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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부소산성/ 충남 부여군

    부소 산성/ 2015.4.1(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산 1-1

 

                                                                                            행전 박영환

 

 

   안개가 잔뜩 낀 4월 초하루, 봄날씨 치고는 꽤 쌀쌀한 날 아침, 부소산성을 찾았다. 오래 전부터 꼭 한 번 찾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이상하게 갈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다행스럽게 부여에 가게된 것이다. 

  특히 이번 여행은 우리 부부가 오랜만에 사십 여년 전에 결혼을 한 날짜에 즈음하여 나선 여행이기에 나름  더 한층 의미가 있었다. 

  산성이라 해도 길이 험하지 않았다. 새봄을 알리는 연록색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편안하게 갈 수 있어 좋았다. 이곳 주민들에게는 등산로로 이용되는 곳이어서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의 정상부에 둥글게 쌓은 테뫼식 산성과 능선을 따라 쌓은 포곡식 산성이 합쳐진 산성이다. 돌로 기초와 석축을 쌓고 겉은 흙을 다져 만들었으며, 총길이는 2.5 킬로미터 정도이다.

  고대 국가의 도성은  왕도를 수비하고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우선 적을 방어하기 쉬운 지형을 찾아 자연적인 요새인 산이나 해자인 강을 끼고 발전되어 왔으며 물과 평지가 있어 생활하기 편리한 곳에 터전을 잡았다. 그리고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는 넓은 공간과 교통이 편리한 요지를 선택하였다. 또 도시에 가까운 곳에 전시에 별도의 산성을 두었다. 이 부소산성도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잘 구비한 성으로 백제 사비시대 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잘 갖춘 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을 받을 수 있지만 이곳에는 백제 최후의 날, 궁녀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꽃잎처럼 백마강에 뛰어든  낙화암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애틋한 애련의 정을 가지고 더더욱 많이 방문하고 있다. 

 

 

                                                                        <삼충사>

 

  처음 들린 곳이 삼충사이다. 단청도 화려하게 웅장한 이곳은 백제 왕조의 마지막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시는 사당이다. 성충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충언을 하다가 옥에 갇힌 뒤, 단식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분이며 흥수는 성충과함께 충언을 한 분인데 유배 중에도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탄현을 지키라고 간언을 한 분이다. 계백 장군은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오만군사를 맞아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오천명 군사로는 중과부적이라 어쩔 수 없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패망하여 흔들리는 중에도 이렇게 충절을 다한 분들이 있었기에 비록 나라는 망했더라도 임금과 백성은 그나마 위안을 받아 조금은 덜 초라했을 것 같다.

 

                                                                      <세 분 충신들의 영정>
 

                                                                     <영일루>

 

  부소산 동쪽에 자리잡은 영일루, 본래 이 자리에는 달맞이를 하는 '영월대'란 건물이 있었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바뀐지는 모르지만 영일루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기야 달 돋는 곳에 해는 돋지 않을 것이며 해 돋는 곳에 달은 돋지 않을 수 있는가. 아무튼 달맞이로도 좋고 해맞이로도 좋은 곳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안개가 많아 해도 달도 볼 수 없으니 안타깝다.  

 

 

 

 

 

 

 

  태자골 숲길에 안개가 많이 끼어 있다. 백제 태자들이 세상을 얻은 마음으로 산책을 한 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국운이 왕성하던 때의 태자 모습일 것이며 그때는 기상도도 쾌청이었겠지만 몰락할 시점에는 이렇게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내가 나보다 몇 발자국 앞서서 걸어가고 있다. 지난 해 다리를 다쳐 수술한 이후 산행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행이 즐거운지 생각보다 걸음을 잘 걷는다. 아마 아내는 지금 백제의 기를 흠뻑 받고 있는 것 같다. 

 

 

                                                                   <군창터>

 

   군량미 창고가 있었던 '군창터'를 지난다.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는데 아쉽게도 곡식은 조선시대의 것이었단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창고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해서 이용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봄의 화신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진달래는 다른 꽃에 피에 여린 나무다. 겨울에 보면 흡사 죽은 듯이 나무 숲에 눌려 숨이나 제대로 쉬는지 의심할 정도이다. 그러나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산을 깨우는 알람이 된다. 자연은 황홀한 정도로 부지런하고 정직하며 영원하다. 조금도 건망증이 없이 때가 되면 깨울 것은 꼭 깨우고 만다. 자연은 치매가 없다. 정비석의 '산정무한'에 보면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눈 깜짝할 사이인 '수유'라고 했던가. 정말 고작 70 생애에 다투고 볶고 하다가 한 줌의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도 자연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수혈 주거지>

 

  백제시대 땅을 파고 생활했던 움집자리인 '수혈 주거지',  건물 세곳이 발견되었으며, 바닥에서  백제시대 와당을 비롯해 기와, 토기, 철제 무기와 갑옷 조각이 나왔다고 한다. 군사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위에 움집을 복원했다.

