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운 청도의 자산 삼국유사와 죽바위
행전 박영환
교직에서 퇴직을 한 뒤 40년 동안 머물던 부산을 떠나 고향 청도에 돌아와 인터넷에 ‘청도문학신문’이란 까페를 개설한 뒤 ‘청도탐방’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혼자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였지만, 청도문화원 ‘우리 문화바로알기’와 '청도 문화연구회'에 가입한 덕분에 많이 배웠고 따라서 더 충실한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군내 명소나 마을 곳곳을 나름 열심히 발품을 팔았고 덕분에 까페에는 꽤 많은 관련 자료들이 탑재될 수 있었다. 마침 이 자료들이 ‘청도향교지’와 ‘청도 마을지’에 활용되고 또 ‘청도신문’에 연재되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의 여러 까페 등에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일련의 활동이 청도를 알리는데 조그마한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이렇게 발굴하여 내어놓을 수 있는 것도 많지만 더러는 청도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속에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일들도 있어 무척 아쉬웠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와 ‘죽바위’가 그러하다.
1.삼국유사
일연선사가 편찬한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큰 보배요, 자산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집필되고 편찬되었는가? 사실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사의 연보를 고려하면 청도에서 집필되고 편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도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청도는 이 주장들을 적극 수용하고 입증하여 청도의 귀한 자산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약 14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 용천사 입구 안내문 중 이러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일연선사께서 비슬산에 마지막 머문 곳이 용천사였다. ‘삼국유사’의 원고를 이곳 용천사에서 탈고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77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옮기어 그곳에서 삼국유사가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삼국유사’ 원고를 일연선사가 청도 용천사에서 탈고하고 그 이후 운문사에서 편찬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이는 근래, ‘삼국유사’에 대해 경북 군위군이 인각사가 ‘삼국유사’의 산실이라고 하면서 아예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 명명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사업도 벌이고 있는 것과 완전 배치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용천사 탈고, 운문사 편찬’ 설의 진위를 차치하더라도 군위의 ‘삼국유사 산실’ 설도 생각할 점이 있다. 일연선사가 군위 인각사에서 말년을 보내고 입적을 했으니 집필과 편찬을 했다고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머문 시기가 79세부터 입적을 한 84세까지이다. 한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자료를 말년까지 정리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거니와 고령이기도 하고 이때 효심이 많은 그가 노모상까지 당한 시기였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을 것 같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입 등 전란으로 민중들이 민족적 자긍심과 정신적 중심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을 때이다. 일연선사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껴 민중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많은 기록의 대부분은 현지답사를 통해 자료를 찾아 기록했다.
‘일연을묻는다, 현암사, 2006.’ 저자 고운기도 ‘삼국유사’는 ‘발로 뛰며 쓴 책’이라고 정의하면서 ‘삼국유사’의 미덕이라면 지은이의 발길이 애정 어리게 주어진 다음 치밀함과 정성이 배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라고 하면서 그 스스로도 책상에 앉아 읽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발로 뛰는 ‘삼국유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그 현장을 답사하고 ‘일연을 묻는다’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신라 중심의 불교문화가 많이 취급되어 있는데 이도 돌이켜보면 선사가 경상도 쪽, 그 중에도 비슬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많이 머물렀기에 역시 이쪽에 발길이 쉽게 갔을 것이다.
선사는 1206년(희종2) 장산군(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9세(1214, 고종1)에 해양 무량사에 취학하고 14세(1219, 고종6)에 정식으로 출가를 한다.(해양이라는 지역이 전라도 광주라고 알려져 있고 출가한 절이 설악산 진전사라고 알려져 있으나 다른 의견이 있다. 이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그 이후 22세(1227, 고종14) 부터 포산(지금의 달성과 청도 경계에 있는 비슬산)에 43세까지 머물며 수도생활을 한다. 그 뒤 44세(1249, 고종36)부터 남해 정림사 및 길상암에 머물다가 56세(1261, 원종 2)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했다가 59세(1264, 원종5)에 영일 오어사를 거쳐 다시 포산(비슬산)에 들어 인흥사에 주석했다.
