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피는 꽃도 있다
행전 박영환
지난 봄, 고향, 청도군에서 개설한 농민사관학교, 제9기 청도반시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안 주변 지인들 중에서 격려를 하기도 했지만 더러는 이제 교직에서 퇴직을 하여 쉴 나이에 새삼, 어려운 농사 공부를 하려 하느냐고 걱정을 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이 과정은 지원자도 많아 시험이란 관문이 기다리고 있는 터였다. 시험도 부담이 되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중학교 이후 도시에서만 생활하여 농업에는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청도반시 재배 및 농업 일반 상식'을 테스트하겠다는데 통과할 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 그리고 이 과정은 미래의 농업, 농촌 발전을 선도할 경영 능력 및 리더십을 갖춘 전문 농업인 CEO 양성으로 농가 소득에 기여를 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인데 내가 부합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이 들은 내가 자리를 차지하기 보다는 더 젊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등등 많은 생각이 겹쳐 꽤 망설여 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접지 않고 용기를 낸 데는 아마도 ‘새농민’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도 한 몫을 한 것 같다. 참 오래전 이야기지만 중학교 때 나는 ‘새농민’이 되려고 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부모님께서는 농민보다는 다른 그 무엇을 바라며 대구의 중학교에 보내셨는데도 나는 그 무엇보다는 농촌으로 돌아갈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농업선생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이시기도 했던 선생님은 수업을 하시면서 교과서 중심의 지식 전달보다는 주로 선진농업국가를 소개하는데 시간을 많이 할애하셨다. 특히 일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악조건 속에서도 유축 농업국가로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선 덴마크의 농업협동조합 및 앞서가는 농업 과정을 소상하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이 나라도 처음부터 잘 사는 나라가 아니고 이엠 달가스와 그룬트 비 목사란 선각자가 있어 전쟁에 지고난 뒤 실의에 젖은 국민들에게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고 강조하며 이끈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도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여러분들이 바로 이엠 달가스와 그룬트 비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학교 내에 농업 협동조합을 만들고, 학교 언덕에 젖소를 키우며 그 젖소 우리 앞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직접 기거하셨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토끼 기르기를 장려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1인 1토끼 기르기 운동’이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은 마침내 교사직까지 그만두시고 그야말로 ‘새농민’이 되어 직접 농촌에 뛰어 들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젖소 목장을 만들고 트럭을 구입하여 생산한 우유를 도시에 직거래 하였으며 초가집 대신에 기와집을 만들고 전기도 자체 발전을 하였다.
선생님의 이런 선각자적 모습에 매료된 나는 일찌감치 선생님처럼 농촌에 들어가 새로운 농촌을 선도하는 ‘새농민’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일기에는 선생님의 말씀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다 적었으며 이상적인 농촌상을 설계하였다. 그 중에는 지금도 이루기 힘든 환상적인 내용도 있다.
그 당시 날씨에 무척 관심을 가졌는데 이도 농업에 종사하기 위한 나름대로 준비과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농업과 일기는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즈음 일기예보가 빗나가는 수가 많아 무척 답답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날씨 관측이다. 지금 생각해도 황당한 이야기지만 기상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하늘만 척 보면 직감에 의해 바로 일기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구름이 남쪽에서 형성되면 바람이 어떻게 불고 비가 얼마만큼 오고 어떤 구름이 자주 보이면 가뭄이 계속 된다는 둥 하는 것들이다. 아무튼 기상상태를 잘 관찰하였다가 일기장에 그림과 함께 옮겨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려면 자연, 수업 시간에도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선생님들께 들켜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본다고 꾸중을 들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다지던 ‘새농민’이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점차 진로가 바뀌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는 농촌으로 가지 않고 교사가 되어 교단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 때 내 나름대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곡식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에 자라는 것과 같이 학생들 역시 선생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지 않는가. 비록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 대신 사람을 키우는 농사는 잘 짓겠다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어언 40 여년,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교단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퇴임을 하고 난 뒤에는 곧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뇌리 어딘가에 농촌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 고향에 부모님께서 가꾸시던 감나무가 좀 있어 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제 ‘새농민’으로 앞장을 설 수는 없더라도 그냥그냥 따라가는 농민이라도 되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어려울 것이 예상되었지만 일변 적당하게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지으면 될 것이란 막연한 생각을 했는데 실제 시작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몸에 익지 않는 일들이라 힘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다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전정, 제초, 병충해 방제, 거름내기, 수확, 저장, 판로…. 어느 것 하나 쉽게 해결이 되지 않아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청도군 농민사관학교에서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문을 두드리게 되었는데 다행히 입학 허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나이 들어 배우고 이를 현장에 접목하는 것, 모든 것이 마음만큼 쉽게 따라주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교육 본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많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꽃은 봄에만 피지 않는다. 겨울에 피는 꽃도 분명히 있다. 그 꽃이 더한 향기가 있을 수 있다.” 요즈음 이 말을 열심히 뇌고 있다.
아무튼 나이가 들어서 시작한 청도군 농민사관학교, 50여 년 전, 중학교 시절처럼 마음이 설렌다. 나는 수업 내용을 일일이 사진을 찍는 등 스크랩하여 내가 운영하는 ‘청도문학신문’ 인터넷 까페에 탑재하고 있는데 자료들이 쌓이는 것을 보며 보물을 얻는 것 같아 무척 즐겁다. '꿈은 이루어진다' 이 말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지…. 해당된다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