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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의 계명재와 효자각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의 계명재와 효자각/ 행전  박영환

 

  2016년 12월 28일(수) ,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 계명재를 찾았다.

 

 

 

 

계명재(啓明齋)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 168번지에 있다. 1840년에 처음 지었으나 그동안 여러 차례 중수했으며 2000년 경에도 새로 보수하여 단장했다.

  구라동 왼편 국도 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넓은 들과 청도의 진산인 남산을 조망하고 있다. 재사 주변에 블록 담장을 둘렀다. 건물은 계명재, 하당, 솟을 대문이 있다. 계명재는 5칸으로 대청 2, 방이 3칸이며 하당은 4칸이고 대문은 3칸인데 출입문외 방 2칸을 들였다. 넓은 대청에는 제 계명재  3편의 글이 걸려 있다.

  이 재사는 기성 반씨 입청도조(入淸道祖)인 반예(潘汭)[1507(중종 2) -1586(선조19)] 가 수학하고 강학하던 곳이다. 그의 자는 남로(南老)이며 호는 인재(忍齋)로 석암 반복해(潘福海)  9세손이며 옥계 반우형(潘佑亨)의 아들이다. 삼족당 김대유 문하에서 수업하고 충순위 도정에 올랐으나 공명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에 전념하여 학문을 닦았다. 가의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반환(潘瓛)의 효자 유허비

 

관리문중: 기성 반씨

소재지: 청도군 이서면 구라리

구라리 앞 도로변 기성반씨 재사인 계명재옆에 있다.

건물구조:비각은 단칸[單間]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주위에는 방형의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일각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였다. 비각의 양 측면과 배면에는 하부에만 벽체를 설치하였고, 전면은 개방시켜 내부의 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다.

 

배향인물: 반환(潘瓛)

본관은 기성(岐城)이며, 옥계(玉溪) 우형(佑亨)의 후손으로 호는 종모재(終慕齋)이다.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더니 자라서는 학문을 하는데 나태하지 않았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 마음과 예절을 갖추어 봉양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를 넘었다. 어머니 묘소가 40리 떨어져 있었지만 날마다 애절한 마음으로 성묘하기를 비바람이 치는 날일지라도 그만두지 않았는데,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해서는 시묘 살이하며 3년을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범이 호위하였는데 가축처럼 여겼다. 이에 따라 몇 칸 집을 지어 직접 밥을 해먹으며 거처하였다. 사림에서 여러번 이런 사실을 도에 보고하였고, 향리에서는 그가 살던 곳을 종모재라고 하였다. 김복한(金福漢)이 지은 묘갈명과 유필영(柳必永)이 쓴 유허비명이 있다

연혁: 기성인(岐城人) 반환(潘瓛)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25년 기성 반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종모재 반환 유허비명(終慕齋潘瓛遺墟碑銘)

서파 유필영(西坡柳必永) ()

 

섬김에 있어 무엇이 가장 위대한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 가장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효도에 있어 다다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종신토록 영원히 사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공께서는 아름다운 행위를 하셨도다.

하늘이 낸 지극히 성실한 효자로써

살아계실 때는 섬김을 다하셨고,

돌아가실 때는 장제(葬祭)를 다하셨다.

예절 하나하나에 허물이 없었으며,

10년의 긴 시간을 여묘(廬墓)를 하셨다.

옛부터 지금까지 이런 효자는 드물었으며,

진실한 믿음에 만물이 감동하였도다.

달리던 말이 머물렀으며, 호랑이도 개처럼 길들여졌으며,

이러한 일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사람으로써의 기강을 심어주었으니

옥돌에다 공의 행적을 기록하니

지나가는 사람도 반드시 이대로 따르리라.

 

