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에
행전 박영환
오월은 싱그러운 신록 속에 점점 푸르러 가고 있다. 푸른 빛깔만큼 향취도 그윽하다. 오월을 흔히 ‘푸름’의 계절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푸름’도 범위가 매우 넓다. 파랗다, 퍼렇다, 시퍼렇다, 진초록, 연초록 등등. 또 우리가 일상으로 대하는 하늘과 바다, 나무의 색깔도 그저 큰 묶음으로 ‘푸르다’고 하지만 그 역시 하늘, 바다, 나무가 완전 다른 푸름이다. 그리고 이처럼 하늘, 바다, 나무가 서로 다른 것은 고사하고 같은 하늘, 같은 바다, 같은 나무라 해도 상황이나 여건의 변화에 따라 완전히 다른 색깔이 된다. 스페인의 작가 얀마텔은 ‘파이 이야기’ 속에 하늘과 바다가 바뀔 수 있는 상황을 각각 10 여 개 이상 열거하였다. 그는 바뀌는 상황마다 독특한 색깔과 결부시켰는데 아마도 그 상황은 더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색깔도 얼마든지 늘어났을 것이다.
오월은 ‘청소년의 달’이다. 청소년의 ‘靑’이 ‘푸름’이란 뜻이고 보면, 푸른 오월을 ‘청소년의 달’이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푸르게 자라라’는 소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젊은이의 소명은 뭐니뭐니해도 ‘푸름’이다.
‘푸름’이란 젊음을 상징하고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젊음을 가지려면 개성 있는 ‘푸름’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 현장을 보면, 오늘날 청소년들이 공통 분모에서 벗어나 독특한 색깔을 가지기엔 어려움이 많다. 입시란 험준한 고개가 가로놓여 있는 현실 속에 자기 색깔을 낼만한 심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대학이란 단일 색깔에만 중독되어 있다. 설사 그 색깔에 취하여 단일 색밖에 보지 못하는 색맹이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자세들이다.
하기야, 그들 중에도 젊은이의 순수한 낭만을 살려 자기의 색깔을 향유하려는 몸짓들이 왜 없겠는가? 또 요즈음은 입시도 다양화되어 다소 사정이 누그러지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자기 몸짓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무튼 단일 색은 곤란하다. 어쩌면 단일색은 이미 색의 기능을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 이질미(異質美)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단일 색만이 질서가 있고, 단일 색만이 공동체를 살려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개인이 독특한 빛깔을 낼 때, 거부감 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불안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자연의 이질적 푸름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듯이 청소년의 개성적 푸름도 끝내는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푸름, 개개인에게는 독특한 체취와 가치관을, 단체 속에는 제 3의 힘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마침내 침묵을 지키는 나뭇가지에도, 무디고 굳은 땅에도 신선한 충격으로 활력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