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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의 율강서원과 동강재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의 율강서원과 동강재/ 행전  박영환

 

  2017 1 3,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에 소재하는 율강서원과 동강재를 찾았다. 이곳은 풍각에서 각북으로 올라가는 대로 옆에 있기에 자주 지나다니던 곳이다. 그러나 직접 찾은 것은 이 번이 처음이다. 늘 한 번 찾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숙제가 풀리는 기분이다.

  오늘 찾은 율강서원과 동강재는 삼평리 율정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의흥예씨와 성주도씨의 서원과 재사이다. 마침 율정마을에 살고 있는 예종활씨가 당신의 선대를 모시는 율강서원 뿐만아니라 동강재까지도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어 고마웠다.

 

*다시 2018년 5월2일(수, 음 2월17) 향사 시 종헌관으로 참여하여 향사 장면을 담아 올렸습니다. 

 

 

 

 

 

 

율강서원 전경

 

 

 

 

 

 

 

다음은 2018 戊戌  217( 52) 향사 장면입니다

 

 

 

초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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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복

 

분축

 

 

 

율강서원(栗岡書院)

 

 

 관리문중 : 의흥(義興)예씨 훈련원판관공파(訓練院判官公派)

 

 소재지 :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 546-1번지

 

 건물구조 :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 대문(출입문과 고방2)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 정면 3, 측면 1칸의 팔작 기와집인 강당(온돌방 2, 마루 1)이 있다.

경석재기’, ‘상충사 부설 상량문’, ‘경석재 팔경운’, ‘경석재서 등이 걸려 있다.

  강당 위의 경사진 대지 위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인 상충사(尙忠祠)가 별도의 토석담장 속에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서는 내삼문을 세웠으며 수절문(守節門)이라 현액했다.

서재(西齋)인 경석재는 방이 3칸이다. 마당에 독석암 예선생 포상비’, 상충사 묘정비가 있으며 시멘트 석축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

독석암(獨石庵) 예인상(芮仁祥,1562 ~ 1633)

  본관은 의흥(義興)이며 자는 홍달(洪達), 호는 독석암이다.

독석암은 고려 문하찬성사(正二品)를 역임하고 부계군(缶溪君)으로 봉군된 예낙전(芮樂全)의 후손으로 1585(선조18)년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 벼슬에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맞게 되어 선조가 몽진(蒙塵)하여 서행(西行)할 때 호종하게 되었다. 이때 다른 신하들은 험악한 백성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였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전란 내내 어가(御駕) 호위에 만전을 기하며 7년 동안 충성을 다했다.

종전(終戰)이 되자 선조가 그를 직접 불러 노고를 치하한 후 어모장군 훈련원판관(禦侮將軍 訓鍊院判官)에 제수하고 선무원종 공신(宣武原從 功臣) 2등훈에 책록했다.

  선무 원종 공신록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력(萬曆) 33(명 신종의 연호) 4 16일에 행 도승지 신() 신흠()이 공경히 받들은 전지(傳旨)에 나라에 어려움이 많아 평정되지 못하였는데 너희가 이미 중흥(重興)에 힘을 썼으나 공훈을 밝힐 수 없어서 보수(報酬)를 못하니 내가 이에 원종공신(原從功臣) 으로 은혜를 미루어 주어 신전(新典)을 들어 구장(舊章)을 준행하노라.

  생각하건대 남쪽 도적이 육지를 침략하였을 때 서쪽 땅으로 파천하였도다.

표범과 호랑이 같은 도적이 종행하여 종묘사직이 몽진(蒙塵)하는 것을 참담하게 보았고 산과 내를 넘고 건넜으니 군신(君臣)이 중노(中露)한 고통을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하늘이 당나라를 일으키고자 하여 부로(父老)가 몸을 도와주었고 사람은 진()나라를 받들기 위하여 크고 작은 신하들이 몸을 잊었도다.

  다행히 난리를 평정하고 대궐로 돌아와 드디어 공훈을 책봉하고 이름을 정종(鼎鍾)에 새기도다.