그뒤 일연은 69세(1274, 원종15)에 용천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하나인 용천사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머물렀던 것 같다. 이 용천사를 끝으로 비슬산 시기를 마감하고 72세(1277, 충렬왕 3)에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된다. 그 뒤 76세(1281, 충렬왕 7)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경주 행재소로 갔다. 77세(1282, 충렬왕 8), 임금의 명에 의해 개성 광명사에 주석하게 되고 78세(1283, 충렬왕 9) 되던 해에 국존으로 책봉되었으나 그 해 곧 하산한다.(고운기는 3월에 책봉받고 가을에 하산, 하산 장소는 비문에 나타난 바, 舊山이라 표현된 고향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일연의 생애를 말하는 것 중에 고쳐야 할 것이 있다. 하산 하면서 바로 인각사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문은 여기까지 적어놓고 이듬해 어머니가 9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했다고 적고 있다. 인각사 행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니 79세(1284, 충렬왕 10),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인각사에 갔으며 84세(1289, 충렬왕 15)에 입적했다.
일연 선사의 연보를 살펴보건대 승려 생활 중 가장 많이 생활한 곳이 포산이다. 전반기 21년, 후반기 12년, 구도의 발걸음 중 거의 절반인 33년을 포산 즉 비슬산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어떤 이는 35년간 비슬산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이 산에 든 지 10년 만에 득도의 체험을 했으며 선불장에 나가서 장원급제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의 원고 중 많은 양이 포산에서 준비되었을 것이다. 실제 포산에 있을 때 답사하여 쓴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많다. 황룡사지에 관한 것도 그렇고 '삼국유사'의 피은(避隱) 편 '포산이성(包山二聖)조도 그 때 쓴 것이다.
그리고 포산의 아홉 성인을 소개하며 그 말미에 소중한 기록을 하나 붙였다. “일찍이 이 산에 거처하며 성인들을 찬미하는 시를 썼는데 이제 함께 붙여놓는다.”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한밤중
달빛 보며 자리 잡고 있으니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아 날도다
거적자리 누워도 단잠 들것이니
티끌세상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
홍진에 묶인 세상에는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다짐을 했다. 이 시는 서른 전후에 쓴 것으로 젊은 시절 삶의 방향을 말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삼국유사'는 포산에 있던 젊은 시절부터 집필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연을 묻는다’ 저자 고운기도 이를 보면서 ‘삼국유사’의 출발은 젊은 시절부터 듣고 본 것을 기록해둔 데서 출발했으며 본격적인 집필지는 운문사라고 했다.
그는 인각사 입구에 세운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란 안내판에 대해서 이런 진술을 했다. “그것이 관에서 세웠는지 인각사 측에서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 - 절의 유일한 자랑거리를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그러나 이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삼국유사’가 언제 어디에서 저술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까닭이다. 더욱이 인각사가 아닌 다른 절에서도 ‘삼국유사’ 저술의 장소임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이처럼 ‘인각사 저술설’에 대해 의문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반면 한편 다음과 같이 운문사 집필설을 피력했다.
“일연이 운문사 주석시절부터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했다는 것도 각별하다. 이미 인흥사에 있으면서 '역대 연표'를 만든 것이 '삼국유사' 기술의 시초라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비 작업이었다. 더욱이 이 연표는 일연이 운문사로 옮긴 이듬 해 곧 충렬왕 4년(1278)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준비는 인흥사에서 했지만 마무리는 운문사에 와 있을 때 한 셈이다. 이런 점이 일연의 운문사 주석시절 ‘삼국유사’ 편찬 개시를 뒷받침 해준다.”고 했다.
<삼국유사>의 원문 토씨 하나까지도 그 오류를 밝혀낼 만큼 삼국유사에 정통한 문경현(전 경북대 교수)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비슬산에서 잉태하여 운문사(雲門寺)에서 낳았다’고 주장했다.
정호완도 ‘삼국유사의 상상력, 지문당, 2013)을 통해서 이런 상상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삼국유사는 신라 서라벌의 얘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라유사’가 아니냐고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큰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좀 불만입니다.”
