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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의 남강서원 및 여러 재실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의  남강서원 및 여러 재실 / 행전 박영환

 

2017년 1월 4일,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소재 남강서원 및 여러 재실을 찾았다. 

 

 

남강서원 전경

 

 

 

 

                 남강서원에서

 

 

                                              행전 박영환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목숨을 내어놓는 한이 있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의 실정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 중지를 극간하고

간신을 배척하다가

갑자사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오졸재 박한주 선생

광해군 때 대비 서궁 유폐 반대 상소를 올리고 나라가 백척간두 위태로울 때

의병을 일으킨 국담 박수춘 선생

 

모진 칼날이 다가와도

마른 뼈 곧게 세위 피를 토하시던 꺾이지 않는 의기

굽혀서 오래 사느니

짧아도 길게 살던 삶

 

오늘도 큰 메아리 되어 헐벗은 영혼에게

채찍으로 다가온다.

 

 

 

 

 

남강서원(南岡書院)

 

 

 관리문중: 밀성(密城) 박씨 행산공파(杏山公派)

 

 

 소재지: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525

 

 

 건물구조: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를 뒤로하고 웅장한 자태로 자리 잡고 있다.

  높은 석축담장 중앙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대문인 숭경문(崇敬門) 현액의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 강당(마루3, 온돌방 2)이 있다. 건물 보호를 위해 툇마루 앞에 유리문을 설치하였다. 양 측면에는 동재(東齋)인 경재(敬齋, 3)와 서재(西齋)인 성재(誠齋, 3)를 배치하였다. 강당 뒤의 경사진 언덕 위에 3칸 맞배지붕 사당인 양현사(兩賢祠)가 별도의 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데, 3칸 규모의 내삼문(內三門)에 절의문(節義門)을 현액하여 사당에 출입하게 하였다. 대문과 강당, 사당을 일축선상(一軸線上)에 두고 강당의 좌우에 동·서재를 둔 전학후묘형식(前學後廟形式)이다.

  이곳에는 국담의 유고집과 판각, 명고(明鼓)가 보존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 명현인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정암 조광조의 친필 서장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남강서원 복원상량문’, ‘강당 상량문’, ‘남강서원 복원기가 있다. 서원 밖 광장에 남강서원 안내’, ‘남강서원 복원 헌성비’, 게시판에는 퇴계 이황 등의 유묵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서원 우측 관리사(양옥 기와집) 앞에 모경정(慕景亭) 정자가 별도로 세워져 있어 운치가 있다.

 

 

배향인물: 오졸재(迃拙齋) 박한주(朴漢柱)와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을 봉향하고 있다.

1)오졸재 박한주(1459 ~1504)

  본관(本貫)은 밀성(密城)이며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迃拙齋)이다. 고조할아버지는 행산(杏山) 박세균(朴世均)이며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성종 14) 사마시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485(성종16, 乙巳)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전생서 직장(典牲署直長)에 제수된 뒤 한성부 참군·사헌부 감찰을 거쳐 1491년 사간원 정언에 제수된 후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1493(성종 24) 부모 봉양을 위하여 창녕 현감을 청하여 나가 백성들을 지성으로 보살피고 교화시켜 임금이 비단과 교서(敎書)로서 포상, 가자(加資)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종부시 주부를 거쳐 1497(연산군 3)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이때 연산군의 실정(失政)과 무상시로 이어지는 유연을 중지할 것을 극간하자 연산군이 크게 노하였으나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 등의 간악함을 탄핵하는 차자(箚子)[일정한 격식 없이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는 상소]를 올렸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문도로 몰려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1500(연산군 6) 전라도 낙안으로 이배되었는데 그곳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이 때 임소에서 부친상을 당해 몇 번이나 혼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5 15일 참형에 임하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향년 46세였다.

이후 1506(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중종 12) 김정(金淨조광조(趙光祖) 등의 계()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 직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풍각면 차산리에 김응조가 찬한 오졸재 박한주 여표비명(迃拙齋朴漢柱閭表碑銘)’이 세워져 있으며 밀양 예림 서원(禮林書院), 함안 덕암 서원(德巖書院), 청도의 석강 서원(石岡書院) 및 차산 서원(車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오졸재집이 있으며 밀양 5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2)국담 박수춘(1572-1652)

  본관은 밀성이며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또는 숭정처사(崇禎處士)이다. 그의 조부는 청도 밀성 박씨 행산파 입향조인 박대성이며 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 박신(朴愼)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싸웠다.

  1618(광해군 10, 戊午)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문제에 대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지어 올렸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창의(倡義) 격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和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 숭정처사로 자처했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장현광(張顯光) 등과 이기설(理氣說)을 토론하는 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도통원류록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로부터 중국의 공자(孔子), 이정(二程), 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의 도() 연원의 흐름을 정리한 글이며 동방학문연원록서는 조선조 도통의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고을의 젊은이 및 노인과 함께 계()를 모으고 백록동서원의 학규(學規)와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과조(科條)를 삼는 향약을 실시했다.

  저서로는 국담박선생문집·독서지남(讀書指南)·학문유해(學問類解)·도통연원록(道統淵源錄)·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問淵源錄)·의례견문해(疑禮見問解) 등이 있다. 1672(현종 13)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경재 

성재 

 

사당

 

사당 출입구인 내삼문

 

 

 

 

남강서원 앞에서 바라본 남강재 

 

 

남강재(南岡齋)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525에 있다. 헐티로 지방도 902호선을 따라 용천사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각북면사무소를 지나 약 650m 지점에서 좌측 남산2리로 들어가다 우측을 바라보면 남강 서원 아래 남강재가 있다.

