가 지금에서야 비록 혼자 있을 때 에도 불선(不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선(不善)= 중용의 신독(愼獨)에 나오는 구절) 제가 어느 날 공암에서 사운시를 한수 얻어 계곡 가장깊은 곳 흰바위위에다 새기고는 이곳에 이르러 볼 사람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직강 이지영이 그곳에 도달해서 나의 시를 보았다고 하니 저의 마음이 부끄럽더군요.“ 하고는
“뭇 새들이 높이 날다 때때로 등을 드러내고 뭇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서 모두 고개를 숙이네” 하고 시를 지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시(詩)가 분명 이 부근(附近)의 바위에 새겨져 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찾을 길이 없다.

<모성암>
얼마 전 위덕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부근을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모성암(慕聖巖)이라는 글을 판독하고 아래와 같이 해석을 했다.
앙지미고(仰之彌高) 전지미견(鐫之彌堅)
출류발췌(出類拔萃) 불계보천(不階補天)
聖上二十八年 戊子四月日篆
時人兪致龍 石工金奉大
우러러 보니 더욱 높고 뚫으려 하면 더욱견고하네
무리중에서 우뚝빼어났으니 사다리 없이도 하늘을 채웠네
라고 해석을 하였다.
발견이라고 했으나 사실 이곳은 청도향토사학회에서 이미 10여년 전에 답사하고 판독을 했던 곳이다.
이 부근에는 백운정(白雲亭)이라는 정자도 있었다고 하나 그 위치가 정확지않다.

참석자들이 한 자리에서

자, 식사합시다


멀리서 바라본 영호재

공암 마을 앞에 있는 영호재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707-3에 소재하는 초계 변씨 종사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 팔작지붕 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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