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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2017년 1월 4일(수),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를 찾았다. 오산리는 비교적 자주 찾는 곳이다.

 

현풍 곽씨 열녀각

 

 

오산리 열녀각(烈女閣)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410-1에 위치한다. 윤성병원에서 용천사로 가는 지방도변에 있다.

1842년 조말남(曺末男)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현풍 곽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원래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었으나, 최근에 지붕을 강판 기와로 바꾸었다. 둘레에 토석 담장을 설치하였다. 비각의 양 측면과 배면에는 벽체를 설치하였고 전면에는 살창을 세워 내부의 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비각의 중앙에는 열부 조씨 기적비(烈婦曺氏紀蹟碑)’라 음각한 석비가 세워져 있다.

 

 

 

 

 

 

삼우재(三友齋)

 

청도군 각북면 오산2 994-1번지에 소재한다. 각북에서 헐티재로 넘어 가는 지방도로 변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남향이다.

1860년에 지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했고 2016년에도 기와를 번와했다. 동향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재사(온돌방 2칸 마루 2, 중당 협실형)가 있다. 좌측 방에 벽장을 달아내었으며 두리기둥에 툇마루가 있다. ‘오산재기가 마루에 걸려있고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배향 인물은 현풍인 곽수병(郭守洴), 수찬(守澯), 수정(守禎) 삼형제이다.  

 

 

 

 

 

 

 

 

 

 

 

 

용천사 동하도로 수치 송공 표석(湧泉寺 洞下道路 修治 頌功 表石)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783-2에 소재하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9(2006 3월 지정)이다. 조선 후기 표석이며 용천사 앞 마을을 지나 1 킬로미터 지점 오산 주유소 앞 도로변에 놓여 있다.

용천사 동하도로 수치 송공 표석은 각북면 오산리 용천사 아래 길이 험난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다니기 어렵자 용천사 승통 행준(僧統 幸俊)이 재산을 털어 승려 순기(順基), 순식(順式), 재찰(在察), 재원(在元)으로 하여금 길을 새로 수리하게 하였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이 공적을 칭송하고 표시하기 위하여 1725(영조 1) 3월에 순해가 글씨를 쓴 비석을 건립하였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호패 형태로 비문이 있는 면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나머지 면은 대강 다듬어 형태만 갖추었다. 비문은 13 150여 자가 해서체로 각자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200, 너비 97, 두께 45이다. 원래는 표석만 세워져 있었으나 근래 맞배 와가를 지어 보호하고 있다

 

 

 

 

 

 

 

 

 

오산교회(梧山敎會)

 

청도군 각북면 오산1 50 번지에 소재한다. 동리 가운데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1906 6월에 풍각제일 교회에서 분리하여 설립된 111년의 전통을 가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소속의 교회이다.

1993년에 지은 본당과 부속건물, 사택등이 있다. 1960년대 동리 옆 지방도로 왼편에 있을 때는 교회 부설 성경중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주간반에 이어 야간반까지도 운영하여 당시 정규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이 되었다.

현재도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데 대구 동산 기독 병원 의료 선교 팀을 초청하여 지역 사회 주민들의 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동민들을 초청하여 선교의 씨를 뿌리기도 하며, 교회 안의 주일 학교, 학생회, 청년회, 여전도회 등이 합력하여 지역 사회 복음화를 위하여 일치단결하고 있다. 오산 교회에서는 청도 기독교 연합회를 후원하고 경상남도 산청에 있는 오부 교회를 후원하고 있다. 대지는 1,157 이며 신도는 40여 명이다.

 

 

 

 

 

 

 

 

 

 

 

 

용천사(湧泉寺)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1062번지에 있다.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용천사는 신라 문무왕 10(670) 의상대사가 창건한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 화엄 십찰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인데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절 이름이 나온다 이미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 3중창(1631) 때의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것이다. 고려 원종 8(1267) 일연 선사가 중창하여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인조 9(1631) 조영대사(租英大師) 3중창하였으며 순조 5(1805) 의열 화주가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유물로서는 법당의 삼존불, 후불탱화, 나한십육존불, 영탱, 석조물 등이 있으며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로대가 남아있고 요사채 뒤로 난 오솔길을 잠시 걸어가면 고승들의 부도(浮屠) 6기가 있어 이 절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湧泉)이라 부쳐진 것이라고 전한다 이 용천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얼어붙지 않는다. 1300년 전에도 흐르던 이 샘물은 지금도 여전히 중생들의 감로수가 되어 마른 목을 축여주고 있다.

주요건물은 마당에서 바라보았을 때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응진전, 우측에는 목암(일연스님의 호를 땄으며 주지스님이 거처함)이 있고 그 아래에 동쪽에는 명부전, 서쪽에는 화엄전(의상대사의 창건을 기린 건물)있으며 종각 그리고 조금 뒤편 언덕에 산신각이 있다. 근래에 고려 삼층석탑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 용천사 사진 중에는 사월 초파일 전후 찍은 사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산리(梧山里)

 

 

  비슬산 깊숙이 위치한 각북면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오산천이 흐르고  혈티령 중턱에 위치하는데 반공유인가(半空有人家)의 표현이 절로 실감이 나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헐티재 도로가 개설되면서 음식점 등 상가나 전원주택이 형성되고 요양병원도 3곳이나 들어서게 되어 동리 모습이 완전 일신되었다.

. 이 마을로 가는 길옆에 200여년 전에 세워진 용천사(湧泉寺)의 길을 닦는데 공이 많은 분들의 공덕비문이 있다. 여기에 용천사까지의 길을 촉도(蜀道)의 험난함에 비유하는 바 이 길은 바위투성이의 길이라 하였다.

 

 청도포럼에 의하면 고산(高山)리에는 진주인 유창근 공이 1300년경에 입주했다는 설과 고씨 3가구가 먼저 입주했다는 두 설이 있다. 오이리(梧耳里) 1500년경에 현풍인 곽계철 공이 현풍에서 이거했다는 것이다. 산촌중에서 산촌인데도 상당히 오래 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 같다. 이는 비슬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흘러 식수와 농사 용수가 풍부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좋았고 또 하나는 고찰 용천사의 사전(寺田)을 소작할 수 있는 것도 원인이다.

  삼천리(三泉里)(삼청리-三淸里)에는 철성 이씨가 약100여년 뒤에 (오이동 보다) 입주했다는 것이다. 경주 김씨도 같은 해라한다. 오산리는 오이(梧耳), 고산(高山), 삼청(三淸), 비지리(飛地里)가 합쳐져서 이룩된 동네 이름이다.

 

 

 고산(高山), 고미(高尾), 귀미란 마을이 있는데 고미는 높은 산등성이가 마을까지 뻗어 내린 꼬리 부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요, 귀미는 마을 주변의 지형이 거북이와 비슷하고 마을이 거북이 꼬리 부분에 형성되었다고 붙여졌다고 한다. 

 삼청(三淸), 삼천(三泉), 마을은  동, , 남에 3개의 샘이 있다고 삼천(三泉) 또는 세곳에 물이 하도 맑다고 삼청(三淸)이라 부른다오리(梧里), 오이(梧耳)는 옛날부터 오동나무가 많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