  1860년에 건축했고 여러 차례 중수했으며 1985년도에 이어 1996년 새로 중수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솟을대문(출입문과 방1, 수납공간1)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재사(대청3, 온돌방 2)가 있다. 처마 좌우에 보조 기둥을 세웠다. 중당협실형인 대청마루에는 남강재기’, ‘남강재 중수운’, ‘제 국담헌 서’, ‘원운’, ‘차운 등의 많은 글들이 걸려 있다. 마당 우측에는 동재(2, 마루1)가 있고 좌측에는 유고집과 판간 보관 장소인 추선각(追先閣))이 있다. 마당은 자갈을 깔았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밀성인 국담 박수춘 을 배향하는 재사이다.   

 

 

 

 

 

 

 

 

밀주오현(密州五賢誌)에 실린 오졸재(迃拙齋박한주(朴漢柱) 행적(行蹟)

밀주 오현은 1)계은(溪隱) 이중(李中) 2)春亭 卞季良 3)점필재(佔畢齋) 金宗直 4) 오졸재(迃拙齋박한주(朴漢柱) 5)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이다.

 

4.박 오졸재

오졸재(迃拙齋) 박 선생은 밀양 사람이다, 휘는 한주(漢柱)요 자는 천지(天支)니 훈도(訓導)를 지낸 휘 돈인(敎仁)의 아들이다, 공은 천순(天順 : 명나라 연호) 기묘년 (1459 세조5) 정월에 밀양부 북쪽 풍각현(豊角縣) 차산마을(車山村)에서 태어나다, 아이 때부터 영오하고 씩씩하며 신중하여 다른 아이들과 친하게 놀이를 하지 않았고 예닐곱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었다, 하루는 뜰에 서서 대인(大人)이 우뚝 서서 천지를 집으로 삼는다(太人特立軒天地) 는 시구를 읊조렸는데 사람들이 다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겨우10살에 생원 고극경(高克敬)에게 수학하였는데 고극경은 공의 언어와 기상을 기이하게 여겨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가르쳤고 대하는 것이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 장성해서는 강개한 큰 뜻을 품어 옛 성현을 목표로 삼고 김굉필, 김일손과 함께 점필재 문하에 유학했다, 돈독하게 뜻을 세워 힘써 실행하고 넓게 글을 읽어 잘 기억하니 문장과 기절이 동류들보다 훨씬 뛰어남에 먼 곳 선비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이도 많았다, 당시 사람들이 일컫기를 두남(斗南)의 제일가는 분이라 하였다, 성화(成化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계모년(1483, 성종14)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을사년(1485, 성종16) 6월에 갑과(甲科) 3인으로 문과에 급제함에 품계를 뛰어넘어 전생서(典牲署)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가 12월에 한성부 참군으로 옮겼다, 홍치(弘治: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 무신년(1488, 성종19) 8월에 군자감주부에 승진되었고 9월에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가 12월에 영안도평사(永安道評事)에 임명되었다. 경술년(1490, 성종21)12월에 봉상시 주부로 들어왔고 신해년(1491, 성종22) 2월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성종은 평소 유학을 확고하게 문치(文治)에 뜻을 두었는데 공은 지신이 인정받았음을 알고 대궐에 들어가 왕을 만날 때마다 마음을 정돈하고 생각을 엄숙히 하여 마치 신명를 대하는 듯이 하여 아는 것은 아뢰지 않는 것이 없었고 말을 하면 정성을 다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일찍이 경연에 들어가자 상()이 사투리 쓰는 정언(正言)이 왔다 하니 대개 공이 성의로써 왕을 감동시켜 속된 말이라도 피하지 않았고 충성스럽고 곧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6월에 성균관 전적으로 옮기고 7월에 부모를 봉양하려고 창녕현감(昌寧縣藍)으로 나갔다, 백성을 다스리고 관리를 통솔함에 다 법도를 잘 따라 정밀하게 살펴 엄하거나 너그럽게 하여 힘써 그 도리를 다하되 제자리를 잃은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그렇게 만든 것 같이 여겨서 반드시 구제해준 뒤에야 그만두었다, 백성에게 이익 될 것이 있으면 아무리 괴로워도 꺼리지 않았고 다스리는 고을을 돌아볼 때는 심산 풍곡까지도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오직 원통한 사정을 씻어주고 남에게 은택을 끼치는데 마음을 두어 혹은 혼자 말을 타고 따르는 사람 없이 항간을 몰래 다니며 백성의 실상을 탐지하였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공은 학교를 일으키고 교화를 밝히는 데는 더욱더 부지런하여 읍중의 총명한 자제를 뽑아 그들과 더불어 성현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와 돈본선속(敦本善俗)하는 일을 강론하였다,