“삼국유사를 쓰겠다는 생각은 20대부터였소. 그래 인연 따라 이곳저곳 거처를 옮길 때마다 많은 곳을 답사하곤 했소. 이런 저런 유적과 유물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소. 그러나 내가 살아온 때는 이미 고구려와 백제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어언 600여 차례의 봄가을이 지나 자료도 많지 않았고 특히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는 그리 갈 일이 많지 않았소. 아쉬운 일이지요. 다음 기회에 보완하도록 할 것이요.”
이 이야기도 20대 포산 시절부터 집필이 시작되었고 역시 발로 뛰는 기록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신태영도 ‘원문과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 고전연구소, 2013’에서 집필지가 명확하지 않으나 젊을 때부터 자료를 수집해오다 운문사 시절 본격적인 저술을 하고 인각사에서 마무리한 것 같다고 했다.
김두진도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연구, 일조각, 2014)에서 23세부터 50여 년 간 장기간 자료 수집을 했다고 했으며 역시 끝 부분 완성은 운문사 시기로 봤다.
유홍준 등 '운문사 답사기(네이버 지식백과)'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에 떠날 때까지 운문사에 머물며 삼국유사의 집필에 힘을 쏟았다. 4비 가운데 행적비가 바로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불행스럽게 이 비기 전해지지 않는다.
위의 저서들에 나타난 주장들을 종합하면 젊은 시절부터 삼국유사를 준비해왔다는 점은 공히 인정한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운문사 주지시절, 즉 선사의 나이 72세(1277) 경 집필과 편찬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시기를 좀 더 늦게 보는 분도 있다. 앞의 신태영은 운문사에서 본격적인 저술을 했다면서도 인각사에서 마무리 한 것 같다고 했으며 리상호도 ‘사진과함께 읽는 삼국유사, 까치글방, 1999’에서 삼국유사를 쓴 연대는 정확히 밝힌 기록이 없으나 이 책의 내용 기사와 관련된 최종 연대가 고려 충렬왕 신사(1281년), 즉 저자의 76세에 해당한 부분이 있으며 저자는 84세에 사망하였으므로 이 책의 최종 탈고는 이 사이 7-8년간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했다.
앞에서 논의된 것처럼 ‘삼국유사’는 어느 한 곳이 아니고 선사의 젊은 시절부터 장기간 수집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모아 둔 원고들을 어느 시기에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집필하고 편찬했을까.
일연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포산 시절(1219 -1248) 둘째, 정림사, 길상사, 선월사 시절(1249-1263), 셋째, 영일 오어사, 인흥사, 용천사, 운문사, 인각사 시절(1264-1289)이다. 이 중에 첫째와 둘째 시기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시기의 초반부터 서서히 시작하여 중반부터는 평생 동안 준비한 자료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계산상으로 14- 15년 정도가 되지만 실제 정리를 할 수 있는 기간은 6-7년으로 압축된다. 그 6-7년 기간이 용천사와 운문사에 주석했을 때이다.
진상기(陳相基)는 ‘淸道 속으로, 2011.12.5. 도서출판 신원사’에서 ‘삼국유사’는 운문사에서 찬술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명성스님(전 운문사 주지며 현재 운문사 회주) 의 글을 소개했다. “<증보 삼국유사, 최남선 편>에 의거하건데, 삼국유사는 일연의 70세 이후로 京師(경사)로 被召(피소) 國尊(국존)에 冊封(책봉)되기까지 운문사에서 遺閒(유한)한 業績(업적)이요 그 중에서도 俗事(속사)의 部(부)인 王歷(왕력)과 紀異兩編(기이양편)은 아직 왕명이 있을 그 前期(전기)의 撰成(찬성)일까 하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울로 불려가서 국존이 되기까지 한가한 시간에 업적으로 이룬 것이 삼국유사라는 말이지요.”
