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면 천주교 대구대교구 용성성당 구룡공소
2017년 6월 28일(수), 청도문화원 '우리문화바로알기' 회원들이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청도군 운문면 구룡마을길 361-5)에 소재하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용성성당 구룡공소를 찾았다.

자귀꽃 사이로 보이는 구룡공소 전경


구룡공소
행전 박영환
당신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두 손 모아 다짐하는 그 한 마디
“나의 천주님”
어둠이 훑고 가는
구룡사 둥근 기둥 앞에 섰을 때
거센 돌풍과 폭설이 몰아쳤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다는 말에
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이곳에 천주를 모십시오
“넷!”
“나무관세음보살”
스님은 훨훨 이웃 수암사로 떠났다
구룡사가 구룡공소로 바뀌는 순간이다
모두 지우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길
자비가 사랑이고 사랑이 자비이다
그 후 200년,
짚신에 피멍이 들던 나날, 싸리 광주리에 가득 찬 상처
허공이 이빨을 드러낼 때마다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나자고 서로는
서로의 언 손을 녹여주며
성에꽃 에워싼 십자가를 붙들고 울었다
참 어렵게 자귀나무 위에 두 줄의 성호를 걸었다
“우리의 천주님”
오늘도 직립의 종소리를 안고
종탑은 사무치는 함성을 숨기지 않는다.