, 가을로 경로잔치를 열어 직접 노인들을 위로하고 겸하여 질고 (疾苦)와 상장(喪葬), 혼가(婚嫁) 등을 묻고 도와주어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의 풍속이 돈독하게 교화되어 효제·염치의 기풍이 집집마다 일어났다요역(搖後)이 있을 때면 반드시 미리 통지를 하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리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백성은 아전들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여 마을이 편안하였으며 아전과 백성들은 공을 사랑하기를 부모같이 하고 두려워하기를 귀신같이 하였다. 도내의 원통한 송사로 그 실정을 밝혀내지 못한 것은 허다히 창녕현에 모였는데, 공은 간악한 것을 적발해냄이 귀신같고 분석하여 판결함이 흐르는 물과 같았으므로 방백(方伯,관찰사)과 인근 수령들이 난처한 일이 생기면 다 찾아와 바른 방법을 물은 뒤에 처리하였다. 계축년(1493, 성종24) 10월에 치적이 제일이라 하여 특별히 명령하여 가자(加資-품계를 올려주는 것)를 하고 표창을 두 번 이나 내렸다. 공이 정사에 참여한 몇 년 만에 온갖 폐지되었던 좋은 선례가 다시 회복되었으며,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 관아를 새로 짓고 추월헌(秋月軒)이라 이름 붙였으니 대개 가을 달빛이 찬물에 비치는 뜻을 취하였다. 이때 정일두(鄭一蠹, 정여창-鄭汝昌))는 안음현감(安陰縣藍)이 되어 광풍루(光風樓)를 짓고 이용헌(李爛軒)은 의성현령(義城縣今)이 되어 문소루(聞韶樓)를 지으니 삭견이 없는 사람들은 이를 보고서 이 새집을 지은 것을 보니 세분 선생의 마음을 알겠다 하였다. 병진년(1496, 연산2) 7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임명되었고 8월에 군자감 판관에 승진하였고 12월에 사직서령(社稷署今) 겸 춘추관 기주관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497, 연산군3) 3월에 사간원 헌납이 되었는데 겸직은 전과 같았다. (헌납으로 있을 때) ()한 일을 대략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밖으로는 왜인이 변방에 침입하여 장수를 죽이고 안으로는 도성에서도 도적이 군사를 죽이니 이야말로 매우 우려되는 시기입니다.” 문소전(文昭殿) 연은전(延恩殿)과 여러 능() 및 문묘에는 한 번도 친히 제사지내지 않으면서 연회를 벌이는 것은 한 번도 정지하지 않으십니다, 인정전(仁政殿 -창덕궁(昌德宮)의 정전(正殿)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어 시끄럽고 옷자락이 너울거리니 매우 불안합니다, 또 하루는 입시하여 놀고 잔치 하는 등의 일을 간하여 태묘(太廟)에 성종을 부제(祔祭)지낸 뒤 아직 친히 제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잔치 하고 노는 일은 법도가 없어서 밤낮으로 계속 하십니다, 용봉장막(龍鳳帳幕)은 중국 사신이 왔을 때나 큰 찬치 할 적에 치는 것인데 지금 여러 날 걷지도 않고 또 후원에서 말을 달려 격구(擊毬)까지 하시니 전하께서 마음껏 놀기만을 일삼으심은 효심에 어떠하신지요?” 하니, 연산이 발끈 성을 내며 낯빛이 변하여 용봉장막이 네 장막이냐?·” 하였다.

공은 이 장막은 다 백성의 노력으로 생긴 것이니 신민(臣民)의 장막이라 해도 됩니다, 어찌 군상(君上)의 사사로운 물건이겠습니까?” 하고 물러나왔다.

이날 음식물과 사슴 가죽을 사간원에 하사했는데 사슴가죽 꼬리에 박 모에게는 주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뒷날 또 간하기를 사복제조(司僕提調) 노사신(盧思愼)이 첨정(僉正) 남혜(南憓)를 머물러두자 계()를 올리었는데 남혜는 사신의 종질입니다, 사신이 사정(私情)을 끼고 함부로 아뢰어 선왕의 옛 법을 깔아뭉개니 저는 대신들이 권세로 농간을 부리는 조짐이 이 일에서 부터 자라날까 두렵습니다, 하였고 또 차자(箚子)를 올려 임사홍(任士洪) 등의 일을 논박하였는데 마침내는 이 두 간신의 모함으로 화에 미치었다. (무오사화이다) 그 차자(箚子)를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간특하고 흉악한 자들은 걸핏하면 꼭 군주(君主)를 속이고 어진 사람을 방해하며 남을 해치고 신하로써 차마 못할 일까지 하게 되니 옛 사람은 이를 칼에 비유하고 도적에 비유 하였습니다. 두렵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홍(士洪) 등의 일은 지나간 자취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해를 미루어 보건데 신은 전하께서 이런 간사한 무리를 우대하심이 어째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무리가 뜻을 얻으면 전하의 이미 기른 조화로운 기운은 반드시 하루도 안 되어 물러갈 것이요 전하의 이미 등용한 어진 인재는 반드시 하루도 안 되어 물러갈 것이요 전하의 이미 평안한 백성은 반드시 하루도 안 되어 병들 것이며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제 위치에서 편히 있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도적과 칼날보다 심한 것이 아닙니까? 전하는 깊은 궁중에서 팔짱을 끼고 당장은 편안하게 계셔서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조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알랑거리는 요괴한 무리를 없애고 사홍 등 큰 괴수를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를 이어나감에 굳건하고 널리 복종시킬 계책이 없을 것이니 스스로는 잘된 일이라 생각 되십니까? 신은 바라건대 공의(公議)를 따라 빨리 허락을 내리시면 종사(宗社)에도 매우 다행한 일이고 백성에게도 매우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6월에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옮겼는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때 의심스러운 옥사(獄事)가 있어서 여러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였는데 공이 바로 판단해 버리니 사람마다 명감(明鑑)이라 칭하였다, 이때 군주(君主 연산군)의 마음이 날로 거칠어지고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감에 공은 함께 일할수가 없음을 알고 물러갈 뜻을 품었다. 드디어 부모를 봉양해야한다고 외직을 원해 평해군수 (乎海郡守)가 되었다가 또 고을이 멀리 있고 부모가 연로하다 하여 다시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임명되었다. 처음 도착하자 예천 백성들이 환영하며 이분이 지난날 창녕의 어진 태수(太守)이셨다, 우리가 이제 만났으니 소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서로 말을 전하여 감히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여 온 고을이 화합하였다.

