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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면현(綿峴) 옛길

면현(綿峴) 옛길/ 2017년 6월 14일(수) 행전 박영환

 

  

 

 

  오늘 우리문화바로알기 회원들과 함께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의 안내에 따라 면현을 넘었다.

청도군내에는 206개의 고개가 있다고 한다. 그 중 곰티재, 운문령, 팔조령, 비티재, 헐티재, 한재 등은 지금도 큰 도로가 개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지만 면현은 조금 낯선 고개이다.

  특히 산서지역에 살고 있는 나는 유서 깊은 고개라고 소개하기 전까지는 거의 들어 본적도 없는 그야말로 옛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은 조선시대에서 구한말까지 운문사를 탐방하고 간 선비들이 하나같이 이 고개를 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니 옛날에는 아주 주요한 길이었음에 틀림없다.

 

 

 

 

 

 

 

 

  늦은 감이 있지만 그 길을 오늘 답사한다고 생각하니 여느 등산과 달리 뿌듯하고 감회가 깊다

  09시 문화원에 집결하여 차를 분승하여 탔다. 나는 박성규 교장님의 차에 하련스님, 시윤덕씨와 같이 동승을 했다. 09시 40, 금천면 박곡리 대비사 앞 못 가에 차를 주차했다

  10, 문화원장의 간단한 주의 말씀을 들은 뒤 출발했다. 이날은 특히 박곡 동장님이 우리 일행들을 고개 위까지 안내해 주어 고마웠다. 임도 포장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대비사 가는 길과 갈라졌는 데 면현이란 이름은 없고 청도 솔뫼길 입구, 운문사, 억산 가는 길이란 표지가 나왔다. 아마 현지민들도 이 이름을 잘 사용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잊혀진 이름은 아니란다. 아무튼 좁은 등산로이지만 길이 막히지 않고 지금도 등산객들이 왕래하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면현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박 원장은 그 연원을 설명하기 위해 고려 건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려 태조 왕건이 지금의 전주 지역을 평정하고 동진하여 청도지역으로 들어왔을 때 폐성(吠城)의 호족들이 워낙 강하게 저항하는지라 밀양 추화산(推火山) 봉성사(奉聖寺)에 있는 보양선사(寶壤禪師)를 청해서 저 산성 안에 있는 ‘적도(賊徒)’-승자의 기록이라 승자이외는 모두 적도로 간주함-를 쉽게 물리칠 수 있는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보양스님은 주민을 불러다가 저 산성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폐성이라고 하였다.

  이 성은 지금 화양읍 덕사(일명 떡절)가 있는 곳이며 이서국과 신라의 마지막 결전지라고도 알려져 있는 곳이니 주요한 요새지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폐성(吠城)’이란 이름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개란 놈은 밤에는 지키되 낮에는 지키지 아니하고 앞은 지키나 뒤는 지키지 않으니 낮에 뒤에서 치면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고려 태조가 그의 말에 따라 낮에 공격을 하니 과연 쉽게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고 난 뒤, 보양스님의 공로를 잊지 않고 대작갑사 주지로 명함과 동시에 운문선사란 사액과 함께 500결의 전지와 500명의 노비를 보내어 스님을 받들게 하였다.

 

  10 10, 박곡동장은 다름나무 패찰이 붙은 사잇길로 안내했다. 이것보다 더 지름길이 있기는 하지만 경사가 심하여 올라가기 힘드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래도 좀 완만한 길이라 할 수 있는 이 길을 가자는 것이다. 가는 길에 머루나무가 많았다. 팔뚝만한 다래나무가 주변의 나무들 등을 타고 뻗어 있었다. 그런데 머루는 별로 없었다

 

 

 

 

 

  10 38, 잠시 휴식을 했다. 이곳이 샘터가 있는 곳이지만 워낙 가문 터라 물이 말라 아쉬웠다. 하는 수 없이 준비해간 물을 마시며 땀을 닦았다.

 

  박 원장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고려 태조가 왜 보양스님에게 전지 500결과 노비 500명을 보냈을까? 고려 태조가 쉽게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만연해 있던 호족들의 세력을 결집하여 쉽게 건국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이 건국을 하고서도 걱정을 한 것이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저어하였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호족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바로 보양스님이었던 것이다. 보양스님은 어떤 사람인가? 보양스님에 대한 전기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 운문사 사적기에 나타나는 보양스님은 중국()에 들어가서 운문산에 있는 운문사의 운문문언(雲門文偃) 스님에게 선을 배워서 돌아온 분이다. 이런 분이기에 삼국을 통일하면서 청도지역을 정벌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준 보양스님을 철저히 믿고 깍듯이 모셨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500명의 노비는 바로 군사였고 500결의 전지는 둔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1 40, 드디어 능선에 도착했다. 길이 세 갈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우리가 올라왔던 길이고 남쪽 길로 가면 운문사로 내려가는 길이며 북쪽으로 가면 신원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우리는 북쪽길을 택했다. 그길이 바로 면현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동곡 443, 1982 재설이란 돌로 새긴 기점 표석이 있었다. 이 산은 특이하게 맥반석이 많은 산이다. 그래서 성황당처럼 돌무덤도 있는데 전부 맥반석 조각들이 쌓여 있었다.

