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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하회(河回) 마을

         하회(河回) 마을

 

 

                        

  행전 박영환

 

  지난 겨울 안동 하회 마을에 들릴 기회가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을 통해 하회란 이름을 많이 들어왔다. 어른들은 하회란 이름 앞에 '대처 거촌'(大處巨村)이란 수식어를 붙이며 예법 등 이견이 생길 때는 이 마을의 풍속을 판단의 큰 잣대로 원용하곤 했다.

  하회는 정말, 지형부터 여느 마을과 특이했다. 낙동강이 북동쪽에서 흘러와 서남쪽으로 휘감아 물돌이를 하는 곳, 조그마한 통로 하나만 숨구멍처럼 고갯마루로 통할 뿐, 마을 전체는 주머니에 싸이듯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물돌이에 연유하여, 이름도 하회(河回)마을이란다. 이런 지세를 두고, 태극형, 연화 부수형이라 일컫는다고 하던가?

 강물이 이렇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이를테면 반도처럼 강물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을 때, 장점이 많을까? 단점이 많을까? 아무래도 단점이 많을 것 같기도 하다. 강 자체가 장벽이 되어 이웃 마을과의 교류가 어려워 편집과 외골수로 고립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만약 하회 마을이 지금과 같이 '대처 거촌'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이름 없는 벽지가 되었다면, 이런 지세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마을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마을도 현재의 주성(主姓)인 풍산(豊山) 류씨(柳氏) 이전, 허씨와 안씨 성을 가진 이들이 이곳에 정착하려 했지만, 그들은 이 특이한 지형을 감당하지 못하고 쇠망했다고 한다. 그러면 류씨들이 이곳에 적응하며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막연하게나마 ‘조화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연과 사람,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까지도 수직으로 복종을 요구하지 않고 수평으로 조화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조화의 힘’으로 이 특이한 지형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조화의 힘’이 발휘되었을 때, 이 하회의 물돌이는 외부와의 단절이 아니고 오히려 외풍을 막아 내고 내풍을 씻어내는 보호의 벽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회 사람들은 학문을 숭상하여 우뚝 선 인재들을 배출하던 옛날은 물론이고 자칫 현대의 물결 속에 밀려나기 쉬운 오늘날에도 이 ‘조화의 힘’으로 마을을 지탱하고 있다.

  하회 마을에는 전혀 판이한, 지배 계급의 상투 문화와 피 지배 계급의 짚신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지배 계급들의 상투 문화는 서슬 푸른 기와 등을 타고 넘치며, 피 지배 계급의 한(恨)서린 짚신 문화는 초가집 흙벽에서 배어난다. 이 두 문화는 너무나 이질적이기에 도저히 공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용하게도 공존동생(共存同生)한다.

  그들은 이 두 문화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하며 서로를 북돋워 주는 것이 그들의 오랜 정서이다. 그것이 하회의 모습이다. 큰 갓을 쓴, 상투 문화의 대표격은 '줄불 놀이'요, 수건을 동여맨 짚신 문화의 정수는 탈놀음 '별신굿'이다.

  ‘줄불 놀이’란 부용대를 배경으로 하여 웅대하게 벌어지는 양반들의 풍류이었다. 뱃놀이와 불꽃놀이를 겸한 이 놀이의 서막은 시회(詩會)였다. 고저장단의 율격과 운자를 맞춘 한시를 지으며, 그들은 낭만을 구가했다. 탈놀음 '별신굿'은 서낭에게 드리는 제례 의식에서 연희된 것이다. 탈들의 행렬 - 큰 광대, 새끼 광대가 한 마당의 굿판을 벌인다. 별신굿의 목적은 서낭을 위로하는 것에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빌미였고, 더 큰 목적은 지배 계급에 대한 피지배 계급의 한(恨)을 풍자로 표출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여느 양반들 같으면, 자신들의 허물을 연희할 것 같으면 직·간접으로 압력을 가했을 것인데, 하회의 양반들은 조금도 고깝게 듣지 않고 관용으로 경청하며 협조, 아니 오히려 장려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별신굿을 벌이며 상전인 양반들의 험담을 거칠 게 늘어놓아도 박수 속에 수용했고 뒤풀이를 할 수 있도록 쌀과 돈도 넉넉하게 내어놓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하층민들은 쌓인 앙금들을 말끔히 걷어낼 수 있었고 나아가 전보다 더한 신뢰와 충성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보기 드문 노사화합의 현장이었다. 만일, 이러한 조화와 관용이 없었다면 하회의 초가집은 너무나 우울하고 슬프게 보일 것이다. 피지배 계급들이 주로 기거했던 초가집들은 고랫등 같은 여러 고택들에 눌려 여느 마을 이상으로 초라하고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회의 초가집은 하회탈의 산실이고 이는 오히려 하회 문화를 -시회(詩會)보다 훨씬 더 능가하는 - 선도(先導)한다는 의미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오히려 의연하다. 그러니 지배 계급들의 고택들은 고택대로 묵향(墨香)이 물씬 배어나는 큰 기침이 있고, 초가집은 초가집대로 민초의 땀이 결은 긍지가 있다. 그들은 결코 기와집의 쉼표와 같은 자리 매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하회처럼 초가집과 기와집이 나란하게 조화를 이루는 마을도 드물 것이다. 초가집과 기와집의 이 자연스런 조화는 한 폭의 수채화가 되었다. 초가집 노오란 바탕이 있기에, 기와집 용마루는 제대로 푸른 빛깔을 얻고 또 바람을 막아서는 기와집들이 있어 초가집들은 따뜻하다. 서로는 서로의 바탕색이 되어 있다.

