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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학남서원

     학남서원'鶴南書院 / 행전 박영환

 

  2016년 7월 20일,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소재 학남서원을 찾았다. 이곳에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경주 최씨 입청도 선조인 경산 최여준 선생을 모시는 곳이었으나 1997년 일곡(일명 낮실) 경주 최씨 문중에서 향내 유림들의 협력을 얻어 학남서원을 건립한 후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경북 유형문화재  제 166호)을 봉안하여 모시고 있다.

  문창후 고운 선생의 영정은 원래 가야산 해인사에 있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항일 해방운동을 하던 일곡 출신 금운 최한룡 의병장이 일경에 쫓겨 해인사에 숨어 있던 중 우연히 고운 선생의 영정을 발견하고는 당시 해인사 주지(藥雲스님)에게 우리 조상의 영정이니 우리가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 했다. 그 뒤 주지스님이 소집한 방장회에서 허락하여, 이곳으로 옮겨와 봉안하고 있으며 그 이후 내내 향사를 받들고 있다.

 

 

 

 

학남서원(鶴南書院)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뒤편 산기슭 183번지에 소재하며 남향이다. 1977년에 건축했고 부속 건물인 경산재는 2002년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옹벽을 쌓고 지반을 다듬어 복원 신축하였으며 그때 충효각도 새로 개축하였다. ‘

  3칸 규모의 솟을대문(출입문, 1, 수납공간1, 仰遠門)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와가 정면5, 측면 1칸인 강당( 2, 대청 3)이 높은 축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방문 앞에는 별도의 유리문을 달았으며 학남서원 상량문’, ‘경산공 입청도 택리거시조 은덕 감회’, ‘학남서원기가 대청 벽에 붙어 있다. 3칸 규모 경산재( 3)는 우측 축대 아래에 있으며, 하당( 2, 마루 2)는 서쪽에 배치되어 있다. 좌측 경사진 언덕 위에 고운 영정을 모신 계동사(啓東祠)가 별도의 토석담 영역 속에 있는데 내삼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다.

  이 서원은 문창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을 향사하고 있는 곳이다. 선생은 신라 시대 대문호로 동양 삼국을 풍미한 학자이다. ‘계원필경  20여 권과 사육집(四六集)등이 당사에 남아 있고 고대 일본 천재시구(千載詩句)에도 있다.

  원래 이곳은 경주 최씨 입청도 선조인 경산 최여준 선생을 모시는 곳이었으나 최씨 문중의 공의와 향내 유림의 협찬으로 서원을 건립하면서 최치원 선생의 영정(경북 유형문화재 제166)를 봉안하고 있다. 영정은 원래 해인사에 있었으나 후손 최한룡 의병장이 해인사 방장회에서 허락을 얻어 이곳에 모셔 온 것이다.

  서원 강당 옆 충효각에는 가선대부 판의금 부사 경산 최공지 충효비가 있다. 최여준 선생은 임진왜란 시 노모를 안전하게 피신시켰으며 의병을 일으켜 많은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1626(인조 4)에 충효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에 증직되었으며 충효각에 비를 세워 향사하고 있다. 대문 앞에는 경산 최여준 선생 사적비’ ‘고운영정 안내판이 있다.     

 

 

 

 

 

 

 

 

 

 

 

 

 

 

 

 

영정이 봉안된 계동사(啓東祠)

 

 

<고운 영정>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갔다고 하고, 민담에서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도 한다. 908년까지 생존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선생의 저서인 계원필경(桂宛筆耕) 20권과 사육집(四六集)등이 당사(唐史)에 남아 있고 고대 일본의 천재시구(千載詩句)에도 선생의 글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경산 최여준 선생은 1556년 대구에서 출생했으며 2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최정산에 들어갔다가 거기에서 손처눌 의병장을 만나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뒷날 의병장 박경신 선생과 합세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 이후 낮실(일곡)에 정착했으며 부인은 아산 장씨이다.  나라에서 충효를 인정하여 효자 정려를 내리고 동문 교관과 판의금부사의 관직을 추증하였다. 후손 중에 7세 손 최학승이 대사간과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경산 최여준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효각(忠孝閣)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이 학남서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새로 조성된 경산재와 최씨들의 집성촌인 일곡마을이 보인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군내 굴지의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이다. 남산을 비봉(飛鳳)에 비유한다면 좌족(左足)에 해당되는 봉우리가 무학산이며 그 청려한 무학산의 품에 마을이 안겨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남산 봉우리의 조광이 서서히 봉우리 아래로 내려 비치게 되는데 그 때 마을 전체가 아름답고 청초하기가 비길 데가 없다. 그래서 '낮실'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日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보완공사 중

