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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탁영 묘소와 재실의 역할

탁영 묘소와 재실의 역할/ 행전 박영환

 

  2017년 4월 26일(수), 청도문화원, 우리문화바로알기 회원들이 청도군 이서면 수야2리 탁영 산소및 재실인 영모재를 찾았다.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선생 묘소 및 재실의 역할

 

                                                              박 영 환

 

1. 묘소

탁영선생의 묘소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태양산 기슭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소 뒤편에는 선생의 부친인 남계(南溪김맹(金孟) 선생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뒤편 좌측에 또 하나의 산소가 있는 것은 선대의 산소가 아니고 선생의 증손 도연정(道淵亭) 김치삼(金致三)묘소이다.

선생의 묘소는 처음부터 이곳에 모신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양주 석교원(1498)에 있다가 목천 작성산에 이장(1506)하였다가 그 뒤 150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역도로 몰리다보니 사후도 편안하게 잠들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택리지(擇里地) 자계(紫溪) 김해 김씨 편(金容洙 기록)에 의하면 先生 史事整理 하여 師門 弔義帝文 國史 하였다가 戊午禍 하였다. 東市 身棄 所居前川 流血 三日하여 紫溪라 하였다.”

 

2. 탁영 선생의 삶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조선 성종. 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1382~1456?)의 손자이며 집의를 지낸 김맹(金孟 1410~1483)의 아들이다. 어려서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478년 15 단양 우씨와 혼인하고, 선산의 이맹전을 찾아 배알하였으며 뒤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증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충남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및 청도 자계서원(紫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4. 가계

고조부 : 김항(金沆)

증조부 : 김서(金湑)

조부 : 김극일(金克一)

 : 김맹(金孟)

백형 : 김준손(金駿孫)

조카 : 김대유(金大有)

중형 : 김기손(金驥孫) - 조졸

부인 : 김미손(金尾孫, 예안김씨)의 딸

양자 : 김대장(金大壯) - 김준손의 아들

 : 김갱(金鏗)

 : 김장(金鏘)

 

 

5. 영모재(永慕齋)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757에 소재한다수야2리 뒤편 태양산 기슭배향인물의 묘소 바로 아래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1607년에 처음 지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하다가 2003년에 완전히 헐고 새로 중건하였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충현문(忠賢門)인 솟을 대문(출입문 및 수납공간2, )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집 영모재(대청 3온돌방 2)가 있다. ‘水也齋舍記’, ‘永慕齋 重修記’ 대청마루에 걸려 있으며 마당에는 崇善殿 參奉 慕溪 金公 紀績碑 永慕齋 重建碑가 있다자갈을 깔아놓은 마당에 후손들의 기념식수가 있다높은 석축담장의 동쪽에 있는 중문과 통하는 맞배 벽돌집 관리사가 있다대문 앞에 영모재 중건 헌성록’ 비가 있다.

이 재사는 김해인 남계(南溪김맹(金孟),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선생의 묘향을 위해 창건되었다남계선생은 절효 김극일선생의 아들이다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세종임금으로부터 성종 대 5대에 걸쳐 도총부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했으며 청덕 선정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교의가 깊었다. 74세로 졸하였으며 이조참판경연 춘추관사를 증직받았다준손기손일손 삼형제가 선생의 아들이다.

 

6. 재실의 역할

1)재실은 삼국시대의  시조묘(始祖廟)와 신궁제도(神宮制度)에서 발생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뒤 고려 말에 도입된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초기까지는 사찰 내 원당(願堂)형태로 제()와 묘()를 함께 관리하는 불교식 제례행위와 유교식 제축 행위가 혼재되었고, 이후 척불화(斥佛化)정책으로 인해 재실은 사찰에서 분리되어 사대부 묘 근처에 세워졌다가 주자가례(朱子家禮)가 정착된 조선중기이후 유교적 제축공간으로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 공간인 사당과 묘에서 지내는 묘사 공간인 재실로 각각 분리되었다.