회원들이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그날 박 원장이 연수한 내용을 옮겨놓은 것입니다.
천주교박해와 신자들의 힘든생활
천주공교회성당인 구룡공소는 아주옛날 구룡사(九龍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온다.
이곳 구룡사에 살던 스님들은 하나둘씩 몰래 숨어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이 의지할 곳 없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닐 때 천주교 신자들에게 절을 물려주고 승려들은 이웃의 수암사로 이사를 하여 모두 공생할 수 있었다고 수암사(水巖寺)쪽에서는 전하기도 한다.
이곳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천주교 신자들이세상의 눈을 피해 살기가 이곳만 한 곳이 없었다. 청도와 경산 그리고 영천의 행정구역이 구룡산을 두고 경계를 지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관가에서 거리가 멀고 험하기 때문에 관원들이 목숨을 담보로 순라(巡邏)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무용담을 들어보면 이곳에서 살았던 당시의 신자들은 짚신이나 싸리로 만든 물건들을 영천장이나 경주장에 내다 팔기도 하며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염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이곳에 살기가 좋았던 천주교 신자들은 관가(官家)의 눈을 피하는 방법으로는 청도의 관원들이 수색을 하러오면 영천 쪽으로 넘어가거나 경산방면으로 달아나고 영천이나 경산에서 들이닥친 관원들을 피해 청도 쪽으로 달아나 이들의 눈을 피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옛 구룡사는 1천 여명의 승려가 살았던 큰 사찰 이였으며, 그때 1천명의 승려들이 먹기 위해서 세워진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물방골과 물방골 언덕위에는 사납골 또는 사납전이라고 하니 옛날 구룡사가 있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언제 까지 절이 유지되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오로지 『불교사전』과『사찰사료집』에서만 찾을 수 있으니 사료(史料)라고는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을 아닐 것이다.
구룡사가 있었던 자리에는 찬물 샘이 있는데 물이 차고 수량이 풍부하며 비가 오나 가뭄이 들어도 변하지 않는 아주 오래된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소의 뒷밭 부분이 그 자리이니 공소가 옛 절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구룡사에 대한 전설은 여기저기에 전해오는데 조선조 말기에 천민중의 천민이었던 승려들도 자기들의 신세나 박해를 받으며 관가의 눈을 피해 다니는 천주교 신자들의 고통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인정(人情)으로 절간에서 받아들여 주고 피신장소가 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승려들은 구룡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수암사로 옮겨가 살았다고도 전한다.
옛 기록인 각종지리지에는 청도의 산맥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백두대간룡이 단석산(斷石山)에 머물렀다가 서쪽으로 꾸불꾸불 높이 솟았다가 낮아지고 하면서 구룡산에서 정기를 모아 한 갈래는 영천을 거쳐 팔공산을 이루고 다른 한 갈래는 대왕산을 거쳐 선의산을 지나 용각산에서 다시 힘을 받아 삼성산을 따라 비슬산과 화악산을 이룬다고 했으니 구룡산이 이들 산맥이 나눠지는 분기점이 되는 곳이라 적고 있다. 이곳 구룡산은 동쪽과 북쪽은 영천시 북안면이 차지하고 남서쪽은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와 마일리가 되며 서북쪽은 경산시 용성면 이 된다.
현재의 가구수는 11가구가 있으나 거주하는 사람은 4가구에 7명이 살고 있다. 마을을 둘러보면 거의 빈 마을처럼 보이는 것은 삶의 터전을 따라 대도시로, 대도시로 떠났던 가족들이 주말이면 식구들을 데리고 왔다가는 사람들이 집을 비워놓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날부터 이곳은 신선한 지역으로 여겨 조선 시대와 현∙근대까지 가뭄이 들면 영천군수가 친히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무지터가 남아 있어 구룡산을 신성시 하는 것이다.
구룡이라는 말은 물이 흔하다는 말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에 구룡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이 여러 곳 있는데 대부분이 물이 흔한 곳이다.
예를 들면 해가 바뀌어 책력을 받아보면 구룡지수라는 머리말을 보면서 어른들은 올해는 비가 잦겠구나 하고 말을 한다. 그리고 1룡이나 2룡이 되면 물이 귀하다는 말을 하며 용은 물과 연관된 이야기를 맺고 있다.
그 옛날 구룡사가 있었던 시절에는 사원(寺院)의 역할보다는 군사적인 요소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천여명의 승려가 살았다는 곳은 대부분 군사들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곳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더 쉬울 것 같다.
현재의 이 마을은 약 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으로 천주교가 인정되기 이전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하기보다는 종교를 위해 마지못해 살았던 곳이라 여겨진다. 양반의 자제라 해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고 또 다른 지역의 좋은 혼사(婚事)자리가 있어도 혼인을 마음대로 할 형편도 될 수 없었으며 관으로부터 보호를 받기는커녕 관을 피해 살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얼마나 사는게 팍팍했을까 싶은데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신앙으로 무장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불편을 감내하고 살았다고 한다.
한편 이곳이 명당이라고 말하는 풍수들은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높은 곳에 전답은 물이 마르지 않는 천수답이 있고 사질토이면서도 물이 잘 빠지지 않기 때문에 농사도 잘된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어떤 연유에서든 난리를 거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명당중의 명당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공소(公所)라는 곳은 공소(空巢)와 같은 뜻으로 풀이해 봤다.
물론 공소(公所)에는 신부(神父)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고 대신에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첨례를 보거나 공소 예절이 행해지며, 정기적인 신부(神父)의 방문을 통해서 성사가 집행되는 곳이다. 처음 이곳은 성당으로 출발하였는데 언제부터 인가 신부님도 수녀님도 없는 공소로 격하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기록상 주민이 가장 많이 살았던 시기는 천주교가 인정되고 난 다음부터 이다.
당시에 사람이 많이 살았을 때에는 땅을 사고자하는 사람은 있어도 땅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공시지가(公示地價)가 경산의 사동이나 계양동 보다 더 높고 비싼 값에 거래되었을 정도이다. 당시에는 천주교 신자들만이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태어나 여기에 살고 있는 3대째 천주교 신자인 최재환 씨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다.
약175년전 프랑스 신부인 샤스땅 신부님이 방문차 이곳을 다녀 갔는데 샤스땅 신부님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고 그 일기에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구룡성당이 있으며 당시에 구룡성당에는 경주 내남면의 신자들과 대구 무태동에 사는 신자들도 이곳 구룡성당에 와서 판공성사를 봤다고 하였으며 당시에는 하양성당에 계시는 서씨(徐氏)성을 가진 신부님이 이곳을 관리한다고 하였다고 전한다.

