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읍 원정리(2) 만석꾼집
2016년 11월 28일/ 행전 박영환

청도군 청도읍 원정 3길 7-12(원정리 802)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청도읍에서 국도 20호선을 따라 부야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 마을 앞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청도지역에 여러 거부들이 있었다. 각북 우산의 허 부자가 그렇고 이서면 수야리 박씨 가문에도 있었고 화양 백곡의 영천참봉도 만석꾼이었다. 그런데 그 집들은 이미 집터만 남아 있을 뿐 고을을 울리던 웅장한 건물을 없어졌다. 그런데 이 원정리 만석꾼집은 아직도 집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후손이 집을 지키고 있다.
이날, 종손인 박이수(朴貳洙 83세) 씨가 이곳저곳을 친절하게 안내하며 집의 내력이며 보관된 유물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아흔 아홉칸 집이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백 칸 건물은 지을 수 없었기에 이 집 역시 그 예에 따른 것이다. 1300평 넓은 대지의 높은 담장 가운데 세운 5칸 규모의 웅장한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중사랑, 우측에 대청이 있고 좌측 담장 앞에 하인들이 거처하는 집과 광, 그 옆 담쪽에 마구간 그리고 마당을 사이에 두고 중앙에 큰 연회장, 그 뒤에 7칸 규모의 안채가 자리 잡고 그 옆에 침모들이 거처하는 집이 있는 구조였다. 그 당시만 해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고 하인이며 머슴, 침모, 유모들이 있었으니 기거할 많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연회장, 하인들이 거처하던 집이며 광 등이 없어져 99칸 중에 60칸 정도가 남아 있다. 대신 소나무 등 정원수를 심어 조경을 했다.
건축연대를 짐작하게 하는 기왓장을 보여주었다. 지붕의 마루 끝을 장식했던 망기와의 앞면에 ‘同治 十三年 甲戌 五月, 工人 尹致瑞'라고 새겨져 있었다. 동치(同治)는 청나라 목종 동치제의 연호이며 그 시기가 1862년 - 1874년이다, 그런데 동치 13년이라면 동치 말년에 해당하니 1874년경이다. 이는 조선 고종의 재위 기간이 1863년 - 1907년이니 고종 12년 정도가 되니 약 140년 정도 된 집이다. 원래는 청도읍 무등리에 지었다가 그곳에서 30-40년 정도 지난 뒤에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한다. 옮겨서 집을 지을 때 일반적으로 헌 기와는 버리고 새기와를 쓰는 것을 고려할 때 목재는 170-180년 정도 된 집인 것 같다.
이 집안은 원래 신라 54대 경명왕의 8대군 중 한 분인 죽성대군(竹城大君)의 후예로 죽산 박씨이다. 이 집안이 이름을 떨친 것은 박이수님의 5대조인 박유붕(朴有鵬)공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유붕공은 박희태(朴熙泰,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공의 아들로 가선대부 전라우수군 절도사를 지낸 분이다.
이분은 관상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분의 장인이 중국에서 귀화한 두사충 장군인데 두 장군이 중국에서 나올 때 ‘풍수지리학’, ‘관상학’ 책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몰래 감추어 두고 비록 사위라 해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하루는 처가에 불을 질러놓고 책을 훔쳐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두사충 장군은 임진왜란 때 분이고 박유붕 공은 고종 때 사람이니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아마 두사춘 장군이 가지고 온 책을 그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박유붕 공에게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박유붕 공은 어렵게 구한 책을 열심히 익힌 결과 관상학 대가가 되었는데 한 번은 우연히 어린 이재황(뒤에 고종)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한눈에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용상에 오르실 귀한 몸이오니 옥체를 보전하십시오.” 아뢰니 깜짝 놀란 이재황이 아버지 이하응(뒤에 흥선대원군)에게 어떤 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말하자 박유붕을 당장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도 틀림없이 제왕이 될 상이라고 예언했다. 입단속을 시킨 이하응은 그 이후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권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양 술주정뱅이 생활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의 예언대로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흥선 대원군은 그를 책사로 삼아 곁에 두었다. 그리고 삼선교에서 돈암동에 이르는 10리 땅을 하사하기도 했다. 그처럼 대원군은 박유붕공을 신임했지만 한 가지만은 유독 고집을 부린 일이 있었다. 왕비 책봉 건이다. 박유붕 공은 대원군이 민비를 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반대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상하게 그것만은 박공의 말을 수용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했다. 당시로서는 민비 친정집 여건 등을 고려할 때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박유붕 공의 예견이 옳았다. 민비는 시아버지 대원군과 대척점에 섰고 마침내 대원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어느 날 권력을 잡은 민비가 박유붕 공에게 자기 관상도 한 번 봐달라고 했다. 그는 민비의 관상을 말할 수 없었다. 장차 칼에 맞아 시해될 운명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그는 인두를 달구어 한 쪽 눈을 찔러 버리고는 한 쪽 눈으로는 관상을 볼 수 없다고 했다. 그 뒤에 박유붕 공은 갑자기 죽었다. 물 먹인 백지를 얼굴에 붙여 숨을 틀어막아 자결했다고도 하고 또 일설에는 민비가 몰래 내린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무튼 공이 죽고 난 뒤, 흥선대원군에게 받은 땅도 몰수되었다고 한다.
