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야 못
박영환
고향 마을은 시내나 강이 없는 마을이기에 우리들은 주로 못에서 여름을 보냈다. 지금도 눈을 감
고 있으면 또래들의 멱 감던 물소리가 귓전에서 풍덩풍덩하고 들린다. 까만 아이들의 개구쟁이 물
장구에 금방 옷을 적실 것 같다.
그 때 가당찮은 내기를 많이 했다. 몇 길이나 되는 깊은 곳인데도 건너편 돌무더기 섬까지 먼저 가기를 했던 것이다. 사탕 한 알에 목숨을 건 내기였다. 힘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맞았지만, 그래서 소문이 퍼져 부모님께 혼이 나기도 했지만 이튿날은 또 물속에 뛰어들고 있었다. 겁이 없는 것인지 바보인지.
소를 물속에 밀어 넣고 등위에서 놀았다. 소는 부력이 있어 특별히 동작을 하지 않아도 물에 잘 떴다. 소등에 매달려 신나게 깔깔대다가 물속에 첨벙첨벙 뛰어 들었다. 소는 참 순해서 아이들이 하는 대로 등을 빌려주었다.
해거름이 되면 소싸움을 붙였다. 처음에는 자기 소 자랑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은 한 판 겨루는 것으로 번졌다.
“그라마 한 판 붙여 보자.”
“좋다, 지는 놈은 소꼴 한 망태 주기다.”
소도 참 어리석다. 주인이 고삐를 풀어주면 피하지 않고 왕방울 눈을 붉혔다. 별 감정이 없다가도 상대편이 눈을 홀기면 자존심이 상해 갑자기 열이 팍 올랐다. 몇 번 땅을 파면서 워밍업을 하고 나면 본격적인 뿔치기며 밀치기를 시도했다.
“우리 소 이긴다.”
“우리 소 잘 한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 녀석이 죽어야 물러나겠다는 듯이 밀치고 찍고 목을 감았다. 철천지원수라도 그런 원수가 없었다.
싸움을 할 때는 신이 났지만 끝난 뒤가 늘 문제였다. 해비 급의 혈전인지라 몸에 성할 데가 없었다. 상처 난 자리에 소똥을 발라 날이 어둑해지기를 기다려 몰래 외양간에 몰고 오지만 할아버지께서 금방 알아보고 크게 꾸중을 하셨다.
“소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니는 중핵교 못 갈줄 알아래이”
시골에서 소는 큰 재산이기에 실제 소가 잘못되는 날 중학교에 못 갈수도 있었다. 눈물 뚝뚝 흘리며 다시는 싸움 붙이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다음날 다시 슬슬 비위를 건드리면 또 참지 못했다. 한 번은 소가 네발을 높이 들고 눈동자가 돌아가는 통에 하늘이 노랗게 된 적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강태공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가물치나 메기도 잡히지만 주로 붕어가 올라왔다. 그런데 고향 마을 사람들은 붕어를 ‘송애’라 했다. ‘송애’, 나는 한동안 ‘송애’는 송어의 사투리쯤으로 생각하고 붕어를 송어라고 생각했다. 붕어와 송어가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은 한 참 뒤의 일이다. 붕어보다는 송어가 고급 종류이다. 정말로 송어가 잡혔으면 좋겠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강태공은 산동할아버지와 전쟁 때 피난 와서 마을에 정착한 강 씨였다. 두 분은 거의 못에 사셨다. 산동 할아버지는 삿갓 하나로 뜨거운 햇살을 가리고 줄담배를 피우며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강 씨는 삿갓도 없이 웃통도 벗고 새까맣게 탄 피부를 그대로 노출시켜 낚싯대를 담갔다가 건졌다가 했다.
두 분이 낚시 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만 해도 참 즐거웠다. 세상에 가장 할 일 없는 사람이 낚시하는 것 구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한 번씩 직접 낚시를 하기도 했다. 산동할아버지는 근처에서 서투른 솜씨로 풍덩거리면 고기 도망간다고 옆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했다. 못 구석에 가서 밑밥을 뿌리고 지렁이를 꿰어 침을 퉤퉤 하면서
“눈까리 시커먼 것 하나 올라오너라.”
크게 주문을 했다. 좀체 눈이 시커먼 큰 놈은 올라오지 않았다. 한 번은 고기는 잡지 못하고 못가에 벗어둔 신발만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통에 맨발로 집까지 걸어온 적이 있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었다. 설날 귀일 마을에 있는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갈 때 가로 질러갔다. 얼음 깨지는 소리가 끙 하면 기겁을 하여 도망을 가기도 했지만 다시 뛰어들었다. 앉은뱅이 스케이트로 얼음을 지치기도 했다.
못에 빠져 죽은 사람도 많다. 삼촌과 멱을 감다가 죽은 아이도 있고 내기를 걸고 돌무더기 섬으로 가다가 죽은 아이도 있고 술 먹고 헛디뎌 죽은 사람도 있으며 남편의 구박에 뛰어 들어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 밤이 되면 그 영혼들이 모두 못가에 나와서 같이 갈 친구들을 찾는 다는 소문도 있어 무서운 곳으로 변했다.
수야 못은 우리 작은 할아버님의 정성이 배어 있는 곳이다. 돌무더기 섬에 아담한 정자를 짓는 것이 당신이 큰 소망이었다. 당신의 말씀인즉 못이 되기 전 그 주변은 나의 증조부님 즉 당신의 아버님께서 농사를 짓던 땅이기에 그곳에 정자를 짓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별로 넉넉하지 않는 살림살이에 거액의 돈이 들어가야 하는 정자를 짓겠다고 하셨으니 크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 당시 작은 할아버지의 형편으로는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집념을 가지고 일을 계속하셨다. 손수 하시다가 때로는 돈을 주고 놉을 들여 돌을 모으기도 했다. 나도 동생과함께 작은 할아버지의 일을 거들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시니 처음에는 비가 조금만 와도 수위가 높아져 물에 잠기는 아주 조그마한 돌무더기였지만 마침내 비가와도 물에 잠기지 않는 제법 큰 돌무더기 섬이 되었다. 그러나 정자를 짓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그리고 또 못을 관리하는 수리조합에서 반대를 하게 되니 중도에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못내 아쉬워하며 그 섬에다가 수양버들을 심으셨는데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큰 거목이 되어 낚시꾼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다.
이제 산동할아버지며 작은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다. 어느덧 내가 벌써 당신들의 나이가 되고 말았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멱을 감고 물장구를 치고 싶다.
석양 무렵 산 그림자도 놀러오고 흰 구름도 잠시 틈을 내어 인사를 하고 가지만 떠난 얼굴들은 보이지 않는다.
(2013, 경북문단 제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