2)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조상숭배사상이 생활전반을 지배하였으며, 유교적 생활윤리로써 예제의 강화를 가져왔고 재실은 주자가례의 실천적 공간으로 종가, 사당, 서원, 향교 등과 함께 유교문화의 큰 틀을 형성 하였다. 3)재실은 일 년에 12회씩 문중원이 모여 5(五代)이상 시조까지의 묘제를 수행하기 위한 제축공간으로 , 齋舍, 齋室이라 칭했으며, 왕실에서는 왕실의  를 준비하는 곳으로 齋室, 齋院, 齋宮이라 불렀다.

3)조영시기는 조선초기(1516세기) 중앙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던 경북 일부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중기(1719세기)이후에 충청도를 위시하여 전라도, 경남 등 타 지역에서도 활발히 건립되었다.

4)재실의 기능으로서는 시향제나 묘사의 준비 장소, 문중 공유 재산문제, 재실의 유지나 수축, 유사나 산직의 문제, 그리고 제례과정 전체평가 등을 논의하는 종회장소 참례자의 소지품보관, 식사 접대준비, 원거리참례자의 숙소 음복과 문중회의를 행하는 장소, 문묘  유생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런데 대체로 묘제기능이 전체의 66.0%로 재실의 원기능에 충실히 부합되었으며, 그 외 강학기능’ (21.4%), ‘사당’(5.0%), ‘생가’(3.8%), ‘사찰’(3.1%)등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경북, 충남, 전북은 묘제기능이 강한 반면, 경남, 충북, 전남 등은 재실기능이외에도 강학기능 등을 함께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5)재실의 내부공간은 특유의 기능을 담당하는 여러 공간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일반 주택의 기능과 공간을 비교해 볼 때 차이점이 많다. ():묘제를 지낼 때 주로 사용되는 공간으로 참제인(參祭人)들을 중심으로 문중회의, 제수(祭需) 점검 및 상차림도 하며, 비가 올 때 망제를 지내고, 묘제 후 참제인들이 음복하는 장소이다. 전사청(典祀廳):제사에 필요한 기구 및 제수를 보관하는 곳으로 유사방(有司房)으로 연결된다. 유사실(有司室):회계 및 기록, 제수 마련 및 점검, 제사절차 협의, 문중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방이다. 종주실(宗主室): 종손방이라고도 하며, 종손이 머무는 방이다. 참제인실: 묘제에 참석한 후손들이 머무는 방으로, 연령에 따라 방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수임방(受任房): 매년 묘제 때마다 교체되어 임명되는 제관 또는 헌관이 머무는 방이다. 전임실(前任室): 전임 유사로 제례에 밝은 연로한 후손이 머무는 방이다. 동서재(東西齋): 참제인이 머무는 방이다. 대청(大廳):제수를 장만하는 장소 또는 루의 기능을 보조하여 상차림과 음복 등이 행해진다. 부엌: 평상시에는 관리인의 취사용으로 이용되지만 묘제 시에는 제사음식을 장만하는 곳이다. 고방(庫房):제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는 문중의 토지에서 생산하는 수확물을 저장하는 곳으로, 제기의 보관도 한다7)평면유형은 경북지방은 강한 공간적 폐쇄성과 구심력을 지닌 口字型 배치가 나타났으며, 충청남도는 자형 의 비중이 높고, 그외 충북, 경남, 전라남북도 지역에서는 字型’, ‘字型 등 주로 개방적인 평면형태가 나타났다.

6)재실의 입지는 초기에는 산중에 위치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마을근처에 건립되었으며, 성리학적 규범이 엄격 하게 적용되던 경북지방은 마을과 격리되어 산중이나 마을후면부에 입지 비중이 높은 반면, 사회, 경제적, 기후적 요인 등으로 인해 성리학적 규범의 완화를 보이는 경남을 위시하여 개방적, 실천적 학문성향을 중시하던 기호학파의 충청도, 전라도지역에서는 마을중앙이나 주변 등 주거지와 인접하여 입지하는 경향이 높게 나타났다.