여덟 달이 지나 사류(土類)의 화가 얼어났다, 무오년(1498, 연산군4) 7월에 점필재(佔畢齋-김종직)의 제자라 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벽동군(碧潼郡)에 넘겨져 판결을 받았다. 경신년(1500, 연산군6)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는데 천둥이 치니 억울한 옥사를 마무리 지어라 명령하였다, 또 평안도에 넘겨졌다. 양남(兩南 -·호남) 으로 배소(配所)를 옮기니 공은 이 때문에 낙안군(樂安郡-지금의 전남 순천 벌교)으로 옮겼다, 신유년(1501, 연산군7) 10월에 부친의 부음을 듣고 보내준 의복으로 자리를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호곡(號哭)하여 기절했다가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사류의 화가 다시 일어났으니 공의 나이 46세였다, 적소(謫所)에서 잡혀 가면서 김준손(金駿孫)의 적소 순창(淳昌)을 지나는데 김 공이 길에서 맞이하여 넌지시 무어라고 귀띔했는데 대개 자신을 변명하라 함이다, 공이 묵묵히 대답하지 않자 김 공이 노모가 계시니 모름지기 다시 생각해보시오 하였는데 공은 그렇겠지요 하고 일어섰다, 대개 어머니 때문에 화를 모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겠으나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김 공이 쓸쓸히 작별하고 탄식하며 박 공이 삶을 버리고 바른 길을 지키려하니 이는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이다하였다.

공은 처형을 당할 때 신색(神色)이 변치 않고 양양하여 평소와 같았다,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잘 있으시오, 지금 내가 죽을 때입니다.”하였으니 515일 이었다. 이날 날이 갑자기 캄캄해지고 큰 비가 내렸으니 사나운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던 무오년 귀양 가던 날과 같았다, 집안사람들이 부음을 듣고 제사를 드리니 천둥 번개가 또 일어나고 긴 무지개 한끝이 뜰에 있던 물그릇에 꽂히니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다. 연산주(燕山主)는 명령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여러 아들은 나누어 귀양 보내었는데 장남 봉()은 거제도로 차남 난()은 낙안군(樂安郡)으로 보내고 그 아래 붕()과 홍()은 다 나이 어렸으므로 화를 면했다. 동년 9월에 함안군 서쪽 봉산(逢山)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니 바로 부인 친정의 선산이다, 부인은 광주 안씨(廣州安氏)이니 부사직(副司直) 효문(孝文)의 딸이다, 공이 돌아가신 뒤로 상복을 벗지 않고 슬퍼하여 뼈만 남아 이듬해 을축년 87일에 돌아가시니 공의 묘 왼쪽에 장사지냈다, 정덕(正德-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에 중종(中宗)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조정 관리로서 귀양 간 자와 연좌된 사람을 돌아오게 하였다. 정축년(1517 중종12)에 공을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예문관 직제학으로 추증 하고 안씨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증하여 봉하고 자손을 찾아 등용하게 했다.

공은 젊어서부터 성리학을 독실히 좋아하여 경전에 침착하여 부지런히 힘쓰기를 그치지 않고 책상에서 글을 보아 밤이 깊도록 잠들지 않았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산경(山徑), 지지(地誌)노장(老莊)불교의 학설도 다 탐구하여 궁리의 자료로 삼았다, 언어와 행동은 한결같이 예의를 따랐다, 아무리 급할지라도 말을 빠르게 하고 당황하는 가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부모를 섬김에는 사랑과 공경을 독실히 하여 잘 보살펴 드리고 기쁜 낯빛으로 받들기를 극진(極盡)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날마다 첫닭이 울면 반드시 세수하고 빗질한 다음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님을 뵙기를 예에 맞게 하고 물러나와 혼자 거처하며 종일 똑바로 앉아 독서를 하니 비록 한집 식구라도 그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공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아 세속을 끊어버리고 그 의()가 아니면 취하지 않고 도 ()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며 거처함에 집을 단장하지 않았고 옷은 몸을 가릴 만 하였으며 집에 조금의 저축도 없었으나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일찍이 한 친구를 찾아 갔는데 그 집 종이 주인에게 고하기를 문밖에 손님이 왔는데 키가 크고 베옷을 업었는데 꼭 거문고집 같습니다.” 하였으니 대개 그 검소함을 조롱한 것이다, 그 주인이 틀림없이 박 모이다.” 하고 신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가 맞아들이니 그 집 사람들이 다 크게 놀랐다.

훈도공(訓道公)은 성품이 엄숙하고 법도가 있었는데 향상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가르쳐 공은 아이 적부터 모든 행동을 감히 멋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창녕현감으로 있을 때 본가(本家)와의 거리가 반나절 길이었으나 문안과 봉양에 늘 일정한 법도가 있어서 함부로 하지 않았다. 여러 날 뵙지 못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하여 초저녁 때 단기(單騎)로 달려가 뵙고 조용히 모시고 얘기하다가 새벽이 되면 곧 돌아갔으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공은 위태롭고 혼란한 조정을 만나 간사한 이를 물리치고 군주의 잘못을 면전에서 바로잡았으며 불의와 다툴 때는 자신을 염려하여 피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만류하기를 공의 행동은 몸을 보존하는 길이 아니니 삼가 그렇게 하지 마시오.“ 하였으나 공은 남의 신하된 자기 바른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서로 맞지 않으면 떠나갈 뿐이지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어찌 제 몸을 돌보느라 임금을 불의(不義)에 빠뜨릴 수가 있겠습니까.”하니 듣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고 감복하였다, 공은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기필코 물리쳐 제거하려 했고 선을 좋아하기를 자기가 한 것처럼 하여 반드시 받들어 선양하려 하였다, 또 사문(斯文)을 일으킬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비록 적소(謫所)에 있을 때라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명사(名土)인 최산두(崔山斗)등 많은 이들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호남 학문의 연원은 다 공에게서 나왔다.”하였다, 어무적(魚無跳)이 일찍이 사호묘부(四晧廟賦)를 짓고는 스스로 능하다 여겨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감사를 따라 하산(夏山-창녕)에 이르러 공에게 사호묘부를 차운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공은 그 자리에서 무적에게 붓을 잡게 하고 한번 불러 글을 이루어 한 점도 가감이 않았다.