 

   500명의 노비와 그에 딸린 식구를 합하면 대강 2,000여명의 대 식구였을 것이다. 2,000명이나 되는 사하촌 이 식구들의 생계수단은 무엇이었을까? 박 원장은 이렇게 추측했다.

  운문사 사하촌은 염창(鹽倉)과 소캐가 있는 곳이었다. 염창이 소금창고라는 것은 이설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내륙 깊숙한 곳에 소금창고가 생긴 연유는 무엇일까? 아마 노비들과 그 가족들이 경제 활동의 수단으로 소금 장사를 했을 것 같다. 당시에 많은 승려들이 살고 있다고 해도 마을 자체에 염창을 만들 만큼 많은 승려들이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적은 양으로 많은 돈을 살 수 있는 것이 소금이었고 중세 유럽에서도 소금 1킬로그램과 금 1킬로그램을 맞바꾼 적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소금이 금처럼 귀한 때를 맞아 노비들이 생계수단으로 소금 장사를 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1 57, 칼날처럼 좁은 바위 앞에 도착했다. 바위 앞은 천길 낭떠러지였다. 매우 위험한 곳이었지만 원래 모든 것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 회원들인지라 위험을 무릅쓰고 바위 위에 올라갔다. 나도 그냥 있지 못하고 카메라를 들고 바위에 올라서서 전경을 담았다. 산 밑 출발하기 전 바라보았던 대비 저수지가 보인다. 옆에서 볼 때는 그냥 보통 저수지였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한 폭의 풍경화이다. 그리고 가물가물 바라보이는 마을들도 번뇌가 없는 평화의 둥지 같다.

 

 

 

 

  12 10, 능선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김밤 집에 산 김밥 한 줄을 가지고 갔는데 집에서 반찬을 많이 준비하여 가지고 온 분도 계셨고 특히 직접 가꾼 오이나 막걸리나 음료수 및 귀한 하수오주까지 가지고 온 분도 계셨다.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이 힘든 고개에 그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오다니... 참 고마운 분들이다. 나는 서울 갈 때 눈썹도 빼놓고 간다는 생각으로 고개 오르는 데만 지례 겁만 먹었으니 미안하다.

 

  이제 본격적인 면현에 대한 이야기다. 고려시대에 왜 많은 국사나 왕사가 변방에 거주했을까? 왕사나 국사라면 임금이 있는 개경에 있어야 하지만 고려 때에는 많은 왕사나 국사가 대부분 변방에 거주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원응국사나 일연 왕사가 있을 당시에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을 때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일들이 많았다. 대부분 민중항쟁이란 묘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모두가 정부를 부정하는 모습을 띄고 있다. 이때 원응국사 학일이 운문사에 주석할 때 왜 300명의 노비와 300결의 전지를 내렸을까? 이들은 노비이기도 하지만 바로 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생계수단은 무엇이었을까? 노비 300명이라면 가족이 4식구라 해도 1,200명인데 운문면의 면민보다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은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특수작물인 목화를 심어 그것으로 경제적인 활동을 했을 것 같다.

  마침 이때 중국에서 들여온 목화가 막 시배를 하였던 시기라고 한다. 문익점 선생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이전에도 목화는 있었다고 하나 개량된 목화를 대량생산하고 목화에서 씨를 빼내는 씨앗이라는 물레와 실을 만드는 물레를 만들어서 보급화 하는 데는 문익점 선생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목면이 일반화 되기 전에도 베를 짰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베인지 베인지 명확하지 않다. 경북대학교에 재직했던 문경현 교수는 문익점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와 가장 먼저 벼슬을 한 곳이 청도군수라고 말하면서 문익점 선생께서 원나라 홍원 스님의 도움을 받아 솜을 만드는 법과 씨를 빼고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드는 법을 배워 와서 운문사에서 노비들에게 가르쳐서 일반에 보급하는 일을 정착시킨 공이 더 높다고 했다.