<증보 삼국유사, 최남선 편>을 근거로한 명성 스님의 주장도 위의 기간과 일치한다. 76세(1281, 충렬왕 7) 때는 일본 원정군을 독려하기 위해 경주 행재소를 차린 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셔야했고 77세(1282, 충렬왕 8) 때, 환궁하는 왕을 개성까지 모시고 가야했다. 78세(1283, 충렬왕 9) 때 국존으로 책봉되었으나 곧 하산했으며 79세(1284, 충렬왕 10) 때 96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군위군 인각사로 갔다가 84세(1289, 충렬왕 15)로 입적한다. 아무튼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용천사와 운문사 시기 외에는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경황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용천사는 69세(1274, 원종15)에 주석했다. 이 때 이미 고희의 시기인지라 마지막 주석처로 생각하며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화엄 10찰의 면모를 갖추도록 중수하였다. 그리고 평생 심혈을 기울였던 원고들을 탈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중, 나라에서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운문사 주지로 불렀다. 이때 72세(1277, 충렬왕3)였으니 늦은 나이라 이제는 정말 마지막 주석이란 생각을 가지고 용천사에서 못다 한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하였을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용천사 안내문에서 밝힌 "용천사 탈고, 운문사 편찬"이란 말이 괜한 추정이 아니고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시를 써보았다
비슬산에는 일연선사께서 서른 세 해나
오르고 내리면서 새긴
땀에 젖은 발자국이 있습니다
선사님
삼국유사는 정녕 책상에 앉아서 쓴 것이 아니고
젊은 시절부터 방방곡곡 발로 뛰어 영혼을 담은 것이지요
앓고 닳아도 더 크고 깊던 쉼 없는 열정
몽고의 전란으로 방황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지친 자긍심을 위로하려는
애정 어린 발길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소리 아름다운 용천사 안내문이 하고픈 말이 있어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일연선사께서 비슬산에 마지막 머문 곳이 용천사였다. 삼국유사 원고를 이곳 용천사에서 탈고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77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옮겨 그곳에서 삼국유사가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용천사는 69세, 운문사는 72세
삶을 반추할 고희를 전후하여
마지막 주석처로 생각하고
한평생 간절한 인연으로 소망하던 원고에
마지막 붓을 드는 모습이 보입니다
드디어
삼국유사는 선사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고고한 함성을 울리며
잉태된 태를 청도 땅에 묻게 된 것 같습니다
이를 알리듯
신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이서국 말발굽 소리가 한 줄기 바람의 얼굴을 만들고
화랑정신을 일깨워준 원광법사의 엄숙한 목소리는
시공을 넘어 죽비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선사께서 쓴 발자국의 언어가
이어서 이어서 가슴의 문을 두드리는 시간
땀의 향기를 마중합니다
감사합니다.

용천사 안내문

용천사 대웅전

용천사 부도

운문사 대웅전

소나무

설경
2. 죽바위
‘죽바위’는 청도군 각남면 녹명리(구만리)에 있는 큰 바위이다. 그런데 이곳을 너무 무심하게 대접하는 것 같다. 아니 이것은 무심한 정도가 아니라 푸대접을 한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이 바위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이곳은 인근 학교 학생들의 필수적인 소풍장소였다. 소풍 철이 되면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냇가에는 마을 단위나 씨족, 계모임하는, 이른바 회초를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아마 인근의 60대 이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죽바위에 얽힌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지금은 죽바위 옆이나 뒤에 묘지를 조성한 문중 분들이 선대 산소를 찾기 위해 들리는 것 이외는 일부러 찾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곳에 죽바위를 소개하는 안내판도 하나 없다. 이것만 봐도 이 ‘죽바위’가 얼마나 소외되어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사실 이 바위는 그렇게 대접 받을 바위가 아니다. 충분히 자랑할 만한 명소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얼른 보면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전혀 올라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좌측 뒤편으로 가면 경사가 완만하여 쉽게 올라갈 길이 있다. 거기에다가 더 편하게 올라가라고 계단까지 대령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계단도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고 저절로 형성된 것이니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올라서면 학교 운동장만한 평평한 반석이 전개된다. 전국 어디에 내어놓아도 이처럼 넓은 바위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쪽 면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씩씩하게 자리 잡고 있다. 흙 한 줌이 없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인데도 어떻게 뿌리를 내려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어릴 때도 있었으니 정말 오랜 기간 잘 견뎌온 것이다. 그 동안 생명을 위협하는 한발이며 태풍 등 악조건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죽바위의 파수병인 양 꿋꿋이 지키고 있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생명의 신비 앞에 경외감을 느끼며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일송정(一松亭)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일송정을 볼 때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의 고사가 떠오른다. 중국 양나라 장승요가 용을 그려놓고 마지막으로 눈동자에 점을 찍으니 드디어 용이 힘차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지 않는가. 어쩌면 죽바위의 눈동자는 ‘일송정’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이 죽바위를 청도 땅에 선물할 때 마지막 마무리로 일송정을 내려 웅대한 모습을 완성시킨 것 같다.