7)이상을 종합하면 재실은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형성되었으며 성리학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주자가례에 따른 실천기구로써 향촌 양반계층의 사상적, 학문적 성향과 경제력, 기후, 지역적의 차이에 따라 조영목적, 조영시기, 평면배치, 주거지와의 관계 등 입지특성의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과거의 재실은 시향제나 묘제의 준비 장소, 제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장소, 때에 따라 음복과 문중회의가 이루어지던 장소였지만, 현대에는 조상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고 묘직이 사라지면서 재실은 점차 소멸되고 있다.

 

7. 제사

유교적 가족 이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고려시대에는 집을 계승한다는 인식자체가 없었던 까닭에 재산과 제사 상속에서 장남이 독점 우위권을 가지지 않고 모든 자녀들이 공평하게 물려받는 자녀 균등 상속이 행해졌다. 조상 제사의 경우 주로 사찰에 위패를 안치해두었는데 이 때 소요되는 비용을 형제와 딸들이 교대로 전담했다. 이를 윤회봉사(輪回奉祀)라 한다. 이후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사찰에서의 제례를 전면 금지함에 따라 유교식 제사로 점차 바뀌었다.

퇴계가 활동했던 16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정착하지 않았던 관계로 조상 제사의 장자 단독 계승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1485(성종16)에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를 제사하고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하며 서인은 단지 부모만을 제사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주자가례에 입각하여 차등봉사를 철폐하고 4대봉제사를 해야 한다는 논의는 계속되었으나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다.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주자가례가 사대부층을 비롯하여 서민층에까지 널리 보급 정착함에 따라 차등봉사의 관행이 급속히 쇠퇴하였으며 이로써 신분에 상관없이 상례와 제례에서 4대 조상을 모시는 이른바 탈 신분적 제사 관행이 자리 잡게 되었다.

 

8. 청도의 재실

 

 

읍면

재실

서원

정자

사당

장판각

향교

정사

비고

청도읍

22

1

 

 

1

 

 

 

 

화양읍

14

 

3

1

1

 

1

 

 

각남면

19

1

 

 

2

 

 

 

 

풍각면

36

3

 

1

 

 

 

 

 

각북면

9

2

 

 

 

 

 

 

 

이서면

67

5

2

1

 

 

 

 

 

운문면

18

 

1

 

 

 

 

1

 

금천면

28

4

2

 

 

1

 

 

 

매전면

56

 

2

 

1

 

 

 

 

269

16

10

3

5

1

1

1

 

 

 

1)이서면과 매전면에 많은 재실이 있음

2)성씨별로는 밀성 박씨 64, 철성 이씨 48, 김해 김씨 20, 의흥 예씨 12의 순서임

그 외에도 경주이씨, 경주 최씨, 재령 이씨, 전주 이씨, 달성 서씨, 평택 임씨, 경주 김씨, 동래 정씨 등이 5곳 이상의 재실이 있음

3)청도에 68 성씨가 재실이 있음

4)재실은 일반적으로 목조와가에 팔작지붕이며 대체로 4칸과 5칸이다. 많은 재실이 중당 협실형이며 대청벽에 齋記 上樑文이 걸려 있고 전면에 솟을 대문(3), 하당, 재사 옆에 관리인 집이 있으며 재사 뒤에는 대나무를 심고 재사 주변은 토석담장을 둘렀다.

5)근래에는 국한문 혼용 齋記도 있으며 콘크리트 양옥 재실도 10곳 있음

6)2002년 이후에 없어진 재실이 6곳이며 1곳이 새로 생김

 

 

 

 

 

탁영 묘소 앞에서 

 

 

탁영 묘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영모재 재실 앞에서 재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후손들이 춘향제를 모시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2010년도)

 

 

눈이 온 겨울의 탁영 산소(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