오직 너희들 시골의 사대부(士大夫) 및 사서인(士庶人)은 혹 나의 무열(武烈)을 날리고 혹 나의 군수(軍需)를 도왔으며 창을 잡고 달리어 혹 몸을 바치는 장사도 있었고 병사를 끌고 전벌(戰伐)을 하여 혹 수급(首級)을 바치는 종사도 있었으니 다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리라.

  오직 일시(一時)의 공로를 신중하게 분간하여 너의 아들과 너의 손자로 하여금 만세의 안락을 누리게 하리라.

  그런고로 이에 호종공신(扈從功臣) 주부(主簿) 예인상(芮仁祥)에게 교시(敎示)하노라.”

예인상은 1626(인조 4)에 직에서 물러나 율리(栗里)의 산수 간에 돌아와 스스로 독석암(獨石庵)이라 부르며 세상일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경석재 기문에 박재시(朴在時) 여기 암자 하나를 짓고 인중방에 독석(獨石)이라고 이름을 걸어 임천(林泉)에 넉넉히 놀다가 홀로 늙어 세상을 마쳤으니 그 지조를 지키어 속세를 떠난 표치는 백세를 가도 갈리지 아니하였다.”라고 했다.

 

 연혁 : 마을 지방도 옆 산기슭에 남향으로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1914년 경석재(景石齋)로 출발하였으나 1992년 유림들의 공의에 의해 율강서원으로 승호 되었다.

 

 

 

 

 

 

 

 

 

 

 

 

 

 

 

 

 

 

 

 

 

 

 

 

다음은 동강재 편입니다.

 

 

 

 

동강재(東岡齋)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율정마을) 534번지에 있다풍각에서 헐티재로 가는 지방도 옆 산언덕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20년에 처음 지었으며 그 뒤에 새로 중건하고 여러 차례 중수했다.

서향 대문(출입문부엌1, 화장실1)을 들어서면 3단 석축 위에 정면4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두리기둥 재사(마루2, 온돌방2, 중당협실형)가 있다툇마루 앞에 재사보호를 위해 유리창문을 설치했다둘레는 시멘트 석축담장이다.

 

  성주인 도진방(都鎭邦), 도정열(都廷列), 도정윤(都廷潤)의 재사이다도진방 은 도취애의 8세손이며 도정열도정윤은 9세손이다.

 

 

 

 

 

 

 

 

삼평리(三坪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집필: 박윤제) 소개된 삼평리는 다음과 같다.

 

[개설]

  1990년까지 각북면의 중심지로서 면사무소를 비롯한 주요 행정 기관이 소재하였으며, 청도군 일대에서는 사과나무 선진 재배지로 알려져 있다.

 

 

[명칭 유래]

  1914년 방지동, 풍산동, 율정동 등 세 마을을 병합하여 삼평동이라 하였다. 방지라는 이름은 마을 바로 앞에 못[저수지]이 있어서 방지라고 한다. 1990년까지 각북면사무소가 위치하면서 각북면의 중심지였다. 율정(栗亭)은 옛날 이 마을로 해서 대구를 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그때 큰 밤나무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율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풍산(豊山)은 신라 시대 와 고려 시대에 풍각 고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진읍촌이라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대구군 각북면의 지역이었으며 1906(광무 10)에 청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방지동, 풍산동, 율정동 일부를 병합하여 삼평동이라 하였다. 1988년 삼평동에서 삼평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중에 부사 이방좌(李邦佐)와 박경신(朴慶新), 이영(李英)이 머물렀다고 한다.

 

[자연 환경]

  각북면의 중심쯤에 해당하는 삼평리는 청도천 동쪽과 서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은 남북으로 트여 있고 동서는 산으로 막혀 있다. 예전에는 78월 장마철이면 한두 번씩은 청도천이 범람하였으나, 지금은 제방을 튼튼히 하여 범람이 없다. 들은 경지 정리를 하였으며, 사과나무 재배를 일찍부터 하였던 곳이다.

