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각痛覺
행전 박영환
흔히 아픔이 없는 세상에 살게 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픔이 없는 세상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모두,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아프고 같이 안 아픈 세상은 없는 것일까? 한 번 아픈 사람은 다시 아프지 않고 차례차례 아프다가 궁극에는 골고루 아프고 골고루 행복을 느낄 수는 없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이 있다. 그 말도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긴 하나 항상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아픔과 성숙이 비례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아무리 아파도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아프지 않아도 어느 날 갑자기 성숙해 있는 사람도 있다. 거기에 불만이 나오고 시기가 생기고 생의 의욕까지 잃어버리고 좌절하는지 모르겠다. 배가 고픈 것보다 아픈 것이 더 참지 못하는 이유도 쉽게 발견한다. 이는 분명히 불평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이 있다 해도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쩌면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한계인 것이다.
한 번은 어느 젊은 생물 선생님이 수업하는 것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그 때 토의 주제 중 이런 것이 있었다.
“선천적으로 통점이 없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학생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매우 궁금했다. 혹시 아주 행복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답을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통점이 필요하다는 데 모두 동의하며 ‘고마운 감각’이라고 말했다. 아프게 하는 감각이 고맙다니. 그렇다. 다른 감각들은 ‘느낀다’라고 표현하는 반면 ‘통각’은 ‘방어한다’라고 표현한다. ‘아픔’은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체의 몸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꼭 있어야 할 중요한 감각이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우선 괴로운 것이 없어서 좋을지 모르지만 세균의 감염, 신체 부위의 파열 등 몸의 손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생명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몸에 통점의 분포가 많은 곳일수록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몸 안의 내장기관은 다른 신체 부분보다 통점의 분포가 적기 때문에 이상이 생겨도 늦게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다. 즉 간암이나 폐암 등 내장 기관에서 생기는 암을 말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통각’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통각’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각이다. 우리 주변에 ‘필요악’이란 것이 분명히 있다. ‘통각’이야말로 ‘필요악’이 아닐까? 아니 ‘필요 선’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찌 단맛만 있을 수 있겠는가?
살아가는 속에 과정이란 것이 있다. 그 과정에는 분명히 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대로, 학창시절은 학창 시절대로, 성인 시절은 성인 시절대로 그 과정에 따르는 통점이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다소 바늘의 색깔이 다르고 굵기가 좀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아무리 그러하다 해도 ‘통각’ 자체를 근본적으로 피할만한 비법은 없는 것이다. 사람은 역시 쓴맛, 신맛, 짠맛을 맛보아야 하고 압점, 촉점, 냉점, 온점은 물론 ‘통각’을 분명히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 ‘통각’을 겪으면서 사람은 사람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다워’지는 것이다. ‘선생답다’, ‘학생답다’ ‘어른답다’는 것 모두가 ‘통각’이 만들어 준 선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