그런데 이 나무도 빨리 보호수로 지정하여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잘 견뎠다고 해도 언제 더 나쁜 상황이 올지 모른다. 아무튼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죽바위’란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즉 왜 ‘죽바위’라고 했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서국이 멸망할 때 신라의 침공을 피해 이서국 군사들이 이곳에 숨어 죽을 먹으면서 견뎠다고 죽바위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군사가 구만명이나 되었기에 바위가 있는 곳의 동네 이름도 구만동이라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군사가 구만명이란 것은 과장일 수 있다. 작은 소국에서 그런 군사가 있을 리 없다. ‘많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일설에는 죽바위 밑의 굴이 창녕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정말 그런 굴이 있었다면 구만 명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것도 허황된 전설로만 치부하지 말고 탐사해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2) 이서국 군사들이 죽을 먹었던 것과는 다르게 또 다른 죽 이야기도 있다. 죽을 넓은 그릇에 담아 둬야 마을이 편하다는 속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죽암(粥岩)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거기에다가 바위의 색깔이 팥죽의 색깔이기도 하니 멀리서 보면 평평한 죽 그릇도 될 수 있었을 것 같다.
3) 그런데 어떤 스님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가 바위가 이렇게 잘 생겼으니 그 정기를 받아 장차 이 고장에 큰 장수가 태어날 것인데 장수가 어찌 죽을 먹고 힘을 쓰겠느냐고 하면서 대나무를 몇 그루를 심어주며 장차 대나무처럼 기개 높은 장수가 나타나기를 기원하며 죽암(竹岩)이라 부르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바위틈을 비집고 올라온 대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4) 또 이 바위의 생김새가 멀리서 보면 남자의 심벌을 닮았다는 것이다. 그 심벌을 비속적 한 음절로 하면 그렇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 조금 순화하여 ‘죽’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위 맞은 편 마을의 이름이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함박골’, ‘옥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그 근처 ‘조개 약물탕’도 있다.
5) 그리고 임진왜란과 얽힌 이야기도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들은 부산포를 짓밟고 한달음에 밀양을 거쳐 청도지역에 도착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적을 피해 죽바위가 있는 산에 올라갔다. 이 산은 사방이 한눈에 보이는 요충지였기에 일전을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성을 쌓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려고 대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왜적은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고 한다. 그 때 목숨을 건진 주민들이 죽바위 위에 집결하여 기쁨을 나누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구(救)했다고 앞마을 이름도 구만(救萬)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에는‘救’가 아니고‘九’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 많아 쉽게 납득하기 힘든 점도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성곽이 있다고 했는데 ‘두루미정’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구만은 ‘군막’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6) 아무튼 어느 시기이든 이 바위는 사람을 직접 살리거나 아니면 삶의 기쁨을 환호한 바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 숫자도 구만 명이나 된다. 비록 그것이 약간 과장되었다 해도 그에 버금가는 수많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결과는 우연하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처럼 죽을힘을 다해 단결하여 힘을 합친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는 ‘죽을힘을 다한 바위’란 뜻의 ‘죽바위’일 수도 있다.
이 전설들도 새롭게 조명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침 이곳은 옆에 큰 도로가 지나고 있어 접근성이 좋은 것도 큰 장점이다.