  군대 생활을 할 때, 방카 속에서 생활을 하기도 하고  훈련 중에는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텐트를 얹어 작전을 했던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방의 임무는 지엄하고 신성하다. 그런데 그때도 교묘하게 자기만 살려고 빠져나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병역 기피는 용서할 수 없는 간교이다.

 

 

                                                                         <반월루>

 

  사비도성을 방비하는 부여라성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반달같이 생겼다고 '반월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내력을 생각하며 1972년, 이곳에 누각을 세워 '반월루'라 했다고 한다. 보통 때는 백마강과 부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전혀 아니다. 어제 여장을 풀었던 여관도 운무에 휩싸여 그저 가물가물할 뿐이다. 

 

 

  작자 미상의 '부여'란 시 한편이 길손의 눈길을 잡는다.  - '백제의 옛 서울을 찾았더니 무심한 구름은 오락가락 바람은 예대로 부는구나' 하는 구절이 지금 내마음과 같다.

 

                                                            <사자루>

 

  사자루는 부소산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달맞이를 하던 '송월대'가 있었다고 한다. 부소산은 유독 달과 관련된 곳이 많다. '반월성', '반월루', '송월대' 등이 그것이다.  해보다는 달이 낭만적이고 예술적이다. 백제도 심층에 흐르는 낭만적 감성으로 예술과 문화가 발달된 나라가 아니던가.

  '사자루'는  백제 때 지은 누각은 아니다. 1919년에 임천관아의 정문 '배산루'를 옮겨 '사자루'란 현판을 걸었는데 현판을 의친왕 이강이 썼다고 하는데, 의친왕 역시 망국의 한을 가진 왕자가 아니던가. 동병상련 망국의 감회가 있었을 것 같다.

 

 

 

 

  낙화암을 가는 중도에 '연리지'가 있어 그 나무 앞에 우리 부부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연리지(連理枝)'란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을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말한다. 그래서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남녀간의 사랑을 상기시켜 '사랑나무'라고도 한다. 우리부부도 40년 이상을 같이 연을 맺고 있으니 연리지가 되고도 남을 기간이다. "우리도 연리지 맞지요" 나의 물음에 아내는"부소산성에 같이 온 것만 봐도 연리지이지요" 하면서 동의를 한다. "그런가, 하하" 

  사실 아내는 이번 여행지로 다른 곳에 마음을 둔 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마음을 두자 쉽게 따라주었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한다. 요즈음 가만히 보면 닮아 있는 점이 참 많은 것 같다.  

 

 

  이 사진 한 장 보시오, 영락없는 '연리지' 아니겠소.  아예 나무처럼 딱 붙어 있지 않소. 그래 이렇게 살아갈랍니다.

 

                                                                             <낙화암>

 

 

  드디어 낙화암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백마강까지는 40여 미터의 절벽, 삼천궁녀가 몸을 던져 꽃처럼 떨어져 죽었다는 구전이 서려 있어 부소 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다. 이날은 멀리 순천에서 학생들이 여행을 왔다. 의미 있는 곳이기에 기념 사진을 찍기에 분주하다

 

 

                                                  <낙화암을 찾은 학생들>

 

  과연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가 떨어져 죽었을까. 백제에 삼천 궁녀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궁녀가 이처럼 많다는 것은 자칫 백제 왕실, 즉 의자왕의 타락과 실정으로 나라가 패망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의자왕은 그런 임금이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 의자왕은 '해동의 증자'라고 불릴 정도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도 우애롭게 지내는 등 인품이 훌륭했다고 한다. 그런 임금이 삼천궁녀를 거느릴 리가 없다.  삼국유사에도  숫자를 열거하지 않고 서기 660년(의자왕 20년), 나당 연합군이 침공하자 백제 여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낙화암'이란 이름도 삼국유사에는 '타사암'이라 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꽃다운 여인들의 애절한 모습을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고  절개와 충절의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작자 미상의 '낙화암'이란 시에 "백제 신민의 눈물, 수건을 흠뻑 적셨지만 당당하고 충성스런 이 몇이나 될까?  만약 당시에 낙화암이 없었더라면 옛나라 강산은 쓸쓸한 봄이겠지"라고 했다. 공감이 간다.