  물론 이 부분은 좀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되겠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어 유추해보는 것이다. 돌려서 생각해보면 운문사 노비들이 기거하는 사하촌에서 경제 작물이 목화를 재배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이 소캐가 되었을 것이다. ‘소캐란 솜을 일컫는 경상도 지역 사투리이다.

  소캐는 목화의 마지막 이름이다. 목화는 다래가 익어서 껍질이 벌어지면 목화라고 하고 목화가 되기 전 풋 열매를 다래라고 한다. 목화에 씨를 빼고 실을 만들면 명이 되고 털어서 부드럽게 하면 목화솜이 된다.

  조선시대에는 목화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물건을 사고파는 값을 면포로 대신했으니 화폐와 같이 사용하였다. 면포는 국가 경제와 세금 체제에 주요한 위치를 가지는데 화폐와 같은 위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속계라고도 부른다. ‘속계가 먼저인지, 아니면 소캐가 먼저인가. ‘속계라 한 것은 조선 후기 솥을 만들면서 생긴 것이고 소캐는 그 훨씬 이전 아마도 고려 때이니 소캐가 먼저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경제 작물인 소캐를 내륙으로 나르기 위해 바로 우리가 넘는 이 면현 고개를 넘었던 것 같다.

  흔히 명태재라고도 한다. 이는 면태(綿駄)’에서 나온 것이다. ‘면태는 솜을 싣거나 지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발음이 용이한 명태라 하면서 기록은 면현(綿峴)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운문사의 많은 노비들이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 목화를 심었고 이 목화를 생산해서 내륙으로 나르는 고개가 면현이요’, 또 다르게 나르는 형상을 살려 면태재라 이름 했을 것 같다.

 

 

 

 

  12 40분쯤, 식사를 마치고 소캐 또는 속계라는 속칭으로 불려지는 신원리 방향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매우 심한 곳이기에 길은 S자형, Z자형으로 돌고 돌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매우 위험한 지경에 이를 길이다. 우리는 맨몸으로 내려가는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올라왔을 분들은 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삶 그자체가 짐이다.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그 짐이 무겁고 그 길이 비록 고생이 되어도 다른 지역에서는 없는 경제 상품을 지고 넘어가는 뿌듯함과 긍지는 있었을 것 같다.

  13 13, 부도암에 도착했다. 그냥 이름만 전해질 뿐 절은 없다. 이 부도암 앞터가 옛날 스님들 이 입적을 하고 난 뒤 다비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조금 전 우리는 상여 집을 지나왔다. 그 상여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련만 또 그 흔적과 이상하게 자꾸 기대어 생각되는 것은 어쩐 일인가.

 

 

 

 

 

 

 

 

 

  13 20, 장군평 앞을 지났다. 화랑도들이 훈련을 했다는 너른 평야이다. 원광국사가 가슬갑사에 주석할 때 지금의 지룡산성 위에서 멀리 훈련하는 장면을 조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논밭이고 또 복분자 밭도 있다. 날씨가 가무니 수원이 좋기로 소문난 이 개울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흘러간 물이 거대한 운문댐을 이루어 청도와 대구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이 되고 있는데 걱정이다. 

  운문사 이무기의 전설이 생각난다. 

  보양국사를 따라온 이목(이무기)은 항상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남 몰래 돕고 있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에 채소가 마르자 보양국사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땅이 흡족하여 생기가 돌았다. 이때 천제가 하늘의 법칙을 어겼다하여 이목을 죽이려 함에 보양국사가 이목을 침상 밑에 숨겼다. 하늘의 사자가 내려와 보양국사에게 이목이 있는 곳을 물으니 보양국사가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그곳에 벼락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이목이 살던 작은 못을 이목소라 한다. 삼국유사 ‘보양 이목조’에 실린 것이다.

  하늘이 쨍쨍 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쯤되면 이무기에게 다시 부탁해야 될 것 같다. 제발 비를 내려달라고.  

   13 25, 울창한 솔숲 앞에 있는 운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다리가 뻐근하지만 조금도 피로하지 않다. 정말 의미 있는 답사로 좋은 배움 그리고 오래 기억할 추억이 될 같다. 박학하고 구수한 입담으로 설명을 해주신 문화원장님, 협동의 마음으로 밀고 끌어주신 회원님, 그리고 길을 안내해주신 박곡 동장님, 사전 준비를 하고 궂은 일 마다않고 세심하게 진행을 한 이 국장님 또 대비사 저수지까지 운전하신 분들을 실어다 주신 운문면장님, 대비사 못, 그리고 운문사 주차장까지 다시 오셔서 일행을 태워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