 

[현황]

  2012 7월 현재 면적은 5.42이며,  139가구에 281[남자 136, 여자 145]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이서면 칠엽리·각북면 우산리, 서쪽은 풍각면 성곡리, 남쪽은 풍각면 현리리, 북쪽은 각북면 남산리·덕촌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삼평 1리와 삼평 2리가 있으며, 청도천을 끼고 동쪽에는 율정과 방지가 있고 서쪽에 풍산 마을이 있다. 방지(防池) 1980년대까지 면사무소와 각북 지서가 있었던 곳이다.

  농경지는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며, 2모작으로 양파를 많이 재배한다. 마을 서쪽에는 사과밭이 있어 맛있는 사과로 정평이 나 있다. 삼평리 중앙을 남동북서 방향으로 지방도 902호선이 지나고 있다.

   청도천변에는 풍산 유료 낚시터가 있고, 삼평동 마을 뒤편 동북쪽에는 의흥 예씨 예인상(芮仁祥)을 배향한 율강 서원(栗岡書院)이 있다. 풍산 마을 진읍 동남쪽 산기슭에 사미정이 있었다. 사미정은 밀양 손씨 중 누군가 무과에 급제하여 지은 것으로 3 3일에 신은(新恩)을 축하하는 연회를 여기에서 베풀었는데, 그날 선비들이 이 정자의 이름을 사미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편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높고 묵중한 비슬산봉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동쪽에서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각북천을 두고 2() 1()이 서로 질세라 남으로 달려 골 안의 들 가운데 산비탈에 취락이 형성된 마을이다.

  율정(栗亭)에는 화전등(花田嶝), 질미산(侄眉山), 계봉산(鷄峰山), 사미정산(四美亭山) 등이 높게 낮게 솟아 있고 맞은편의 황새봉이 사람 모양으로 솟아 있다. 두 내룡(來龍) 마치 살아 있는 용처럼 약동하면서 내닫고 있는 것 같다.

  미증유의 대혼란을 야기한 임란의 암운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1580년경에 남평인 문장형(文章亨) 공이 입촌하여 동리의 융성에 전력하였다는 것이다. 율정에는 임란이 끝난 후인 1626년경에 의흥인 예인상 공이 입주하고 후손의 번창을 위하여 마을의 기초를 다지는데 최선을 다하여 인(), ()를 수범하면서 동풍진작(同風振作)에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1리인 방지(芳旨)란 동명은 마을 앞의 숲이 둥글고 꽃모양 같이 아름답다고 붙여진 동명이라는 설과 아름다운 반송(盤松)이 있어서 붙여졌다는 설인데 여기에서 동명의 대상이 된 "숲과 반송"은 동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율정(栗亭)은 동과 서에 율곡산(栗谷山)과 노인봉(老人峰)이 주변의 경관을 한층 증폭시켜주고 하천변(河川邊)에는 많은 밤나무가 잘 가꾸어지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풍산(豊山)은 가락국 풍산현청(豊山縣廳)이 있던 자리라는 설이 있으나 연대적으로나 각종 지리지의 기재 사항을 구명해 보아도 너무나 차이가 있어 믿을 수가 없다. 토지가 비옥하여 풍년이 든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인데 재고의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풍수지리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믿어진다. 구명해볼 과제로 남겨둠이 못내 아쉽다. 풍각, 풍산 일련의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1리 총 61호 중 밀양 박씨 11, 안동 손씨 8, 김해 김씨 7, 기타 35

*2리 총 91호 중 의흥 예씨 16, 동래 정씨 10, 성주 도씨 5, 기타 60

당산등의 동제는 엄숙하기로 다른 동리에 앞선다는데 유풍(遺風)이다.

 

 

참고 자료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청도군지(1991, 청도군청)

-선무원종 공신록

-역주 오산지(2003, 청도문화원)

-도주지(1958, 김석봉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서원이야기, 박성진

-청도문헌자료집(2003, 청도문화원 향토사학회)

-문중 세보 및 문중 후손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