 

호탕에게 노래함이여, 가슴 속에는 요순(堯舜)이요. (浩歌兮 胸中堯舜)

맑게 휘파람 부노니 눈앞에는 바람과 달이로다. (淸嘯兮 眼底風月)

 

하는 구절에 이르러 문적도 놀라 감복하여 이 한 구절을 보니 공의 마음을 알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저술이 많았으나 부인이 사화에 질려 다 찾아 불 속에 던져버렸으므로 세상에 전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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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南(두남) -북두칠성의 남쪽 곧 천하를 칭함.

敦本善俗(돈본선속) -근본을 돈독히 하고 세상을 어질게 함.

搖役(요역) -나라에서 금전 대신으로 시키는 노동, 부역(賦役).

李慵軒(이용헌) -원문에 종준(宗準)이라고 이름을 밝혀놓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자는 중균(衆鈞) 호는 용재(慵齋) 용헌(慵軒) 부휴자(浮休子)등 본관은 경주,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사형 당했다,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다.

文昭殿(무소전) -태조의 신의왕후(神懿王后-정종, 태종의 어머니)의 사당, 태조와 태종의 위패(位牌)를 봉안.

延恩殿(연은전) -성종의 아버지 덕종(德宗)의 위패를 봉안했던 곳.

盧思愼(노사신-1427~1498) -자는 자승(子勝) 호는 보진재(保眞齊) 본관은 교하(交河) 무오사화 때 훈구파(勳舊波)의 중신(重臣).

盧南憓(노남혜) -노사신(盧思愼)의 종질(從姪).

箚子(차자) -서식의 간단한 상소문.

임사홍(任士洪-1445~1506) -자는 이의(而毅) 본관은 풍천(豊川), 좌찬성원준(元浚)의 아들로 권신(權臣).

謫所(적소) -귀양 가 있는 곳.

김준손(金駿孫) -자는 맹운(孟雲) 호는 동창(東窓), 세조 때 문신.

중종반정이다.

崔山斗(최산두) -연산군 때 문신,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齊), 본관은 광양(光陽).

柳希春(1513~1577) -중종 선조 때 문신 자는 인중(仁仲) 미암은 호 본관은 선산(善山).

魚無跡 (어무적) -연산군 때 시인 자는 잠부(潛夫) 호는 낭선(浪仙) 본관은 함종(咸從).

 

 

 

다음 내용은 청도문화원 선비아카데미 교육자료로 박홍갑 박사의 강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실천하는 선비의 표상국담 박수춘

 

                                                                            박홍갑 

 

 

 

1. 가계(家系)와 생애

 

 

국담 박수춘(1572~1652)은 한강 문인으로 문장과 도학으로 한 시대의 사표가 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데선생은 1572(선조 6) 청도 각북면 남산동에서 태어났다그의 조부 박대성이 청도 밀양박씨 행산파 입향조이다그의 고조 형달은 점필재 문인이고증조 언주는 오졸재 박한주에게 수학하였으며조부 박대성은 회재 문인이었으며아버지는 퇴계문인이었다.

이런 가문에서 태어난 박수춘은 정통 유학의 맥을 잇는 덕망으로 전 유림에서 칭송되는 바가 되었고행의(行義)는 온 나라에 알려진 그였지만미증유의 왜란을 맞아 감내하기 힘든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20세의 나이에 식구들과 함께 청송으로 피난을 다니던 중 괴질로 부모 형제 7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어야 했고이런 것들이 계기가 된 것인지는 모르나정유년에 다시 난리가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망우당 곽재우 창의진으로 나아가 왜적을 토벌하는 데에 진력을 다했다.

상처 깊은 병란의 화가 아물어 갈 때 쯤 학문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면서 기회 닿는대로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성리학적 진리를 탐구했다이때에 퇴계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한강 정구 선생을 찾아 제자의 예를 올리고 위학(爲學)의 요체와 태극(太極)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아울러 여헌 장현광 선생을 찾아 이기(理氣철학 등 우주철학을 논의하는 수련을 거쳐 마침내 본격적인 성리학자가 되었다그의 학문적 성과는 그가 남긴 저서 독서지남』 『학문유해』『도통연원』『동방학문연원』『의례견문해』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렇다고 그가 현실세계를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폐출한 사건이 발생하자인륜도덕의 완성을 목표로 한 성리학적 윤리에 어긋난다는 명분론에 따라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제출하려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그가 지은 다음의 시를 음미해 보면당시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내 준다 하겠다.

