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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처럼

 아버지처럼

 

 

                                                 행전      박영환

 

 

 

  중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효도’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그날이 마침 ‘어버이날’ 이틀 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다. 그 때 한 친구가 자식들 너무 믿지 말라며 자식에게 당한 어떤 분의 이야기를 했다.    

  그 어떤 분은 직장을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을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자로 생활했다. 그런데 한 번은 그분의 의사 아들이 찾아와서 은행에 맡기면 이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이율을 말하며 얼마가 된다고 하자 그 아들이 부탁했다.

  “아버지, 사실은 제가 이번에 병원을 새로 신축하려고 하는데 제게 그 돈을 변통해주시면 그 이자보다 더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 잠시 생각을 했지만 아들이 병원을 새로 짓는다고 하는데, 거기에다가 은행보다 이자도 더 준다고 하는데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마침내 은행에 있는 돈을 모두 인출하여 주었는데, 돈을 받아간 아들, 처음에는 은행 이자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부쳐왔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돈을 보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조금 기다리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비야, 혹시 잊어버렸니, 돈이 오지 않더구나.”

  “아, 그래요, 집사람이 깜빡한 모양입니다. 곧 드리겠습니다.”

  그 뒤, 몇 달간은 잘 들어왔는데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자 또 돈이 중단되었다. 다시 아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돈 대신 며느리가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아버님,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지금 자식은 병원을 짓고 의료기를 새로 사들이고 또 아이들 공부시키느라 빚을 잔뜩 지고 있는데 부모님이 되어 자식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돈 독촉이나 하고 계시니 너무 심하십니다.”

  눈물까지 펑펑 쏟았다. 생각지 못한 일격에 어안이 벙벙한 부모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이후 돈은 한 푼도 오지 않았다. 수중에 있는 돈을 몽땅 다 내놓은 부모는 당장 생활비가 없어 쩔쩔매게 되었으며 친목회 등 각종 모임에도 회비가 겁이나 참석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사정이지만 자식의 일이라 남에게 말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고약한 작자이군. 병을 고치라고 의사 시켰더니 부모 병을 만들게 생겼구먼.”

  “죽을 때까지 재산은 꼭 쥐고 있어야지, 넘겨주는 순간 고생길로 접어드는 거여”   

  “옳은 말이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 감”

  이 때 한 친구가 웃으면서 의미 있는 농담을 했다.

  “재산은 다 가지고 있으면 맞아 주고, 반만 주면 졸려 죽고, 다 주면 굶어 죽는다는 말 못 들어 봤어.”

  “그러면 이래저래 죽기는 죽는구먼.”

  “허허허.” 

  한바탕 웃기는 했지만 뭔가 씁쓸했다. 이 때 한 친구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자 자, 우리 아이들은 다 효자가 될 터이니 술이나 마시자.”  

 술잔을 돌렸지만 이미 흥이 깨어진 터라 이내 헤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켰는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그 의사 아들보다 더 심하게, 아예 부모를 내다버린 뉴스가 나왔다. 도저히 더 볼 수 없어 전원을 껐다.

  우리의 삶은 인연의 고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많은 인연 중에서도 부모와 자식 사이만큼 큰 인연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관계가 왜 이렇게 삭막하게 되었는지, 안타깝다. 

  물론 자식의 입장에 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의사 아들의 경우도 빚을 많이 져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부모를 버린 사람도 이혼에 실직까지 하여 곤궁하기가 극단에 치닫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자식 된 사람은 자식으로서 지킬 근본적인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인 도리는 세월이 수없이 바뀌어도,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변하지 않는 천륜이란 것이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불효를 하는 사람보다는 효도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도 간경화를 앓고 있는 어머니께 간을 이식해준 사람도 있다. 그 학생은 그 당시 고3이었지만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 건강입니다.” 하면서 14시간에 걸친 이식 수술로 어머니를 살렸다. 이 학생뿐만 아니고 부모를 위해 극진한 효도를 하는 미담들이 수시로 알려지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효도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효도란 것은 그 숫자가 많고 적음으로 비교할 성질은 아닌 것 같다. 욕심 같아서는 모두 효자가 되어 어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식이 한 사람도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식도 언젠가는 늙게 된다. 그 자신이 늙고 힘이 없을 때 자신의 아이가 지금 자기와 같이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이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운전을 하다 보면 도로 곳곳에 “나도 커서 아버지처럼 운전할래요.”하는 표어가 붙어 있다. 이는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지만 '어버이날'에도 깊이 새겨야 할 경구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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