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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 원리, 적천사 가는 길

적천사 가는 길
 
                             행전 박영환 
 
  2022년 4월 2일, 청도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청도군 청도읍 원리에 위치한 적천사를 찾아 나섰다.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모임을 가지지 못하다가 이번에 용기를 내어 모임을 갖게 되었다. 
  아침 09:00 옛 청도읍사무소(현재는 임시 주차장)에 모여 인사를 나누고 김밥이며, 생수 등을 지급 받아 각자 배낭에 넣고는 출발했다. 일단은 차로 보현사 위 고개마루까지 가서 아래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했다. 

  이날 안내는 박윤제 회장(前 문화원장)이 맡았다.  박회장은 적천사에 관한 내용을 유인물로 상세하게 정리하여 설명했다.

 

   적천사는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려니와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 자금 모금 장소로 활용되던 곳이다. 그러던 중 일본 헌병대가 불을 지르는 통에 절이 일부 소실되었다. 해방이 되자 이곳에는 그 독립운동 정신을 기려 건국기원탑을 세웠다.
 
  동국여지승람 26권 514항에는 청도군 화악산 남쪽에 있으며 선종에 속한다고 하였다.  화악산 남쪽 산중에 절이 있으며  이곳에는 보조국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국사가 말씀하시기를  "은행나무가 죽으면 적천사도 닫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은행나무는 지금도 800년의 수령을 자랑하며 크게 번성하고 있다. 
 
  적천사는 신라 흥덕왕 3년 심지왕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명종 5년에 보조국사가 중창하였다. 
 
 
 

고개 마루의 정자

   09: 25분 경 보현사 위 고개마루에 도착했다. 

 
  청도읍 건너편에 주구산(走狗山)이 보인다. 주구산이란 개가 달리는 형상이란 것이다. 이렇게 달리는 통에 청도에 운기가 빠져나가 아이들도 쉽게 병 들어 죽고 인재도 나지 않는다는 설이 있었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일단 개가 달리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개는 떡을 주면 멈추니 절을 지어 병사[餠寺, 떡절]라 했더니 과연 아이들도 죽지 않고 인재도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청도읍 시가지가 가깝게 다가온다.

 어느 새 진달래가 온 산을 물들였다

가는 길에 잠시 약수터에서 목을 축였다.

지난 해의 낙엽이 그대로 남아 있는 터라 조심조심 길을 걸었다.

계속되는 산행

다름 고개, 그런데 다람쥐 고개라고 적혀있다. 
 
  이곳은  신라 원성왕 때 영재(永才)가 10구체 향가인 '우적가(遇賊歌)'를 지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의 내용을 발췌하여 올리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권5에 ‘영재우적(永才遇賊)’이라는 제목 아래 이 노래와 아울러 연기설화가 실려 있다.
  수록문헌에 따르면 승려인 영재는 천성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무심하며, 또한 향가를 잘 하였다. 영재가 만년에 장차 남악에 은거하려고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을 때, 60여 명의 도적을 만났다. 도적들이 칼을 들이대며 해를 가하려고 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자, 도적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의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 하였다.
  도적들은 일찍부터 그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노래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에 영재가 이 노래를 지어 부르자, 도적들은 노래에 감동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뉘우치고 비단 두 필을 주고자 하였다.
  이에 영재는 “재물이 지옥 가는 죄악의 근본임을 알아 이제 깊은 산에 숨어서 일생을 지내고자 하는데 어찌 이것을 받겠는가.” 하고 땅에다 버렸다. 도적들은 더욱 감동하여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영재의 제자가 되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간 뒤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우적가」의 대략적인 내용을 풀이하면
 
“지금 나는 내 마음 속 세속의 번뇌를 벗어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수도를 하러 가는 수도승이다. 너희들 칼에 내가 찔리면 좋은 날이 바로 올 것이라 슬플 것이 없지만, 아직도 정진해야 할 길은 멀리 남아 있는데, 그렇게 무참히 명을 끊을 수 있겠느냐.”라고 설복시킨 노래이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중생에게 인생의 참뜻과 바른 길을 제시하여, 자신을 수련하며 참되게 살아가라는 교훈이 담겨 있는 향가이다.
 