1921년 성당으로 추성되었을 때 이곳에서 판공성사를 한 사람들이 103명이 되었다고 하니 지금 시골 여느 마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생각한다면서 당시에는 3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처음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 이곳으로 들어왔고 혹여 관가에 고변이 있을까 하여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마을사람들끼리만 혼인을 하였고 마을사람들은 모두가 친인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 마을에는 이씨(李氏)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최씨(崔氏)였으며 그 다음으로 많은 성씨가 박씨(朴氏)였다고 술회 한다. 지금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신부님 앞에서 천주님을 신봉할 것을 약속하고 혼인을 하여 살 수 있다고 하며 구룡공소를 찾으면 종탑은 길 위에 있고 “천주교공교회성당”이라는 현판 글씨가 대문위에 걸려있어 성당임을 알려주고 있으나 본당의 문을 항상 잠겨있고 방문객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빈집만 돌아보고 되 돌아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월 일요일 하루는 용성성당에서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올리고 간다고 한다.
정리를 하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중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 정착지는 옛날 구룡사라는 절터였으며 이미 개간을 하여 논 밭으로 사용하였던 터에 살았다. 점차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경제적인 기반을 위해 생활필수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혹여 관가의 고변이 있을까 저어하여 혼사도 마을 내에서만 이루어 졌다. 그런 까닭으로 마을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경제개발이 되면서 생업의 터전으로 모두 대도시로 나가고 현재 서너 집이 살고 있다.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는 왜 박해를 받았나?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중국에서 천주교를 접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받아 들여서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전도는 선교사들이나 포교사들이 먼저 들어와서 신앙의 씨를 뿌리고 점차적으로 확대해 가지만 우리나라에는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국의 선교자의 역할 없이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들 한다. 몇몇의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왔고 성장해 갔다는 것이 다른 지역과 다르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의 유포에 대해서 정부는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으나 점차 천주교 교세가 확장되자 정부는 천주교가 전통의 제사 의식을 무시하고 신분 질서도 위협되고 있음에 주목하여 조선사회의 기본질서를 부인하는 천주교를 양반중심의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지령을 내렸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는 우상숭배금지에 대해서 이다.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에서 부터이다. 유대교에서는 우상숭배를 철저히 금지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우상숭배금지에 대해서 말을 하였다는 성서의 구절은 없다고 한다.
예수님이 믿은 종교가 유대교여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우상숭배를 금지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집집마다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예의를 표해왔다. 그리고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에게 절을 했다. 이 전통이 조선시대 당시의 천주교를 관리하는 바티칸에서는 우상숭배로 보여서 위패를 모시고 제사 때 조상에게 절을 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즉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유교의 신분제도거부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적으로 비쳐졌고 정치적으로는 파당의 싸움에서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던 남인들을 내 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순조조의 신유박해 때 노론파에 의해 대대적인 정치박해가 가해졌는데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권을 잡고 있었고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에서 신유박해 때 중국 천주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인데 내용은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과 그 대책을 흰 비단에 기입한 밀서이다.
이때 근본 건의 책은 4개의 항목으로 나뉜다. 서양제국의 동정을 얻어 성교(聖敎)즉 천주교를 받들어 나가고 백성들의 구제에 필요한 자본을 요구하였다.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였으며 조선을 청나라에 복속시키고 친왕(親王)에게 명하여 조선국을 감독케 할 것과 전쟁을 모르는 조선에 수백척의 강한 병사5~6만명으로 서양 전교대(傳敎隊)를 조직해 와서 선교사의 포교를 쉽도록 해줄 것이다.
이후에도 기해박해 헌종 때 샤스탕. 앙베르. 모오방. 등 프랑스 선교사가 순교했고 병오년 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흥선군 이하응이 독인의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사건이 터지자 쇄국을 펴고 있던 대원군이 프랑서 선교사와 8,000여명을 죽임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난 것이다. 병인년의 도굴사건이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된 것이다. 100여년에 걸쳐 일만여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하지만 실은 병인년에 도굴사건으로 해서 많은 피해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의 신부는 김대건 신부이고 처음으로 순교한 사람은 이의송의 가족이라고 한다. 100여년에 걸쳐 박해를 통해 1만 여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생겨났는데 다. 신유박해로 순교한 100여명의 순교자가 있고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박해는‘신유박해이다.’헌종5년에 상재상서(上宰上書)를 올려 “천주교를 믿는 것이 나라에 해가 됩니까? 가정에 해가 됩니까? 그 사건을 보고 행함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어떠함과 그 도(道)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일찍이 반역을 꾀 하였습니까 간음(奸淫)을 하였습니까. 살인(殺人)을 하였습니까? 라며 정하상은 천주교 박해에 대해서 그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그리고 곤장과 줄 톱형과 온갖 형벌을 받다가 결국 망나니에게 죽임을 당하는 형을 받게 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순교의 비화들이 있다.


'청도가 좋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의 남강서원 및 여러 재실 (1) | 2022.12.05 |
|---|---|
|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0) | 2022.12.05 |
| 청도군 각북면 삼평리의 율강서원과 동강재 (1) | 2022.12.05 |
| 청도군 각북면 우산리 모원재 (0) | 2022.12.05 |
| 청도 풍각면 현리의 관음사, 풍영재 (1) | 2022.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