 

 

 

이렇듯 그가 살았던 당대는 전쟁에다가 중앙정국의 혼란까지 겹쳐졌던 시기였다북인세력을 등에 업은 광해군 정권은 정통성 면에서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반대세력들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측면이 강했고그 선두에는 내암 정인홍이 있었다밀양지역에서 이름난 학자였던 송계(松溪신계성의 여표비(閭表碑)를 세우는 과정에서 정 내암이 이언적과 이황을 헐뜯는 내용의 비문을 담았지만그 누구도 나서지 못하게 되자분기탱천한 박수춘은 정인홍을 직접 만나 잘못을 비판하고 비석마저 훼손하였음에도 무사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 역시 국담 박수춘이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청도지역 학풍에 영향을 준 인물을 말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신계성(申季誠 : 1499-1562)일 것이다자는 자함(子諴),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평산으로점필재가 태어난 고을에서 생장함으로써 자연히 사림파의 학문적 자세를 지닌 독행(篤行군자가 되어백의(白衣)로서 사액서원인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배향됨과 아울러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에도 향사되었다송당(松堂박영(朴英)의 문인으로남명(南冥조식(曺植)과 매우 절친하였다따라서 조식이 청도 사림들 예컨대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 병재 박하징 등을 방문할 때에도 함께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계성은 조식과 함께 경상우도의 실천적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일컬어진다그가 살았을 당시에는 경상좌도와 우도의 대립관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죽은 후 처음으로 여표비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여표비란 어떤 인물을 기념하고 드러내기 위하여 그가 살던 마을에 세우는 비석의 일종인데비문 찬자(撰者)가 퇴계의 문하이자 학봉의 형이었던 약봉(藥峰김극일(金克一)이었던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송계 신계성 몰후 14년 뒤인 1576년에 밀양부사였던 김극일이 세웠던 비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파괴되어 국담 박수춘(朴壽春주도로 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의 지문(識文)을 받아 다시 세웠는데그 과정에서 남인과 북인의 팽팽한 대립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내암이 신송계여포비 지문에서 회재와 퇴계 등 거유를 폄하하는 내용을 적어 국담공이 내암의 면전에서 반박하고 비를 부셔 버렸다고 전한다당시 남인과 북인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건임에는 틀림없다아무튼내암집에는 이 비석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후손들은 이 비석을 세운일이 없다고 한다.

그 후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력을 키워 병자호란을 일으키자국담 박수춘은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울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하지만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가 끝내 항복하고 삼전도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으면서 은둔의 길을 택했다후세 사람들이 국담선생을 기려 청도 각북면 남산동 남강서원에 배향하고 있다.

 

 

2. 학문적 배경과 현실의식

 

1) 가학적 배경과 한강학맥

 

국담의 조부 박대성은 회재 문인이고그의 아버지 박신은 퇴계 문인이다선생의 가문을 살펴보면 대대로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난 유학자였다고조부 사미정(四美亭박형달(朴亨達)은 영남사림의 종장이었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로 조선조 도학의 큰 줄기를 형성한 한원당 김굉필이나 일두 정여창과 함께 학문과 도의로 벗했다증조부 박언계는 그의 부친 박형달 영향으로점필재 문하에서 뛰어났던 같은 가문의 박한주에게 배웠고후일 당대 사림의 영수로 추앙받던 조광조와 사귀었다.

이렇듯 국담선생 가문 4대의 사회적 활동과 교류를 통해서 보면당대의 명망 있던 동방 5현은 물론이고 남명 조식 등과 같은 학자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통해 폭넓은 학문적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아울러 그의 선대들은 높은 학문적 식견과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오르긴 했지만관직생활에는 별반 뜻을 보이지 않고초야에 묻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을 쏟는 한편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국담 선생의 조부였던 박대성은 그의 아들 신을 가르칠 때 통감 15편을 주면서 1천 번을 읽지 않고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는데어린 신은 이 일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실행했을 정도였다그 후 박신은 이황의 문하가 되어 대학과 중용의 요지를 익히고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의 깊은 뜻을 배웠다이러한 선대의 학문적 전통과 토대야말로 박수춘을 있게 한 큰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당시 대다수의 학자들은 가학에서 출발하여 더 큰 학문적 성취로 이어지는 것이 관례였듯이국담 선생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강문인은 강좌강우 등 경상도 전역을 비롯하여 서울 및 경기 호서지역에까지 두루 분포하고 있는데이는 한강학파의 외연이 매우 광범위했음을 뜻한다그러나 문인의 지역별 분포를 세밀히 살펴보면 영남권 중에서도 낙동강 연안지역 집중 현상이 뚜렷함을 알 수 있다, 342명 가운데 약 90%가 영남 출신이고약 62%가 낙동강 연안지역[김천상주선산인동칠곡성주대구경산현풍고령영산창녕함안청도밀양김해]에 분포하고 있었다.

박수춘은 정구로부터 기우(氣宇)가 영호(英豪)한 인물로 평가 되었고 정인홍이 신계성의 여표비문을 지으면서 이언적이황을 비난하자 정인홍을 찾아가 면척(面斥)하고는 절교했다고 한다. 밀양의 세족답게 이 가문은 강우의 명문들과 혼인하였는데 그의 대를 전후하여 형성된 혼맥은 한강학맥의 혈연적인 연대구조를 살피는 좋은 사례가 된다그의 자녀들이 거의 한강 학맥을 이은 가문들과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2) 남인 북인 대립과 무오소(戊午疏)

 

동서 분당과 당쟁의 시작

남인 북인 분당과 퇴계 남명학파의 대립

인목대비 서궁 유폐와 박수춘의 무오소그 원인과 결과

 

3) 북인 정인홍과 남인 박수춘의 대립

 

송계여표비 시비 : [松溪 申先生 重建閭表碑誌〕 -來庵 鄭仁弘 

[시비거리 문제의 내용]

抑有一焉世降矣學不講道不明矣或有掩然媚世自以爲是而不可與入道者或有張皇氣勢威震鄕國期一時而瞞後世者此皆先生之罪人也後之學者不可不明辨於苗莠之分不昧於立脚之初此實立石觀感之本意也

 

또한 한 가지가 더 있으니세상이 쇠퇴하여 학문은 전해지지 않고 도는 밝아지지 않을 것이다간혹 모르는 척 세상에 아부하면서 스스로는 옳다고 여기지만 함께 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며혹은 기세를 부려서 위엄이 경향을 울리지만 한 때를 기약하여 후세를 속이는 자가 있으니이들은 모두 선생의 죄인이다후세의 학자는 벼 싹과 가라지의 차이를 분명하게 분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뜻을 세우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했던 처음의 뜻을 몰라서는 안 될 터이니이것이 실로 비석을 세워서 보고 느끼게 하는 본뜻이다.

