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리(鳳岐里)의 봉양서원과 호림재
행전 박영환
2017년 1월 2일(월), 봉양서원과 호림재를 방문하기 위해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에 들어섰다. 먼저 봉양서원부터 찾기로 하고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올렸는데 이상하게 맞지 않았다. 분명히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고 하는데 내려서 찾아보아도 서원은 없었다. 이리저리 살펴도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랐다. 산기슭이라 동리 사람도 없어 할 수 없이 마을로 내려왔다. 마침 경로당에서 나오시는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다행히 자기 집안 서원이라고 하면서 길을 알려주는데 말만 듣고는 찾아갈 자신이 없어 할머니께 차를 같이 타고 가자고 부탁하여 안내를 받았다.
농공단지 뒷길을 따라 가니 저수지 둑이 나왔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니 그제야 못 뒤편에 서원이 있었다. 그러니 초행길에는 누구의 안내가 아니고는 찾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서원 토담 뒤편에 무너진 곳이 있어 그곳으로 실례했다. 사실은 다른 재실도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았다. 되도록이면 재실의 유사를 찾아서 들어가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부득이 이렇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께 좀 들어가자고 하여 양해를 받기는 했는데 그런데 할머니는 많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혹시 잘못 데리고 왔다고 탓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안심하시라고 몇 번 말씀드려도 빨리 찍고 나오라고 독촉을 거듭했다. 어쩔 수없이 셔터를 빨리 누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봉기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봉기리는 현내면(縣內面) 현리동 일부와 흑석동 일부가 합쳐 이루어졌다. 부곡과 신촌, 높은 정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부곡(釜谷)은 현재의 봉기지(鳳岐池) 안쪽에 예전에 토기 가마가 있었던 곳이라서 부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촌은 새로 만들어진 마을로 들 한가운데에 형성된 마을이다. 높은 정은 풍각 시장이 개장하면서 급속하게 형성된 마을이며 풍각면 소재지인 송서리보다 높은 곳에 형성되었다 하여 높은 정[징이]이 되었다.
1685년에 밀양 도호부에서 대구부의 속현이 되면서 풍각현 유산역이 되었다가, 1896년 행정 구역 통폐합과 갑오경장으로 인해 역제가 폐지되면서 없어졌다.
비슬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을 따라 발원된 수월천이 봉기리 앞을 지나면서 부곡천이 된다. 마을 앞에는 병막산이 가로 막아 반월형을 이루고 있으며, 독뫼산이 마을의 뒷산이 된다. 마을 뒤쪽 옛 절터 앞에 빔비못이 있다.
봉기지[4부곡지, 봉기못] 아래 들을 절반 잘라서 조성된 청도 농공 단지는 청도 경제에 이바지 하고 있으며 외국인 근로자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으로는 지방도 902호선이 지나고, 봉기리 낚시산 뒷목과 현리리를 잇는 곳에는 야리 고개가 있어 각북면으로 이어진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13호인 청도 봉기리 삼층 석탑이 각북면과 풍각면을 연결하는 도로 옆에 있다. 풍각 우체국과 풍각 공용 버스 정류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병원과 의원, 약국이 밀집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음사들에는 성곡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이주한 성곡리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봉양서원 (鳳陽書院)
○ 관리문중 : 밀양변씨(密陽卞氏) 춘정공파(春亭公派)
○ 소재지 :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봉기1길 122-32 (봉기리 산25번지)
○ 건물구조
건축년도 : 1905년 중건 (초창시기 미상) 후 세 차례 중수
배치 : 봉양서원은 비슬산의 지맥인 봉비산(鳳飛山) 자락에 기대어 남향하고 있다. 봉기리(鳳岐里) 부곡지(釜谷池)를 따라 난 호젓한 오솔길을 걷다 하마비(下馬碑)에 이르러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문득 지세를 살펴보면 봉이 비상하는 형국에 외삼문을 경계로 전저후고(前低後高)한 경사지 전면에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서재를 두고, 후면에 내삼문인 경지문 (景止門)과 제향공간인 숭현사(崇賢祠)를 구성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다.
건축구조
강당 : 정면5칸 측면1.5칸, 5량가, 겹처마 팔작지붕
사당 (崇賢祠) : 정면3칸 측면3칸, 3량가, 겹처마 맞배지붕
동재 : 정면3칸 측면1칸, 3량가, 홑처마 맞배지붕
서재(釜凰齋) : 정면3칸 측면1칸, 3량가, 홑처마 팔작지붕
내삼문 (景止門) : 정면 3칸
외삼문 : 정면3칸 측면1칸, 3량가, 홑처마 맞배 솟을지붕(중앙), 우진각지붕(좌우)
○ 배향인물 : 봉양서원은 여말과 조선초에 활동한 대학자인 춘정 변계량과 춘당 변중량 형제를 배향하고 춘추향사를 올렸으나 지금은 매년 음력 3월 15일 춘계 향사를 지내고 있다.
1) 변계량(春亭 卞季良:1369~1430)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색,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개국 이념을 구현했던 관인문학가의 대표적 인물로 유·불·도에 모두 능하였다. 시관으로서도 공정을 기해 여말의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였고, 1419년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기해동정(己亥東征, 1419년)의 성공에 공헌하였다. 1420년(세종 2)집현전 대제학에 제수되어 20년간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였고, 1426년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화산별곡(華山別曲)」, 「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 건국을 찬양하였으며, 저서로는 「춘정집(春亭集)」3권 5책이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여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하여 후기 정조대에 이르기까지 칭송을 받았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춘정(春亭)은 고려의 관직(官職)으로 혁명기의 갈등을 이겨내고 새 왕조에 정착하여 20여 년의 문형(文衡)에서 관학(官學)교육의 기틀을 다지는 한편, 주자보전(鑄字寶典)의 간행을 장려하고 고려사개수(高麗史改修), 실록편찬(實錄編纂:太祖, 太宗) 등에 공헌하였으며, 사대교린(事大交隣) 외교문서, 문한(文翰), 대소 사명(辭命), 예락규범(禮樂規範) 등 왕조의 문물(文物)과 당시 유명무실하던 집현전 옛 기구를 재정비하여 인재육성을 장려하였다. 생애 대부분을 요직에 몸담았어도 늘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이어가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민본(民本)사상과 민족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일깨워 세종조의 과학 문화 창달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큰 기초를 닦게 하였다.
2) 변중량(春堂 卞仲良:1345~1398)
고려말기의 학자였던 변옥란의 아들로, 조선 초기의 문형이었던 변계량의 형이다.
1365(공민14)에 문과급제(文科及第) 후 부친의 후광과 실력자 집안(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사위로서 순탄한 관직(官職)을 수행하며 밀직사좌승지(密直司左丞旨:정3품) 당상관(堂上官)까지 올랐다. 명(明)의 건국 이후 고려에 대해 압박할 때 견제외교를 주장하며 고려를 지키는데 앞장섰으며, 정권과 병권을 분리할 것을 주창하여 고려의 안정을 도모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이성계에게 충의(忠義)를 지키는 등 변계량과 함께 혼란의 시기에 개인의 사욕을 배제하고 거시적 안목으로 나라를 지키려 하였으나, 왕조교체(王朝交替) 격변기를 맞아 운신(運身)의 제약이 따랐다.
수구(守舊)세력의 지주인 정몽주(鄭夢周)편에 서서 개혁(改革派:易姓革命)의 계략(計略)을 스승인 정문충공(鄭文忠公)에 밀고(密告)한 정황이 상대(개혁파)에 감지되어 그 해(1392. 4월) 1차 유배지(流配地)인 경상도 동해안[영해(寧海)]으로 내려가 3년의 귀양살이를 치렀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정치 상황에 묻혀 선고(先考)의 상(喪)도 치르지 못하고 그 해 봄(1395). 다시 2차 유배지(流配地)인 철관성(鐵關城) 북쪽 함경도 선주(宣州)고을로 올라갔다. 그리고 4년 째 되던 1398(태조 7)년 봄에 풀려나서 귀향했으나 그 해 8월 이방원(李芳遠)의 왕자의 난(王子亂) 때 정도전(鄭道傳) 일파(一派)로 몰려 참화(慘禍)를 당하니 향년(享年) 54세였다.
○ 연혁 : 봉양서원은 변계량의 유훈을 이어받기 위해 서당으로 건립되었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05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현 위치의 봉양서당을 중건하여 서원으로 승격하고, 거창 병암서원에 있던 변계량·중량의 위패를 옮겨 배향하였다. 이후 약 세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묘소는 현재 황해도 장단군 임강현 구화리에 있으며, 지금의 봉양서원은 춘정 변계량과 춘당 변중량을 배향한 우리나라의 유일한 서원으로 그 인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헌성 기적비