다음은 도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終慕齋遺墟碑閣伊西面 九羅洞에 있는데 岐城人 潘瓛 遺墟碑閣이다  忍齋 汭 九世孫으로서  獻玉이요  終慕齋인데 有幼異質하여 及長向學 勤勉하고 母沒 葬于杜谷山 四十里許하고 省墓三年 不廢風雨하고 每日往來함은 爲其嚴親在堂故也 及親沒 葬于同麓하고 廬于墓下하여 朝夕侍奠하고 非有祭故 不歸家하다 如是十餘年 鄕人 號其所居廬曰 終慕齋라하니 盖大舜終身慕 父母之廬와 같도다 鄕道儒林 累有呈狀하데 未蒙表旌하고 世㤼遞桑瀾矣 以純祖己丑八月一日 卒于墳庵하니 享年 六十二歲였다 歸 葬于九羅村後麓 面午之原하고 子孫  生長之地 築遺構碑閣하다 通政大夫 大司成 金福漢 撰墓碣銘曰 人之修行 惟孝爲大 滔滔衰世 專事於外으늘 磋公務實 事親以誠이라 生養死哀 各盡其情이라 異類孚感 虎來馬止 猶恐有名 莫闡其美 兟兟曾玄 代石墓門이라 我作銘辭하여 愚昏하노라하였고 逸士柳必永撰遺墟碑銘曰 事孰爲大 曰惟孝親이라 孝孰爲至 永墓終身이라 懿哉潘公 誠孝出天이라 生死葬祭 一禮岡愆이라 十年廬墓 古穿今聞이고 孚信感物 馬止虎馴이라 함은 傳誦至今 人紀扶植이라 참 珉載蹟 過者必式하다嘉義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 春秋館成均館事奎章閣直提學世子侍講院檢校輔德 驪興閔內承撰文이있어 當時世情 欽慕케 한다.

 

 

 

 

 

구라리(九羅里)

 

  동명이 말의 '굴대'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남산 연봉을 비추는 황홀한 광경에서 유래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없다. 아무튼 두 가지 설을 소개해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소개된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삼성산 줄기인 중천산 아래 말발굽처럼 남향으로 앉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며 멀리 오산(鰲山)[남산]이 있어 청도 팔경의 하나인 오산 조일(鰲山朝日)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앞 남쪽에는 청도천[한냇강]이 흐르고 으며 청도천 가에 구봉조대(九峰釣臺)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서와 풍각, 각남 등으로 이어지는 큰 길이 있어 교통이 좋다.

 구라리의 원래 이름은 늑평이다. 전하는 말에는 옛날 이 지방에 군사들이 주둔해 있을 때, 장군의 말이 죽어 묻었기 때문에 늑평이라 했다고 한다. 늑평은 멍에로, 청도 지방에서는 굴대라고 하는데 이 굴대가 변하여 구라가 되었다고 한다. 또 신평과 대칭으로 오래된 들이기에 구라라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구라(九羅)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그레이스 컨트리클럽으로 바뀐 안쪽 골짜기는 중천골이다.

  1896 청도읍지에 의하면 상북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각계동, 하대전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구라동이라 하였으며, 이서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 당시 자연 마을을 새로 구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동명을 유지한 마을이다. 1988 5 1일 구라동에서 구라리로 이름을 바꾸었다.기성 반씨의 집성촌이다.

  

한편 청도군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봉산 자락이 용이 되어 칠엽리와 수야리를 분리시키면서 다시 태봉지(胎封池)를 낳게 하면서 갈라져 하나는 가금리에서 멈추고 하나는 구라리에서 멈추면서 동으로 돌아 와룡봉등(臥龍峰嶝)이 되어 서원리에서 끝이 나 있다.

   마을 앞으로는 청도천이 회류하여 마을을 돌아 흐르며 멀리 남산의 빼어난 봉우리들이 유유히 서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 마을은 기성반씨(岐城潘氏)의 집성촌답게 1500년대 중엽에 기성인 반 예(潘汭) 공이 입촌하여 유풍을 진작시켰다. 100여년후 철성인 이광세 공도 입주 하여 반, 이문이 명실공히 마을의 지주가 되어 있다.

 

구라(九羅)

  늑평(勒坪)이라고 불렀으며 또 한가지는 밀풍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고증이 없다. 늑평이란 옛날 어느 장군이 뒷산에 말안장을 묻었다는 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구라라는 동명은 19세기경의 동명이 아닌가 싶다. 남산조양(南山朝陽)은 청도 팔경의 하나로 이 마을에서 바라보면 녹거천로(鹿車釧路)의 비경으로 조양이 남산 연봉을 비추는 황홀한 광경이 골마다 비단같이 아름다워서 동명으로 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자는 아홉개의 골짜기가 아니고 여러개의 골짜기, 즉 많은 골짜기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며 선비의 글 자랑에서 나온 동명이라고 믿어진다.

 

 

참고 

- 청도문화(2001, 청도문화원)

-청도군지(1991, 청도군)

-국역청도문헌고(2009, 청도문화원)

-관리 문중 후손 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