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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물                                                                                                          행전    박영환

 

 

  노자(老子)만큼 물을 극찬한 이도 없을 듯하다. 그는 독특한 선(善)의 논리를 설파하면서 그 선을 물의 속성에 비유하였다. 노자가 말하는 선(善)은 세간의 일반인들이 말하는 악(惡)과 상대 관계를 갖는 선이 아니라, 뒷면에 악이 없는 선, 따라서 절대적인 선이다. 이것을 상선(上善)이라고 하며, 상선은 물의 작용과 흡사하다고 했다. 그는 물은 만물에게 절대적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며 현상적으로는 무(無)이면서도 만물을 낳고, 만물을 살리는 속성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기에 물이야말로 도(道) 본연의 모습에 가깝다고 했다.

  그가 말한 뜻을 원론적으로 받아들이면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일반화하는데는 아무래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인의 깊은 뜻은 모르겠지만 악이 없는 선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가 어렵지만 더더구나 물이 선으로만 작용하고 활용된다는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말하자면 물에도 선(善)과 악(惡),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본질의 속성상 생명을 살리는 선(善)적인 요소가 더 많을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물을 예찬하여 ‘구름 빛이 깨끗하다고 하지만 검기를 자주하고 바람 소리가 맑다고 하나 그칠 때가 많지만, 깨끗하고도 그칠 것이 없는 것은 물뿐’이라고 했다. 우리의 선인들은 이런 깨끗한 물이 흐르는 산수 속에서 ‘산 절로 수 절로 나 절로’가 되기를 염원했다.

  강은교는 그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에서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중략) 만리밖에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리라.’ 라고 했다.

  여기에서의 물은 완벽하게 하나로 섞일 수 있는, 즉 ‘나’와 ‘너’를 ‘우리’로 합일(合一)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가 물로 만나 흐를 때 비로소 힘을 지니어 ‘가뭄’으로 상징되는 병폐들에 찌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물의 본질적 사명과는 거리가 먼, 독(毒)적인 존재 ‘탁류(濁流)’도 있다. 그 탁류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도(道) 본연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상선(上善)은커녕 하선(下善)도 아니며 생명을 살리기는커녕 죽음을 만들어 내는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의 물이라면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엄청난 형벌, 아니 이름 그대로 신의 독기가 든 저주의 물이다. 그것은 여호와 당신이 창조한 생명들을 스스로 멸종시키는 살벌한 파멸의 역사(役事)이었다. 그가 총애하던 단 한 가족 노아의 식구 및 일부 날짐승, 길짐승을 제외하고는 전부 멸종시키려 했다. 악을 처벌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역시 악은 악인데 하필이면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물을 가지고 처벌을 할 수밖에 없었던가? 아무튼 지상의 샘들은 모두 다 터지고, 하늘의 창들은 모두 열렸다. 밤낮 40일 동안 비를 퍼부었으며 150일 동안 물이 지상에 창일(漲溢)하였다. 마침내 그의 뜻대로 방주 속의 극히 일부 생명만 제외하고 모두 질식사를 했을 때 그의 지독한 물 고문은 멈추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홍수 설화가 있다. 우리 설화의 노아 역은 두 남매가 담당했다. 전부 다 죽고 오직 두 사람만 살아남는다. 두 사람은 남매이기에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고민에 빠졌다. 남매는 마주 보고 있는 봉우리에 올라가 여동생은 암망(여자의 성기처럼 파인 것)돌을 구르고 오빠는 수망(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것) 돌을 굴렸다. 신의 뜻을 알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돌은 산 아래로 굴러가다가 마침내 합방의 형용을 했다. 오뉘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결혼하여 인간의 시조가 되었다. 노아처럼 물을 잘 다스려 영웅이 된 신화적 존재였다.

  예로부터 물을 다스리는 것을 치정(治政)의 제일로 삼았다. 실제로 고대 중국 하(夏)나라 우(禹) 임금은 물을 잘 다스려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치수 설화의 상징이며 이른바 물 임금이다.

  이스라엘에는 두 개의 내해(內海)가 있다. 하나는 갈릴리 호수이며 또 하나는 사해(死海)이다. 이 두 개의 바다는 아주 대조적이다. 갈릴리 호수에는 푸른 물결을 타고 물고기 떼가 마음껏 뛰놀고 있지만 사해는 어떤 생물도 살고 있지 않다. 주위에는 나무도 없고, 새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사해 위에는 떠도는 공기조차 무겁고 답답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에 사는 어떤 동물도 가까이하지 않는다. 갈릴리 호수와 사해가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과 불균형이 빚은 결과이다. 갈릴리 호수는 강물을 받아들인 만큼 출구로 내보냈지만, 사해는 욕심으로 가득 차서 받아들인 것을 전혀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아무 생물도 살 수 없을 뿐더러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주변에는 죽음의 그림자만 드리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저수 시설이 턱없이 부족할 때이니, 조금만 가물어도 물을 서로 자기 논에 대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어린 나도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의협심을 발휘하여 그 전선에 뛰어 들었다. 아무튼 한발이 가장 심한 재실 옆에 있는 논을 내가 맡았다. 그 때 오직 삿갓 하나로 땡볕을 가리고 전의를 불태우며 막무가내로 물꼬를 지키고 있었으니 눈을 부라리던 어른들도 실소를 머금고 물러났다. 그 이후로 동리 사람들은 나를 ‘물꼬잡이’로 불렀다. ‘물꼬 잘 지키는 아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물꼬도 지키는 것보다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족하면 채워야 하지만 남아돌면 수위를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무턱대고 물을 가두어 두면 벼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사해의 원리와 똑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철부지의 그 ‘물꼬 지키기’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열고 베푸는데 인색하여 욕심을 앞세우는 일이 많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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