 

박윤제 회장이 고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11시 40분 경 건국기원탑 앞에 도착했다. 일제 강점기, 적천사에서 독립군자금을 모아 부산을 통해 상해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이 전혀 없고 옛날 어른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아무튼 해방과 더불어 건국기원탑을 세웠다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사실이다. 
  건국 기원탑 비문에 의하면 당시 적천사에는 대웅전, 명부전, 응진전, 조사전이 있었고 암자는 도솔암, 은적암, 백련암, 옥련암이 있었으며 당우는 탐진당, 적묵당, 명랑당, 칠성각, 산령각, 만세무차루, 일주문, 옹호문, 청왕문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국 기원탑에 대한 기록
 

  이곳에 부도가 있다. 부도는 스님들의 묘제로 적천사에는 대비사와 비슷하게 청도군내에서는  가장 많이 보전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골짜기 흩어져 있는 것을 모두 합하면 19기의 부도가 있다. 

준비해간 김밤으로 식사를 하고 난 뒤
처음 가입한신 분도 계셔서 자기 소개를 했다. 그 동안 다양한 방면에서 여러 주요한 일들을 하신 분들이라 서로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았다.
 

 13시 30분, 경내에 들어와 부처님께 인사를 올렸다.

대웅전: 일제 강점기에 방화로 소실된 후 옥련암 법당을 옮겨와서 지었다. 탱화 포함 소불상등이 있었으나 조사전 화재 때 소실되었다. 

박윤제 회장의 열강: 해박하고 구수한 강의에 매료되어 관광객 아주머니도 열심히 듣고 있다.

명부전: 사후 명부의 세계를 상징화한 것이다. 10대왕 권속들이 등상으로 모셔져 있다. 옛날에는 불매를 설치하여 금강역사가 뛰쳐나오도록 만들었으나 한 때 어느 임신 중이던 젊은 보살이 놀라서 낙태를 하는 통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종각
 

괘불대: 괘불은 1695년(숙종 21)에 조성되었으며 재료는 문종이와 삼베를 사용하여 만들어졌으며 관세음보살 한 분만 그려져 있다. 괘불은 4월 초파일에 내걸어 행사를 한다. 이것이 바로 야단법석이다.
 

무차루: 사찰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이용하는 누각으로 막힘이 없다는 뜻이다. 원래는 60여 평의 큰 누각이었는데 일제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990년대에 법일화상이 새로 건축하였다. 현재는 30평이다.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벽운루로 불려지기도 했고 수헌 이중경의 '수헌집'에는 '만세루'로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까지 추사 선생의 전서로된 현판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무차루 안에 걸린 일연 선사의 시이다. 선사가 이곳에 다녀갔음을 알 수 있다. 일연선사의 '삼국유사'에는 앞에서 소개한 우적가를 비롯하여 금오촌 등 청도 곳곳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청도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삼국유사'이다.  청도문화(2019, 제 15호, '아까운 청도의 자산 삼국유사와 죽바위/ 박영환' 중에서 '삼국유사' 부분을 다시 발췌하여 옮겨본다.  

  