  또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곳은 충효당(忠孝堂)이다. 충효당 - 수백년의 풍우 속에서도 우뚝 서서 대갓집 면모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있는 곳. 지금이라도 명재상 서애(西厓)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올 듯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조화는 또 하나의 잔잔한 감동이었다.

  이곳에는 현재 서애의 13대 종부 박씨 부인이 살고 있다. 충효당을 처음 찾았을 때, 이 곳이 아직도 민가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의아하고 불만까지 있었다. 이제 이곳은 류씨들의 종가집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배우고 가꾸어야 할 종가집이 되어야 할 텐데 하는 소박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곳을 지키는 이들이 만에 하나 서애의 고고한 체취에 흠집이나 낼, 경망한 행동이나 하지 않아야 할 텐데 하는 주제넘은 고민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이곳을 지키는 종부 박씨 부인의 '명가의 내훈(名家의 內訓)'이란 교훈서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분이야말로 이곳을 꼭 지켜야 할 분이란 생각을 했다.

  이 분의 말씀 속에 아직도 서애는 살아 있었고, 충효당은 또 하나의 조화미를 가꾸고 있었다. 전통의 마을도 흔히 시대의 흐름에 어쩔 수없이 동화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괴리감을 주는 경우가 있으나, 하회 마을은 이 분과 같은 신구(新舊)를 조화시키는 이가 있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접맥되고 있었다. '名家의 內訓'은 이 분이 스무 살 나던 해에 서애의 종가에 시집을 와 고희의 나이인 지금까지 오십여 년 간 종부의 자리를 지키며 온갖 역경을 겪는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살아온 이 분의 체험적 인생관이 담담하게 피력된 글이다.

  처음에 이 책을 대할 때 명가의 종부로서 아집과 고루함이 지나쳐 시대감각에 뒤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았으나, 전혀 그 반대였다. 이분은 일찍이 김활란, 김일엽 등 신여성의 영향을 받아 야학을 통해 신학문을 익히며 여성 계몽 운동을 위해서 ‘소년회’를 조직하기도 했던 선각자적 혜안을 가진 분이었다. 이런 분이 명가의 종부로 자리를 지키게 되었으니 서애가의 신선한 충격이고 신구를 접목시키는 새로운 수혈이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서애의 가문에 긍지를 가지면서도 그 속에 안주하거나 그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법(法)이란 물[水]에 갈[去]라고 하면서 관용과 이해를 바탕으로 했다. 특히 여성관은 딸에게도 아들 못지않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여성들의 권리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진솔하고 담담한 어투로 여성의 본분을 일깨웠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태도, 자식, 교육, 가정 경영, 음식 솜씨에 이르기까지 현대 여성들이 자칫 소홀하기 쉬운 점을 일깨웠다.

  이 분이 주장하는 생활 철학은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인간성 회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격변하는 한 시대를 살았던 이 분들의 연대는 근세조선과 현대가 합류하는 지점이다. 자칫 밀려가는 시대와 다가온 시대 사이의 괴리감에 허무를 느낄 수 있으나 하회 특유의 조화미로 극복했다. 인고로 위치를 갈고 사색으로 당신의 땅을 일구며 어제에 긍지를 가지고 오늘에 실천하며 내일에 접맥시키려는 흩트림 없는 생활이었다.

  하회 마을을 벗어날 때 어느덧 마을은 강 건너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찬란한 하회의 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회의 밤은 낭만이 가득하다. 이제 곧 줄불 놀이의 불꽃은 강 자락을 물들이고 서낭당 부근에서는 한바탕의 탈놀음이 있어, 그들의 밤을 창조할 것이다.

 13대 종부가 남긴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내가 죽어 남자로 태어난다면 여기(하회)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난다면 다시 이곳으로 시집을 오고, 스님이 되면 이곳 작은 절의 스님이 되리라.’ 이분의 소망은 오직 하나,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생사를 초월하여 이곳에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 하회는 그분의 처음과 끝이었다. 이 분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빌며 마을이 보이지 않을 때가지 돌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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