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문사雲門寺, 구름문
행전 박영환
설과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눈바람이 차가운 2월 어느 날,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를 찾았다.

이곳에 오면 정완영의 ‘운문사’란 시가 생각난다.
구름으로 지은 문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구름으로 지은 문 속에 사는 절이 어디 있는가/ 거짓말 엄청난 거짓말, 엄청나서 쇠북이 운다
시인은 믿기지 않는 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꺼낸 화두가 ‘엄청난 거짓말’이다. 과장법과 반어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렇다. 운문사는 거짓말처럼 구름문을 지어서 구름문 속에 쇠북을 울리고 있다.
‘雲門’이란 말 속에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움과 신비감, 애잔한 아픔 같은 것이 깃들여 있다. 운문 - 구름문, 그 자체만 해도 충분히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그런 곳에 비구니들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 정진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운문사의 여승에 대해 노래한 글들도 참 많다.
여린 발에 하이얀 남자 고무신/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비구니/ 바로보지 못해 살짝 훔쳐본 입가 미소 (어시홍 ‘운문사 메주 쑤는 날’ 중에서)
이승의 질긴 끈을/ 차마 놓지 못하고/ 이 저녁 누가 우느냐/ 절집 굴뚝 연기처럼/ 눈물이 바다에 이르는/ 법고 소리 듣는다/ 맞배지붕 바라보며/풍경이 따라 울 때/ 파랗게 살아 오르는 말/ 한 줌 재로 사뤄내니/ 가벼이 길을 떠나는/ 서녘 하늘 언뜻 붉다
(배인숙 ‘운문사 저녁’)
구름문 첩첩/ 너머 위엔/ 대낮에도 별은 뜬다/ 층층잔대 무수한/ 물음표 깜박이며/ 잘못 든/ 산협을 돌아/ 다시 길을 묻는 꽃
(박권숙 ‘가을 운문사’)
속세에 두고 온 인연/ 그리움 매달린 눈꼬리에 번진 미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여명에 흐르고/ 푸른 빛 띄는 머리 숙여 합장하는 손
(김은진 ‘운문사 비구니의 봄’중에서)
위 시인들의 눈에 비친 비구니는 속세의 질긴 인연과 끈을 지우기 위해 길을 물어 찾아와 하이얀
고무신에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수도 정진하고 있는 모습이다. 스님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시적화자가 너무 감상에 치우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그런 일면이 있을 수 있지만 아