아득한 날 쫓기던 백척간두 그날에도
치마폭 크게 벌려 땀 닦아 다독이곤
젖물려 재워주시던 자애로운 가슴이여
세월의 갈피마다 하늘 되고 땅이 되어
문을 열고 기다리던 생명의 큰 둥지
일송정 푸른 기운이 구만리에 가득하다.
‘죽바위’란 제목으로 한 번 써본 글이다.
또 ‘죽바위 당신은’이란 제목으로 이런 시도 썼다.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열 사람이 오면 열 가지, 백 사람이 오면 백 가지
여름에 풀이 자라듯 불어나는 전설들
신라군에 쫓기던 이서국 군사들이 굴속에서 죽(粥)을 먹고 견뎠다고 죽바우라 카더라. 아니다. 임진왜란 때 고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 싸우려고 올라갔던 방구인기라. 죽을 넓은 그릇에 담아 둬야 마실이 편하다고 ‘죽암(粥岩)이라 했데이. 큰 스님 한 분이 바위의 정기를 받아 장수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며 대나무를 심어 죽(竹)바위라고 했다. 모르는 소리, 생김새가 바로 남근 형상 아니가. 그래서 궁합을 맞춘다고 맞은 편 동네 이름도 함박골, 옥산이라 한기라. 이런 말, 저런 말, 끝이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저 허허 웃으며 먼 산만 쳐다보시니
오늘도 얼굴 없는 전설들이
줄 없는 줄다리기를 합니다
파수병인 듯
바위 위에 우뚝 선
소나무 한 그루
이름하여 일송정입니다
지킬 수만 있다면 비바람이 대수냐
억척스럽게 뿌리 뻗어
눈을 부릅떴습니다.
푸른 기운이 구만리에 가득한 일송정은
하늘이 죽바위를 청도 고을에 선물할 때
마지막으로 그린 눈동자 같아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넓디 넓은 반석 위에 올라가면
시간이 슬금슬금 뒤로 돌아
소풍 온 까까머리 초등학생들이 올망졸망 까맣게 모여
보물찾기를 합니다
보물이 쏟아질 때마다 아이들은 도깨비 방망이라도 얻은 듯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담임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 따라 죽바위 가는 날은
전설의 나라를 만나는 행복한 날
추억을 한 아름씩 선물하던
죽바위 당신은 늘 안아주고 업어주는
우리들의 영원한 큰 바위 얼굴입니다.
우리는 ‘죽바위’의 이런 전설들을 잘 활용하여 스토리텔링을 한다면 좋은 이야깃거리와 볼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각 지자체에서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조그마한 근거라도 있으면 이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어쩌면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만드는 시대인데, 우리는 있는 것도 방치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얼마 전에 고령 개실 마을에 갔을 때 깜짝 놀랐다. 동리 앞산이 나비 모양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며 꽃과 연관하여 ‘개화실’, 다시 줄여 ‘개실’로 했다는 것. 그리고 이 마을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생전에 한 번도 다녀가지 않은 곳이다. 선생의 5대손 때 비로소 이 마을에 정착했는데 종갓집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발과 홍보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체험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아주 성공한 사례같다.
거제도 ‘바람의 언덕’도 그렇다. 물론 풍광이 좋은 곳이지만 영화 촬영지가 되면서 관광객이 물밀 듯 몰려들고 있다. 만일 ‘죽바위’도 바람의 언덕처럼 ‘풍차’도 만들고 영화 촬영이라도 유치하면 충분히 좋은 관광지가 될 것이다.
제주도의 ‘곶자왈’은 생태 숲이다. 이 죽바위도 ‘부처손’ 같은 특이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도 활용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곳이 참 많다.
아무튼 주변에 다른 볼거리도 만들고 바위 위에서 낙하하는 인공폭포의 장관도 연출하며 앞 시내도 정비하여 분수를 뿜어내고 고기떼들이 유유히 유영하는 살아있는 냇물로 만들어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죽바위’는 단순한 바윗덩이가 아닌 너무나 소중한 옥 같은 존재로 청도의 ‘큰 바위 얼굴’이란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바위 위

일송정

대나무와 소나무

원경

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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