박유붕 공은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 풍혁(酆赫)을 양아들로 삼았다. 박풍혁 공은 통훈대부 장진도호부사를 역임했다.
박풍혁 공의 아들 중에 장남 박병숙(朴炳叔) 공은 울산부사, 둘째 아들 박병익(朴炳翌) 공은 동래부사를 지냈다. 형제가 가끔 제사 등 집안일에 참여하기 위해 본가에 오게 되면 청도 군수가 급하게 인사를 오는 등 청도 땅이 떠들썩했다고 한다. 뒤에 병숙 공도 아들이 없자 동생 병익 공의 장남인 박영재(朴英在) 공이 큰 아버지 앞으로 입양되었다. 사실 영재 공은 호적상 이름보다는 아명인 규목(奎穆)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아무튼 이 분이 박이수 님의 할아버지로 만석지기를 일군 어른이다. 박영재 공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분이다.
박영재 공의 양아버지 병숙 공과 친아버지 병익 공의 재산이 2500석 정도 되었다. 두 분은 그 재산 중에서 700석 정도만 다른 아들에게 나누어 주고 약 1800석은 영재 공에게 물려주었다. 그 재산을 바탕으로 재산을 일구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동양척식회사를 차려 땅을 많이 사들였는데 그곳에 팔게 되면 일본인들이 소작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러나 박영재 공은 논을 사들여도 계속 소작을 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니 땅을 팔 형편이 되면 이왕이면 이 집에 팔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영재 공은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했다. 지금도 가난한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 처리했던 일화들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부모가 죽자 박영재 공의 산에 몰래 산소를 드렸는데 이를 안 갓지기가 이를 일러바쳤다. 그 때 박영재 공은 오히려 일러주는 사람을 핀잔하며 “너라도 그렇게 했을 것 아닌가!” 하면서 오히려 장례비까지 지원했다고 한다. 이런 마음으로 한결같이 살피니 주변에서는 인심 좋은 부잣집으로 각인되었다. 독립군 자금도 많이 내어놓았다. 한 번은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틱 안에 금을 넣어가지고 가다가 왜경의 검문에 걸렸다. 처음에는 금장사라고 우겼으나 끝내 만석꾼이란 신분이 탄로 나서 서대문 형무소에서 3개월 정도 형도 살았다.
그런데 박영재 공의 만석꾼 재산도 결정적인 변화를 수용해야하는 시기가 오고 말았다. 그게 이승만 정부가 단행한 이른바 ‘토지개혁’이다.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1950년 6.25 전쟁 직전에 단행된 토지개혁으로 그 많던 농토가 소작인들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박영재 공의 장남 박종환은 초대 청도군 국회의원이다. 박종환 의원은 일본 동경에 있는 중앙대 법과를 졸업하고 중앙청 재산을 관리하는 고시과장(현재 국장급)으로 있다가 토건업을 했으며 대연각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시 중앙청 물가행정처장(현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분과 경쟁을 한 결과 당선이 되었다. 박종환의 당선은 그 자신도 훌륭했지만 아버지 박영재 공의 후한 인심도 단단히 한 몫을 차지했다들 한다.
박종환 의원은 전진환, 조재천, 한통숙, 강병순 정치인들과 교유하며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정치인이었는데 불행히도 6.25 전쟁 중 북으로 납치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이고 아들 박이수 님은 16세였다. 박이수 님은 그 이후 아버지의 생사를 모른 채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보호아래 자랐다. 다행히 할아버지 영재 공은 80세까지 사셨고 어머니는 96세까지 사시다가 10년 전 돌아가셨다.
6.25가 발발하자 청도에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약 20만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피난민 중에 2천명 정도는 박이수 님의 집에서 생활했다. 큰 가마솥을 여러 개 걸어놓고 밥을 했다. 양식은 이 집에 부담한 것이 아니고 정부가 부담했지만 건물은 고스란히 피난민들에게 제공되었다. 그때 너무 많은 인원들이 북적대니 연회장 큰 건물이 내려앉는 소동이 벌어졌다. 원래 논 위에 복토를 하여 집을 지었기에 지반이 약한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니 건물이 하중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아직도 99칸 중에서 60칸 정도가 남아있는 것은 다행이나 남아 있는 건물 보존상태가 퍽 좋은 것이 아니다. 본채는 나름대로 관리가 되고 있으나 중사랑 및 대청 등은 기와가 헐어 비가 새기도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기에는 여건이 미흡한 점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유서가 깊고 귀한 유품들도 있는 집이니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집임에는 틀림없다. 관계기관에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연대를 알 수 있는 망기와






박이수씨가 촛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호패

전해오는 유품들



정면 양옥은 박이수씨가 새로 지어 거처하는 곳이다.



박유붕 전라우수군 절도사



대청

집의 웅장한 규모를 말해주는 대들보



중사랑


솟을 대문
2017년 10월 18일 경북 선비아카데미 회원들과 다시 찾았습니다.



각종 서류들


박이수씨가 설명을 하고 있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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