무튼 이곳에 오면 수많은 여 스님들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여승들의 수도처가 된 것을 두고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풍수지리지’에도 운문사가 있는 이 호거산(虎踞山) 즉 운문산은 음산(陰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성적인 산’이란 것이다. 그런 산이기에 남자들은 아무리 수도를 하여도 끝내 여자들에 의해 무너지는 곳이니 처음부터 여자들이 도를 닦아야 성공을 할 수 있는 곳이란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 일대가 운문사뿐만 아니고 등 너머 석남사까지 비구니의 수도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헤아려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운문사는 약 1500년이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절인데 그 역사 중에 비구니의 도량이 된 것은 불과 6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그동안 남자 스님들 중에도 불법을 교화한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운문사는 557년(신라 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금수동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 동서남북에 각각 절 하나씩을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지었는데 그 절이 바로 현재 운문사이다.
600년, 원광국사가 중창하고 가슬갑사로 옮겨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937년, 고려 태조 왕건은 건국에 크게 기여한 보양국사에게 보은의 뜻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란 사액(賜額)을 내리고 500결의 넓은 토지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대작갑사의 명칭을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 1105년,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 뒤, 귀국한 원응국사가 다시 중창하여 전국 제2의 선찰(禪刹)로 만들었다. 그리고 1277년부터 일연대사(一然大師)가 5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다. 일연대사의 행적비가 절 동편에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남자스님들이 거처를 정하고 있다가 비구니 수도장으로 된 것은 불교정화운동 직후인 1955년, 금광(金光)스님이 비구니 초대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풍수지리지’의 ‘음산’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남자 스님들이 수도를 할 때도 많은 발전을 했지만, 비구니의 도량이 되면서 더 빠르게 발전하여 정착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고 1977년 명성(明星)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1998년까지 대웅보전, 청풍료, 삼장원 등 30여동의 전각과 요사채를 신축, 중수 하는 등 도량의 면모를 크게 일신하였다.
비구니 전문 강원인 운문 승가학원은 1987년 운문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 도량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1,250여명의 비구니를 배출하였다. 현재 270여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경학을 연찬하고 계율을 수지 봉행하며 정진하고 있다.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학인 수와 최고의 수행 여건을 자랑한다.
또한 1997년 경전 연찬과 강사 양성 목적으로 설립된 비구니 승가대학원은 5년 과정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경학 연구기관으로서 청정 승가의 가풍을 이어가고 있다.
전각으로는 대웅보전, 오백전, 작압전, 관음전, 명부전, 응진전, 조영당, 만세루, 범종루 등이 있고 주요 요사채로는 금당, 청풍료, 삼장원, 회성당, 육화당, 초정, 죽림헌, 목우정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비로전, 금당앞 석등, 청동호, 원응국사비, 석조석가여래좌상, 사천왕 석주, 삼층석탑, 부도, 처진 소나무가 있다.
그런데 이곳의 전각이며 요사채, 문화재 등을 살펴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여성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결같이 깔끔하게 정돈이 잘 되어 있고 차분하며 정감이 넘치는 것이다. 특히 운문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중에 하나가 ‘처진 소나무’인데 이 소나무만 봐도 전체 분위기가 아무래도 여성적이다.
이는 500년이 넘는 노송으로 당시 어느 대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가지를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500년 수령에 비해 키가 크지 않고 아담한 모습이다. 가지도 여느 소나무처럼 위로 치솟지 않고 조용히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웅장한 낙락장송의 기백보다는 겸양의 미덕 속에 조용히 묵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번은 여승들이 이 소나무 앞 잔디밭에 둘러 앉아 경전을 펴들고 있는 정경을 본적이 있는데 이를 보면서 이 처진 소나무와 여승들의 자태가 너무 닮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나무 전체의 둥근 원형과 스님들의 둘러앉은 모습이 똑 같았으며, 소나무의 전체 모습만 봐도 참다운 불성으로 무명(無明)을 타파하여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고자 정진하는 비구니의 조용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이목소(이무기)와 작갑사’의 설화가 있다. 보양국사가 중국에서 불법을 수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해에서 용왕을 만났는데 용궁에서 설법해주기를 청하여 설법을 해준 적이 있다. 용왕은 설법해준 답례로 금리가사 한 벌을 보시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삼국이 혼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에 돌아가 작갑에 절을 지어 살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또한 몇 년이 안 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하였다.
그 후 보양국사는 작갑 어귀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도장궤를 주면서 “내가 원광이다.”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보양국사는 절을 일으키기 위해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까치[鵲]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때 국사는 ‘작갑’이라고 한 용왕의 말이 생각나서 그곳을 파보니 오래된 전돌이 수없이 나왔다. 이 돌을 모아 탑을 쌓았더니 전돌의 수가 딱 들어 맞아 하나도 남지 않으므로 옛 절터임을 알고 그곳에 절을 세월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바로 이 ‘작갑사’가 운문사의 전신이다.
한편 이목(이무기)은 항상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남 몰래 돕고 있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물어 밭에 채소가 마르자 보양국사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하니 온 땅이 흡족하여 생기가 돌았다. 이때 천제가 하늘의 법칙을 어겼다하여 이목을 죽이려 함에 보양국사가 이목을 침상 밑에 숨겼다. 하늘의 사자가 내려와 보양국사에게 이목이 있는 곳을 물으니 보양국사가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자 그곳에 벼락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 이목이 살던 작은 못을 이목소라 한다. 삼국유사 ‘보양 이목조’에 실린 것이다.

이 설화의 중심 인물은 보양국사이다. 보양국사는 운문사를 새롭게 중창한 분이다. 국사는 용과 소통하고 이무기를 거느릴 정도로 도력이 있었으며, 그 힘으로 고려 건국에 크게 기여했다. 그래서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절을 크게 발전시켰던 것이다.
아무튼 운문사는 물의 용과 이무기가 도우고 나라의 왕이 적극적 힘이 되고 심지어 까치까지 애써 터를 인도한 곳이다. 물, 땅, 하늘, 사람, 그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이룩한 터 - 오래오래 어리석은 중생에게 밝은 불을 밝혀주는 도량으로 우뚝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구름문을 찾는가
구름밭을 건너와서
천 길 만 길도 외길 하나
진리 길
깨달음 그 때는 언제,
그대 가슴
열리는 날
(2011. 2.13.)
* 사진 중 '처진소나무' 사진은 '호거산 운문사' 안내책자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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