 

4) 숭정처사

 

척화둔세(斥和遁世)

 

5) 향약 실시

 

菊潭集2, 讀書朱文公白鹿洞學規及呂氏鄕約示生徒文

“(풍각현은험한 산골에 끼여 있어서 風俗이 頑惡하여 본래 五倫을 알지 못함으로써 孝悌가 무엇인지禮儀가 무엇인지 모른다... 임진 병화를 겪은 이후로는 더욱 불손하고 어리석어 윤리를 모두 상실하였으니 이런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꼴이 될 것인가... 지금은 오랑캐 지역과 같은 곳이 되었다너희 고을 사람들은 부끄러운 마음이 없단 말인가 ... 이에 고을의 젊은이 및 노인과 함께 를 모으고 백록동서원의 學規와 呂氏鄕約으로 科條를 삼아서 열흘이나 달마다 시험을 보이어 善惡을 분별하여 징벌과 권장을 하기로 하였다... 정성스레 남기신 學規를 받들어 삼가 조목대로 벌려 놓고 제군에게 보이노니 제군은 범연히 보아 소흘히 하겠는가

 

6) 도통의 체계적 정리

 

道統源流錄와 東方學問淵源錄저술 남김그러나 서문만 남아 있음(道統源流錄序와 東方學問淵源錄序). 도통원류록서는 三皇五帝로부터 중국의 孔子二程朱子에 이르기까지의 의 연원의 흐름을 정리한 글동방학문연원록서는 도통원류록서의 후속편으로 당시까지 조선조 도통의 흐름을 정리.

동방학문연원록서」 서문

우리 가 동방으로부터 전래된 지가 오래이다... 崔文昌(崔致遠)은 북쪽의 중국에 가서 학문을 배워 문학으로 천하에 알려졌고薛弘儒(薛聰)은 九經訓義를 지어 후진을 교육시키니 이 분들이 東方문학의 비조이다그 후 번갈아 분연히 일어선 이가 있었으나모두 詞章으로 세상에 알려진 선비에 불과함으로 그치었다고려 말기에 李文靖(李穡)이 中原에 유학하여 周子程子張子朱子의 학문을 들음으로써우리 동방의 선비들이 처음으로 詞章 외에 性理의 학설이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문장과 도덕이 순수하게 청천백일과 같이 한결같이 正道에서 나온 이는 오직 鄭文忠(鄭夢周한 사람 뿐이었다정몽주가 처음 밝힌 이후로 當日에 보고 안 이도 적지 않았으나모두 詞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국조에 들어와 金文簡(金宗直)만이 듣고서 알았으니金文敬(金宏弼), 鄭文獻(鄭汝昌)이 모두 師事하여 빛내고 확대하였다趙文正(趙光祖), 李文元(李彦迪)이 서로 이어서 환하게 밝혔고李文純(李滉)이 四賢의 성취를 모아 동방의 考亭이 되었으니우리 동방학문의 연원은 대강 이와 같다.”

당시까지 詞章學과 性理學의 기준에 의하여 도통 흐름의 대강을 기록.

박수춘의 도통인식은 文廟從祀運動의 일환으로 올린 청원운동 맥락

오현 종사운동 : 1610(광해군 2) 9월 오현이 향교 대성전의 東廡와 西廡에 각각 배향됨으로써 유생들의 청원운동 결실 맺음.

 

 

 

 

응천서당(凝川書堂)

 

청도군 각북면 남산 2 64번지에 소재하며 비슬산을 뒤로 하고 웅장하게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1995년에 첨모재란 이름으로 출발했으나 2년 뒤 1997(정축 3) 향도사림회에서 첨모재에서 응천서당으로 현액하였다.

배향인물인 응천(凝川) 박유(朴瑜) 선생은 성균관 진사였으나 당시 사화가 일어나고 국정이 혼란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였다.

유림에서 경응계(景凝契)를 조직하여 춘추향사하고 있다.

 

 

 

3칸 규모의 솟을대문(출입문 및 방1, 수납공간1)을 들어서면 웅장하게 동향으로 자리 잡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의 서당(온돌방 3, 대청2)이 있다. 재사 보호를 위해 툇마루 앞에 유리 창문을 달았으며 응천서당기  첨모재기가 대청마루에 걸려 있다. 부속건물(2, 주방1)이 있고 잔디마당에 향나무 등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으며 토석담장을 둘렀다. 마당에는 첨모재 낙성기념비 응천서당 기념비가 있고 대문 밖에는 유인 창녕 조씨 정려비가 있다.

 

 

 

 

 

 

 

 

 

 

 

사우당 

 

 

 

 

 

 

낙산정사(樂山精舍)

 

  청도군 각북면 낙산4 12번지(남산 3)에 소재한다. 이곳은 가말 또는 낙성으로 불려지는 곳인데 마을 입구에 있어 시야가 넓어 전망이 좋다. 91년도에 종전의 목조와가를 헐고 양옥 기와집을 신축했다. 시멘트 마당이며 블록담장에 철대문이 있다. ‘낙산정사를 소재로 한 여러 편의 시들이 마루 벽에 걸려 있다.

