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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친구

저녁 나절에

 

저녁나절에

 

                                          행전  박영환

 

 

늦가을 저녁나절 동리 한바퀴 돌았다

15대조 할아버지께서 심은 은행나무는 올해도 잎이 곱게 물들었다

잎사귀마다 어른의 말씀이 새겨져 가슴에 다가온다

아흔을 훌쩍 넘긴 흑석 어른은 아직도 정정하게 콩 타작을 하다 말고

반갑게 맞는다. 돌아가신 아버님 연배이기에 뵈올 때 마다 아버님 얼굴이 떠오른다

영신 형의 굴뚝 연기가  흰구름에 안기고

처마 밑 곶감은 맨살을 드러낸 것이 민망한지 귓볼이 빠알갛게 달아올랐다

형은 그 향수를 잊지 못해 대구 살림 접고 고향집에 돌아왔다

영모재 안뜰에서 탁영 선생의 오백년 기침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대나무 숲이 우우우, 오늘도 무오년 사화를 들려준다

전교 형님 집과 이장 당숙 집은 대문만 열려 있고 사람 소리는 없다

전교님은 향교에 가시고 이장님은 면사무소에 간 것 같다

예 면장 집과 영문 형의 집도 조용하다. 예 면장은 퇴직을 한 후 멀리 월남 땅에

봉사활동을 떠났고 영문 형은 서울에 손자를 봐주러 갔다 

대구에서 이사 온 신 씨 집의 끝모르고 높이 매달려 있는 감들도

잎이 다 떨어진 지금, 혼자 사는 주인처럼 옆구리가 시린 모양이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동창인 화식 친구

교장으로 퇴직하고 난 뒤 선대의 은행나무 밑에 새집을 지었다

황토방도 만들고 닭도 키운다. 못다한 시골의 정취를 누리고 있다

들판 가득 황금빛 벼들이 익어 간다. 지금은 과수밭에 논들이 다 빼앗기고

귀한 벼들이다

백련지 물레방아는 쉬임없이 돌아  길손들에게 안식처가 된다

제자이며 동생인 영대가 심어놓은 수수도 가을 바람에게 나도 여기 있소 하고 얼굴을 내민다

주변의 꽃들이 모두 서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떠나가도 국화는 서리를 오히려 즐기는 것 같다

모두 진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이겨내는 것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고 희망이다

고양이도 가을이면 배가 부른지 물통 위에서 긴 잠에 빠졌다

하루가 저물어 간다. 석양,  잠자리에 드시렵니까

나도 집으로 돌아가 구들방에 군불을 지피렵니다.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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