   
삼국유사
 
  일연선사가 편찬한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큰 보배요, 자산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집필되고 편찬되었는가? 사실 아쉽게도 거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사의 연보를 고려하면 청도에서 집필되고 편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국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도 그렇게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청도는 이 주장들을 적극 수용하고 입증하여 청도의 귀한 자산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청도군 각북면 비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약 1400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 용천사 입구 안내문 중 이러한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일연선사께서 비슬산에 마지막 머문 곳이 용천사였다. ‘삼국유사’의 원고를 이곳 용천사에서 탈고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277년 청도 운문사 주지로 옮기어 그곳에서 삼국유사가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고대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삼국유사’ 원고를 일연선사가 청도 용천사에서 탈고하고 그 이후 운문사에서 편찬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이는 근래, ‘삼국유사’에 대해 경북 군위군이 인각사가 ‘삼국유사’의 산실이라고 하면서 아예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라 명명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사업도 벌이고 있는 것과 완전 배치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용천사 탈고, 운문사 편찬’ 설의 진위를 차치하더라도 군위의 ‘삼국유사 산실’ 설도 생각할 점이 있다. 일연선사가 군위 인각사에서 말년을 보내고 입적을 했으니 집필과 편찬을 했다고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머문 시기가 79세부터 입적을 한 84세까지이다. 한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모은 자료를 말년까지 정리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거니와 고령이기도 하고 이때 효심이 많은 그가 노모상까지 당한 시기였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을 것 같다.
  당시 고려는 몽고의 침입 등 전란으로 민중들이 민족적 자긍심과 정신적 중심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을 때이다. 일연선사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껴 민중들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많은 기록의 대부분은 현지답사를 통해 자료를 찾아 기록했다.
  ‘일연을묻는다, 현암사, 2006.’ 저자 고운기도 ‘삼국유사’는 ‘발로 뛰며 쓴 책’이라고 정의하면서 ‘삼국유사’의 미덕이라면 지은이의 발길이 애정 어리게 주어진 다음 치밀함과 정성이 배어 기록되었다는 점이라고 하면서 그 스스로도 책상에 앉아 읽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발로 뛰는 ‘삼국유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그 현장을 답사하고 ‘일연을 묻는다’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는 신라 중심의 불교문화가 많이 취급되어 있는데 이도 돌이켜보면 선사가 경상도 쪽, 그 중에도 비슬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많이 머물렀기에 역시 이쪽에 발길이 쉽게 갔을 것이다.
  선사는 1206년(희종2) 장산군(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9세(1214, 고종1)에 해양 무량사에 취학하고 14세(1219, 고종6)에 정식으로 출가를 한다.(해양이라는 지역이 전라도 광주라고 알려져 있고 출가한 절이 설악산 진전사라고 알려져 있으나 다른 의견이 있다. 이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그 이후 22세(1227, 고종14) 부터 포산(지금의 달성과 청도 경계에 있는 비슬산)에 43세까지 머물며 수도생활을 한다. 그 뒤 44세(1249, 고종36)부터 남해 정림사 및 길상암에 머물다가 56세(1261, 원종 2)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 선월사에 주석했다가 59세(1264, 원종5)에 영일 오어사를 거쳐 다시 포산(비슬산)에 들어 인흥사에 주석했다.
  그뒤 일연은 69세(1274, 원종15)에 용천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였는데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하나인 용천사에 대해 많은 애정을 가지고 머물렀던 것 같다. 이 용천사를 끝으로 비슬산 시기를 마감하고 72세(1277, 충렬왕 3)에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된다. 그 뒤 76세(1281, 충렬왕 7)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경주 행재소로 갔다. 77세(1282, 충렬왕 8), 임금의 명에 의해 개성 광명사에 주석하게 되고 78세(1283, 충렬왕 9) 되던 해에 국존으로 책봉되었으나 그 해 곧 하산한다.(고운기는 3월에 책봉받고 가을에 하산, 하산 장소는 비문에 나타난 바, 舊山이라 표현된 고향일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일연의 생애를 말하는 것 중에 고쳐야 할 것이 있다. 하산 하면서 바로 인각사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문은 여기까지 적어놓고 이듬해 어머니가 9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감했다고 적고 있다. 인각사 행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러니 79세(1284, 충렬왕 10),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인각사에 갔으며 84세(1289, 충렬왕 15)에 입적했다.
  일연 선사의 연보를 살펴보건대 승려 생활 중 가장 많이 생활한 곳이 포산이다. 전반기 21년, 후반기 12년, 구도의 발걸음 중 거의 절반인 33년을 포산 즉 비슬산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어떤 이는 35년간 비슬산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이 산에 든 지 10년 만에 득도의 체험을 했으며 선불장에 나가서 장원급제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의 원고 중 많은 양이 포산에서 준비되었을 것이다. 실제 포산에 있을 때 답사하여 쓴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많다. 황룡사지에 관한 것도 그렇고 '삼국유사'의 피은(避隱) 편 '포산이성(包山二聖)조도 그 때 쓴 것이다.
  그리고 포산의 아홉 성인을 소개하며 그 말미에 소중한 기록을 하나 붙였다. “일찍이 이 산에 거처하며 성인들을 찬미하는 시를 썼는데 이제 함께 붙여놓는다.”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한밤중
달빛 보며 자리 잡고 있으니
몸에 걸친 옷
바람 부는 대로 반 남아 날도다
거적자리 누워도 단잠 들것이니
티끌세상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
 