  경주 이씨 문중의 종사이다. 종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기리며 시사를 올리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자녀들이 모여 조상의 아름다운 유풍을 익히는 곳이기도 하다. 경주 이씨가 이마을에 입촌한 것은 약 250년 전이다. 지금 9대에 걸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경주 이씨는 운문 봉하에서 지촌을 거쳐 남산3리에 들어왔다.

 

 

 

남산리 

 

  902호선을 따라 풍각 쪽에서 헐티재로 가다보면 각북 면사무소가 있다. 이 마을이 바로 남산리 소말이다. 비슬산 동편에 위치한 남산은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준령들이 에워싸고 있다. 북쪽에 덕산리가 있고, 서남쪽에 성곡리가 있다.

이 마을은 남산 1,2,3리가 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소말, 남산(南山), 낙성(樂盛) 또는 가말 이 있다.

1리인 소말은 각북면의 중심지로 각북 면사무소에 이어 파출소, 우체국, 서청도 농협이 있다. 각북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가 되었고 중학교는 풍각 중학교 각북 분교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남산에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성곡리로 가는 길에 비슬 리조트가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남산리의 형성과 변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각북면 서북쪽에 있는 남산리는 소말과 남산, 낙성[가말] 등의 자연 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다. 소말은 인근 마을에 비해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소() 마을, 작은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소리(小里) 또는 소촌(小村)이라고 적고 소말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남산이란 이름은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이 이 마을에 살면서 마을 앞산이 비교적 높아서 앞산 또는 남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남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박수춘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남산에다 성을 쌓고 의병 활동을 하여 산 이름을 성마루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낙성(樂盛) 또는 가말은 남산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마을이다. 가마실, 부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서쪽 계곡 애골에 지금도 자기를 생산했던 자기요(瓷器窯)가 무너진 채 남아 있어 가마실로 부르고 있다.

  밀양과 대구부에 속해 있던 당시의 역사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1768 대구읍지(大邱邑誌)에 따르면 이곳의 지명은 남산 상리와 남산 하리였다. 밀주지(密州誌)에는 옛 사람이 살았던 기록이 없다고 하고 있으나, 남산리에는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군 각북면의 지역으로 남산이라 했으나 1906(광무 10) 청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낙성동 등을 병합하여 남산동이라 하여 각북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남산동에서 남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풍각면 성곡리와 경계에 있는 성마루성은 둘레가 약 700m로 바깥 면은 석축(石築)이고, 안은 토축(土築)으로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박수춘이 의병을 지휘하면서 성을 쌓고 주민들을 피난시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청도군지에 소개된 남산리(南山里)는 다음과 같다.

통점령(通店嶺), 원계령, 혈티령 등 600고지를 거느리고 있는 비슬산계의 봉우리들이 즐비하게 이 마을의 3면을 에워싸고 있다. 동저서고의 지대로 고지대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소리(小里)는 냇가에 취락되어 있기도 하다. 하천은 산골의 시내답게 홍수 때마다 급류로 하상이나 방둑을 멋대로 하면서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게 하는 것이 예사로 홍수 전후의 하상은 금석지감(今昔之感)을 주면서 산 계곡의 특징을 유감없이 발휘해준다. 소리에는 밀성인 박원영 공이 1579년에 입촌하여 예()를 숭상하는 동풍 확립에 노력했고, 150여 년 후에는 경주인 이원세 공도 입주했다. 남산(南山)에는 소리의 박 공보다 약 10여 년 후인 1587년에 밀성인 박수춘 공이 터를 다지고 예숭(禮崇)의 동풍을 동민들의 생활 속에 심었다. 부곡(釜谷)에는 임란의 여진이 가시지도 않은 1597년에 평택인 임 붕 공이 마을을 열고 터전을 닦았다.

 

소리(小里), 소말

  박원영 공이 처음 입주하여 소나무 숲 속에 고고히 안락하면서 홀로 산다고 작은 마을 즉 소촌(小村)이라 하다가 소마을을 소말로 다시 소리(小里)로 표기한 것으로 마을을 말로, ()을 리()로 바꾼 것이다. 그러다가 뒤에 정착한 이원세 공이 주위의 산세를 살펴보니 음양상 음산(陰山)과 양산(陽山)의 형세가 상통하므로 마을이 번창할 것이라 남양(南陽)이라 개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산(南山)

  박수춘 공이 마을 남쪽의 산세가 좋으므로 남산이라고 동명을 정했다.

 

가마말, 부곡(釜谷)

  처음 정착한 임 붕 공이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마을 형국이 가마솥형이라고 가마말이라고 하는 설과 마을 앞에 지하수가 솟아서 가마솥에다 밥을 지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낙성(樂盛)

  사방의 자연을 자세히 보니 명산인 비슬산 아래에 자리 잡아 앞으로는 살기 좋은 마을로 동민들이 즐겁게 살 것이라고 붙여진 동명이라 한다.

 

남산산성(南山山城-성마루성)

  임란이 일어나자 동민들이 자발적으로 축성한 산성이다. 규모는 상세치 않으나 성벽이 상존(尙存)하고 있다.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곽재우 장군이 비슬산에 포진하였을 때 이 산성은 각북(角北), 장기(長基), 두 골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적의 정찰 겸 신호등의 소임을 맡은 것이라 믿어진다.

 

위의 청도문화대전과 청도군지에 나타난 생성 및 유래, 변천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특히  가마말의 유래와 남산산성이 좀 다른데 계속 연구되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 참고

 

-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 청도군지(1991, 청도군)

-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 디지털 청도문화대전

- 택리지(1978, 최장영 외)

- 도주지(1958, 김석봉 편)

- 청도문화원 선비아카데미 교육자료(강사: 박홍갑)

- 각 문중 후손 및 주민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