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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

동유럽 여행(4) 폴란드 크라카우

동유럽 여행(4)

 

                              폴란드 크라카우 

 

행전 박영환

 

  여행 제4일, 아침 7시 40분 프라하를 출발하여 폴란드 크라카우로 이동했다. 7시간 정도 차로 이동해야 하니 일찍 서둘렀다.

 

◎ 참혹한 아우슈비츠 수용소

 

  

크라카우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가 나왔다. 대구 출신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이곳에 유학을 온 여대생이었다.

  아우슈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 수용소이다. 나치스는 1945년 1월까지 이곳에서 250만 - 400만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곳으로 추정된다.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은 철저히 유태인들을 색출하여 이곳에 데리고 왔다. 오솔로와 아테네 등 세계 어디든지 유태인이 있는 곳은 손길을 뻗었다. 유태인의 구별이 잘 되지 않으면 옷을 벗겨 할레를 한 사람은 다 잡아 왔다고 한다.

   히틀러, 그는 유태인과 무슨 철천지원수를 졌던가. 정확한 이유도 없는 것 같다. 단지 몇 가지 이야기가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유태인과 재혼을 했다. 그런데 그 유태인 새아버지는 어머니를 몹시 구박하며 비인격적인 대우했다. 히틀러가 18세 때 그 어머니는 유태인 남편에 대한 스트레스로 유방암에 걸려 죽었다. 그 후 히틀러는 홀로 돈을 벌면서 미술학도가 되고자 미술대학에 지원하였는데 면접에서 오스트리아 면접관은 합격점을 주었으나 유태인 면접관은 불합격을 시켰다. 히틀러는 1년 뒤에 다시 그 미술대학을 지원 했으나 마찬가지로 유태인 면접관이 불합격 시켰다. 아무튼 어머니에 대한 연민, 면접관에 대한 오해로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그는 미술학도에 대한 꿈을 접고 오스트리아 떠나 독일로 가서 군인이 되었는데 군

생활에서는 훈장을 받는 등 성공을 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정치적 최고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강인한 게르만 민족을 표방하며 유태인에 대한 잠재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일인 중에 유태인과 결혼 사람들을 이혼시키기도 하고 유태인 가게 불매 운동도 했으며 유태인들의 의사 자격증을 박탈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것만 해도 엄청남 탄압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유태인을 멸족시키기 위해 폴란드에 대규모 수용소를 만들었다. 그 당시 유태인들의 분포도를 보면 폴란드가 중간 지점이었다.  

  히틀러는 유태인이 거주하는 지역에 루머를 퍼뜨렸다. 곧 독일인들이 공격하여 유태인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 이 소문에 유태인들이 공포에 떨자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겠다는 구실로 아유슈비츠 수용소에 모이게 하였다. 그러니 유태인들은 이 교묘한 술수에 속아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는 줄 알고 왔다. 그래서 새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갈아 신었다. 그리고 생활필수품이며 주방기구도 가지고  왔으며  심지어 구두약이며 구두솔도 챙겨왔다. 그러나 그들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모든 것을 몰수당하고 전기고압선이 흐르는 2중 철조망 안에서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수용소에 잡아 온 뒤, 차례로 죽이기 시작했다. 우선 노동력이 없는 아이들이나 노약자는 들어오는 즉시 죽이고 젊은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시키고 난 뒤에 죽였다. 노동을 시키는 중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가지거나 게을리 하면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을 가하다가 죽였다.  굶겨 죽이고 총으로 죽이고 목을 매달아 죽이고 생체 실험을 해서 죽이고, 산모가 있으면 생배를 찢어 아기를 내고는 죽였다.

  그렇게 죽이고도 성에 차지 않아 목욕을 시켜준다고 집단으로 몰아넣고는 천정에서 가스를 뿜어 처참하게 대량 학살을 하였다. 죽이고 난 뒤에도 고이 처리하지 않았다. 금이빨을 뽑고 머리카락은 잘라 옷이며 매트리스를 만들었다. 시신은 기름을 짜서 비누를 만들었다. 천인공노할 짓이었다.

   고인들의 유품을 보면 희생된 사람들 중에 상당한 생활 수준에 있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좋은 제품의 옷이며 신발들 그리고 의족이며 허리 받침대도 다량으로 나왔다. 이 의족이며 허리 받침대 등은 일반 서민들은 쉽게 착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실제 이분들 속에는 의사와 변호사 및 재력가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유태인들의 학살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독일 나치스가 패망했으며 그 비극의 현장도 소련군에 쫓겨 급히 퇴각하는 통에 미처 파괴하지 못해 막사마다 희생자들의 유품이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사진, 벌쓰던 방, 생체실험방(미공개), 교수형 방, 사무실, 재판실, 가스실, 소각장, 머리카락으로 만든 매트리스, 화장실, 2인용 목침대 등등.

그런데 아이들 구두 속에 어머니 구두가 몇 켤레 보였다. 아마 아이가 발이 아프다고 하자 어머니가 벗어준 것 같았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아이들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불귀의 객이 되었다.  

  현재 이곳은 박물관이 되었으며 세계 각처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오르내리는 계단이 닳아 반질반질할 정도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가이드의 말을 들을 수 있게 음성 수신기를 이용하여 듣고 있다.

  오늘도 독일군이 지키던 망루가 을씨년스럽게 남아있고 입구 철문 위에 새겨진 슬로건 :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 진다)가 빗속에 떨고 있었다.