  나라가 패망을 했는데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모두 승자 편이 되어버린 상황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허무하고 초라할 것인가. 그래도 앞에 열거한 세 충신 같은  남자가 있고 이렇게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린 여인들이 있어 백제의 마지막은 그래도  아주 초라할 정도의 쓸쓸한 봄은 면했던 것 같다. 

 

 

  낙화암 위에 우뚝 선 백화정, 육모 지붕의 정자는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그 원혼들은 낮에는 자신들을 기리는 내방객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밤이면 조용히 정자 위에 둘러 앉아 옛날의 아픔을 달랠까. 당신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 같소. 우리는 지금 당신들의 어깨 위에서 백제의 부활을 느끼고 있소. 거룩한 충혼들이여 이제 모두 잊고 편히 쉬십시오.  

 

 

 

<낙화암 천년송>

 

 

  낙화암,  그 척박한 벼랑에 뿌리를 내리고 천년을 버티고 있는 이른바 '천년송'이  있다.  안내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년 백제 역사 오롯이 숨 쉬는 곳. 낙화암 절벽 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머금고, 백마강 너와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런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 마음."

  이 낭떠러지에 어떻게 천년을 버티었을까? 혹시 궁녀들의 혼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궁녀들의 절절한 혼이 빙의된 일편단심이 아니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가끔 믿기지 않는 기적을 본다. 그 기적이 바로 여기 이 천년송이리라.  

  부소산의  '부소'란  백제시대 언어로 보면 '소나무'라고 한다. 산을 오르면서 유독 아름답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다가 연리지 소나무에다가 낙화암에는 천년송까지 있으니 부소산은 소나무의 단심이 처음과 끝인 것 같았다.  

  처음 부여에 도착했을 때 거리의 가로수가 소나무인 것을 보고 좀 특이하다고 느끼며 궁금증이 있었는데 부소산에 오르면서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도 회한을 지울 수 없는 듯 백마강은 짙은 안개 속에 눈이 퉁퉁 부어 있다. 고려의 시인 정지상은 '송인'이란 시에 "대동강 물이여 언제 마를런고, 이별의 눈물이 강에 더하여 물결은 더더욱 푸르다"고 했다. 이 백마강도 궁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간 뒤, 그 눈물을 애달와하는 이들의 눈물이 그치지 않으니 계속해서 강물은 더 불어나 눈을 퉁퉁 붓게 할 것이다.

 

 

  낙화암 아래 자리를 잡은 고란사에 왔다. 이 절은 낙화암에 몸을 던진 궁녀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이름은 한 잔을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신비의 약초 '고란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비가 새는지 천막으로 지붕을 가려 놓았다. 이 모습을 보면 궁녀들이 위로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잠시 합장을 한 뒤, 절 뒤에 있는  약수터 '고란정에 가서 물 한 잔을 마셨다.  막힌 가슴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약수에는 '갓난 아기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유명하다. 이처럼 한 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이 약수를 백제의 왕들이 마셨는데 마침 약수터 주변에만 자생하는 기이한 풀이 있어 잎 하나를 물동이에 띄워 그곳 약수란 걸 확인했다고 한다. 이 풀이 고란초이다. 고란초는 강가 절벽이나 산지 계곡 등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바위의 좁은 틈에만 자라며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고 안내 자료에 소개되어 있다. 이름에 '난'자가 들어 있어 '난초'로 오해하기 쉬운데 양치류이다.

 

 

 

  돌아오는 길은 배를 타고 돌아오기 위해 고란사 아래 선착장으로 갔다. 원래는 7명 이상이 되어야 배가 운행이 되나 마음 좋은 선장은 약간의 선비를 더 받고 우리 부부를 위해 운행을 했다. 유람선을 대절하기는 처음이다. 자세히 주변 경관을 설명해주고 중간에 배를 세워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고마웠다. 


 

 

 

                                                                   <백마강 풍경> 

 

                                               <선착장에서 시내로 오는 길에 조각 공원이 있었다>

 

 

 


 

                                                                 <부여 선언문 기념비>

 

                                                            <백제 공예 문화관>

 

<부여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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