문숙공 춘정 변선생 숭모비

사당 - 숭현사

<부곡지>
봉양서원에서 나와 호림재를 찾았다. 그런데 역시 문이 잠겨 있었다. 혹시 이곳도 어디 틈새가 없는가 살펴보아도 들어갈 곳이 없었다. 동리 사람에게 물으니 동리 뒤편에 가면 하우스에 미나리 농사를 하는 분이 있으니 물어보라고 하여 찾아가 만났다. 그분이 바로 호림재 재실에 배향된 선조의 9대 종손인 김재곤씨였다.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며 안내를 해주어 고마웠다.

호림재

호림재(虎林齋)
청도군 풍각면 봉기리 425번지, 마을 중앙에 남향으로 잡고 있다. 1925년에 건립했으며 2009년에 크게 중수했다. 대문(출입문 및 방1, 수납공간1)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재사(방3, 마루1)가 있으며 재사 보호를 위해 정면 툇마루에 유리창을 달았고 대청 벽에 '호림재기' 등이 걸려 있다. 하당(방2, 부엌1)은 동쪽에 배치했고 주변에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서쪽에 중문이 있다.
이 재사는 김해 김씨 문중 후손들이 모여 조상의 유덕을 추모하며 시제를 올리고 문중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김해 김씨도 이 마을에 집성으로 세거하고 있다.


<재실 앞 모습>
*참고자료
ㅇ청도문화(청도문화원,2001)
ㅇ청도군지(1991, 청도군)
ㅇ도주지(1958, 김석봉 편)
ㅇ디지털 청도문화대전
ㅇ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
*면담
ㅇ밀양변씨 문중 후손 , 김해김씨 후손
'청도가 좋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도읍 원정리(3) 석동서원과 모선재 (3) | 2022.11.28 |
|---|---|
| 청도읍 원정리(2) 만석꾼집 (1) | 2022.11.28 |
| 꽃잎처럼 아름다운 꽃밭등, 청도 풍각 화산리 (0) | 2022.11.28 |
| 120년의 전통, 풍각제일교회 (1) | 2022.11.28 |
| 팔조령 해돋이 (0) | 2022.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