 

일해도 그들은 자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너무 처절했다

인간의 탈을 쓰고는 못할 짓이었다

그 어떤 변명도 그 어떤 사죄도

용서할 수 없는 참혹상이었다

봄이 와도 봄이 오지 않는 곳

동토의 땅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슬프다, 답답하다 

 

  어떤 사람은 첫째 막사만 들어가 보고 도저히 더 볼 수 없어 밖에 나가 울기만 했다는데 나는 꾹 참고 다 보기는 했는데 나오는 즉시 화장실을 찾았다. 갑자기 설사가 나고 속이 몹시 쓰렸다.

  전쟁이 끝난 후 포로 수용소 소장도 잡혀서 처형되었고 히틀러도 권총 자살을 했다.

인과응보였다.

  

◎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나라

 

  오후 바벨성 앞의 중앙광장에 갔다. 폴란드란 원래 ‘넒은 평야’란 뜻이다. 그만큼 넓은 평야가 있

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주식인 감자 이외의 농사는 잘 짓지 않고 있다. 폴란드는 31만 평방 제곱미터로 한반도의 1․4배 정도 되며 전체 인구는 3900만명이다. 국기의 하얀 부분은 자유를 의미하고 빨강은 독립이다. 문맹자가 많은 나라이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사람이 70%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역시 저기압이 많으니 음식이 짜다.

  이곳은 유독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들이 많았다. 탈모 현상이 많기 때문에 아예 속 편하게 깎아 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빡빡 머리에 살이 찐 사람들 - 얼른 보면 성질들이 좀 사나울 것 같지만 사실은 순동이들이 많단다.

   체질적으로 이 사람들은 바쁘지 않다. 거기에다 사회 복지까지 잘 되어 있으니 더더욱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학업을 국가가 책임진다. 아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학비가 없다. 그런데도 학교에 잘 가지 않으려 한단다. 과외와 입시전쟁에 찌들은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이곳은 나이에 따라 정년퇴임을 하지 않으니 교수들 중에는 80대의 교수들이 많다고 한다.   

  은행에서도 은행원이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주지 않아도 독촉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2시간 정도 기다리는 일은 다반사라고 한다. 현지 가이드 김 양이 집 전화 를 신청했는데 몇 달을 기다려도 설치가 되지 않아 폴란드 친구에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친구, 공산주의 때는 몇 년을 기다렸는데 지금 몇 달 기다리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단다. 이렇게 느긋한 분위기 탓인지 실제 비가 와도 뛰지 않고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실용적인 사람들이라서 집이나 옷 같은 치장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신발도 뾰족구두를 신지 않고 뭉툭한 신발을 즐겨 신는다. 이곳 사람들은 사치할 돈이 있으면 온 가족이 놀러 다니는데 쓴다고 한다. 노는 날이 많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스키방학, 스키 휴가까지 있다. 직원들이 쉴 때 사장이 일한다. 그러나 사회 보장제도가 잘된 반면 세금이 많다. 소득의 48% 정도가 세금이다.

  이곳은 묘지가 동네 한 복판에 있다. 보통 성당 뒤편에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가족들이 늘 꽃을 가져다 놓는다. 깜깜한 밤중에 공동묘지에 가는 사람들도 있다.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을 가진다고 한다.

  결혼식은 시청이나 성당에서 한다. 카톨릭 국가이라 원칙적으로 이혼을 금지하기 때문에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는 경우는 성당에서 하지 못한다. 결혼식은 3일 정도 거창하게 치른다. 마차나 리무진을 타고 다니는데 돈이 없는 사람은 약혼식을 한 뒤에 돈을 벌어 리무진을 타고 결혼 파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결혼을 하고 나면 반지를 오른 쪽 넷째 손가락 약지(藥指)에 끼고 임자 있는 몸임을 알린다. 그러고 보니 우리 운전기사도 폴란드인데 자세히 보니 손가락에 반지가 있었다.

 

◎ 중앙광장의 헤이나 의식

  

이곳 중앙광장은 유럽 나라들의 중세 광장 가운데 가장 넓은 곳이다. 주변에는 귀족 저택, 가운데는 700년 전에 아랍과 교역을 했다는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한 직물회관이 있다. 건물 앞에는 폴란드 민족시인 얀 마테이코의 동상이 있다. 포장마차로 된 시장이 크게 형성되어 있으며 시장 뒤에는 성모마리아 성당이 있는데 높은 두 개의 탑이 있었다. 매 시각 정각이면 나팔수가 나팔을 불어 시간을 알리는 ‘헤이나’란 의식을 하는데 나팔수가 중간에 뚝 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크라쿠프를 침략한 타타르족의 공격을 알리던 나팔수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던 것을 애도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광장에서 맥주를 한 잔 했다. 서빙을 하는 아가씨에게 ‘진꾸에’- 이곳 말 ‘감사하다’-라고 했더니

 좋아했다.

   ‘마조르’란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 주인이 한국인을 좋아하여 포근한 가정집에 온 느낌이었다. 가스 물도 방별로 2병이나 서비스했다.

  그런데  지난 4월 10일 이곳 레흐카친스킨 대통령과 97명의 엘리트 관료들이 러시아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한 참사가 있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폴란드가 빨리 안정을 되찾기를 기도했다.

 

 

동유럽여행(5) 소금광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