  대대적인 보완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 년 전에 올 때는 서원에 들어가는 진입로도 매우 좁았으나 지금은 우회하여 넓은 길을 만들었다.

 

 

 

일곡 마을 입구  - 벽화가 정겹다

각남면 화리와 같은 계곡에 있어 동네 경계의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이다.

일곡리에 오면 재종조모인 일곡할매가 생각이 난다. 백수를 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에 오면 뭔가 건강의 기운을 듬뿍 받아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곡리(日谷里)란 법정명이 있지만 오히려 ‘낮실’이란 이름으로 더 불려지는 마을이다. 사실 ‘낮실’을 한자로 표기하면 ‘일곡(日谷)’이 되는 것이다. 마을이 동향이라 아침 첫 햇살에 온 마을이 햇빛을 받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곡리는 이서국의 한 부분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경산(耕山) 최여준(崔汝峻)은 임진왜란 때 대구의 선비였던 손처눌(孫處訥)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청도 의병 박경신 등과 합세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최여준은 일곡리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 자손들이 경주 최씨 집성촌을 이루어 많이 살고 있다. 

 

충효의 단심을 말해주듯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서원 정문

 

 

 

 

 

 

항일 애국지사 금운 최한룡 의병장 기적비

 

   금운 최한룡(1849 - 1917)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1906년 삼남의진에 참여하였다. 그는 '대한매일신보'와 최익현의 격문을 읽고 의병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07년부터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을 발표하여 국민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1907년 7월 대원 70여 명으로 창의하여 청도, 영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1909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합천 해인사와 밀양에 거주하던 사위 박재하의 집에 피신하였으며 그곳에서 신병도 치료했다. 해인사에서 고운의 영정을 옮겨온 것은 큰 업적으로 기록된다.

  금운의 후손들도 독립운동의 후예라 고향에 살 수 없어 1909년 화양면 고평동으로 이사를 했다가 1912년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최한룡이 세상을 떠난 뒤 1921년 귀국하여 경산군 안심면에 정착하였다.

  최한룡에 대한 기록은 청도군내 쟈료에는 없다. 청도 내에 자료가 남아있지 않는 것은 당시 군수였던 친척 모씨에 의해 호적과 족보가 제적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최한룡에 대한 자료는 자칫 묻힐 뻔했는데 마침 항일 의병활동을 연구하던 대경대학 권대웅 교수가 일본인들의 관보와 만주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 신문에 난 것을 추적하여 밝혀냈으며 2007년 권 교수의 추천에 의해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다.

 

  숨어 있던 자료를 발굴하고 강력하게 추천하여 금운에게 '건국포장'이 추서되게 했으니 권 교수가 참 큰 일을 했다.   금운 최한룡 의병장님 이제 편히 쉬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운 최한룡 의병장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공덕비

 

 일곡 마을에 두 개의 공덕비가 있다. 하나는 최형묵님의 공덕비이고 하나는 최진민님의 공덕비이다.  원곡 최형묵 님은 돌아가시면서 많은 돈을 향리에 희사하셨고, 최진민님은 마을의 숙원 사업인 식수난 해결을 위해 지하수를 개발 비용을 희사한 공로이다.  

  일곡의 경주 최씨 가문은  조상의 충효정신을 이어받아 애향, 애족정신이 강한 것 같다. 낮실이란 이름 그대로 늘 따뜻한 햇살이 가득하기를 빈다.

 

 

측면에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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