  홍진에 묶인 세상에는 꿈속에서도 가지 않으리라는 결연한 다짐을 했다. 이 시는 서른 전후에 쓴 것으로 젊은 시절 삶의 방향을 말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삼국유사'는 포산에 있던 젊은 시절부터 집필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연을 묻는다’ 저자 고운기도 이를 보면서 ‘삼국유사’의 출발은 젊은 시절부터 듣고 본 것을 기록해둔 데서 출발했으며 본격적인 집필지는 운문사라고 했다.
  그는 인각사 입구에 세운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란 안내판에 대해서 이런 진술을 했다. “그것이 관에서 세웠는지 인각사 측에서 세웠는지 알 수 없지만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 - 절의 유일한 자랑거리를 훼손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그러나 이 말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삼국유사’가 언제 어디에서 저술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까닭이다. 더욱이 인각사가 아닌 다른 절에서도 ‘삼국유사’ 저술의 장소임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이처럼 ‘인각사 저술설’에 대해 의문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 반면 한편 다음과 같이 운문사 집필설을 피력했다.
“일연이 운문사 주석시절부터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했다는 것도 각별하다. 이미 인흥사에 있으면서 '역대 연표'를 만든 것이 '삼국유사' 기술의 시초라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예비 작업이었다. 더욱이 이 연표는 일연이 운문사로 옮긴 이듬 해 곧 충렬왕 4년(1278)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준비는 인흥사에서 했지만 마무리는 운문사에 와 있을 때 한 셈이다. 이런 점이 일연의 운문사 주석시절 ‘삼국유사’ 편찬 개시를 뒷받침 해준다.”고 했다.
  <삼국유사>의 원문 토씨 하나까지도 그 오류를 밝혀낼 만큼 삼국유사에 정통한 문경현(전 경북대 교수)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비슬산에서 잉태하여 운문사(雲門寺)에서 낳았다’고 주장했다.
정호완도 ‘삼국유사의 상상력, 지문당, 2013)을 통해서 이런 상상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삼국유사는 신라 서라벌의 얘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라유사’가 아니냐고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큰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좀 불만입니다.”
  “삼국유사를 쓰겠다는 생각은 20대부터였소. 그래 인연 따라 이곳저곳 거처를 옮길 때마다 많은 곳을 답사하곤 했소. 이런 저런 유적과 유물은 물론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소. 그러나 내가 살아온 때는 이미 고구려와 백제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어언 600여 차례의 봄가을이 지나 자료도 많지 않았고 특히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는 그리 갈 일이 많지 않았소. 아쉬운 일이지요. 다음 기회에 보완하도록 할 것이요.”
  이 이야기도 20대 포산 시절부터 집필이 시작되었고 역시 발로 뛰는 기록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신태영도 ‘원문과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 고전연구소, 2013’에서 집필지가 명확하지 않으나 젊을 때부터 자료를 수집해오다 운문사 시절 본격적인 저술을 하고 인각사에서 마무리한 것 같다고 했다.
김두진도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연구, 일조각, 2014)에서 23세부터 50여 년 간 장기간 자료 수집을 했다고 했으며 역시 끝 부분 완성은 운문사 시기로 봤다.
  위의 저서들에 나타난 주장들을 종합하면 젊은 시절부터 삼국유사를 준비해왔다는 점은 공히 인정한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운문사 주지시절, 즉 선사의 나이 72세(1277) 경 집필과 편찬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시기를 좀 더 늦게 보는 분도 있다. 앞의 신태영은 운문사에서 본격적인 저술을 했다면서도 인각사에서 마무리 한 것 같다고 했으며 리상호도 ‘사진과함께 읽는 삼국유사, 까치글방, 1999’에서 삼국유사를 쓴 연대는 정확히 밝힌 기록이 없으나 이 책의 내용 기사와 관련된 최종 연대가 고려 충렬왕 신사(1281년), 즉 저자의 76세에 해당한 부분이 있으며 저자는 84세에 사망하였으므로 이 책의 최종 탈고는 이 사이 7-8년간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했다.
  앞에서 논의된 것처럼 ‘삼국유사’는 어느 한 곳이 아니고 선사의 젊은 시절부터 장기간 수집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동안 모아 둔 원고들을 어느 시기에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집필하고 편찬했을까.
  일연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포산 시절(1219 -1248) 둘째, 정림사, 길상사, 선월사 시절(1249-1263), 셋째, 영일 오어사, 인흥사, 용천사, 운문사, 인각사 시절(1264-1289)이다. 이 중에 첫째와 둘째 시기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셋째 시기의 초반부터 서서히 시작하여 중반부터는 평생 동안 준비한 자료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가 계산상으로 14- 15년 정도가 되지만 실제 정리를 할 수 있는 기간은 6-7년으로 압축된다. 그 6-7년 기간이 용천사와 운문사에 주석했을 때이다.
  진상기(陳相基)는 ‘淸道 속으로, 2011.12.5. 도서출판 신원사’에서 ‘삼국유사’는 운문사에서 찬술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명성스님(전 운문사 주지며 현재 운문사 회주) 의 글을 소개했다. “<증보 삼국유사, 최남선 편>에 의거하건데, 삼국유사는 일연의 70세 이후로 京師(경사)로 被召(피소) 國尊(국존)에 冊封(책봉)되기까지 운문사에서 遺閒(유한)한 業績(업적)이요 그 중에서도 俗事(속사)의 部(부)인 王歷(왕력)과 紀異兩編(기이양편)은 아직 왕명이 있을 그 前期(전기)의 撰成(찬성)일까 하노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울로 불려가서 국존이 되기까지 한가한 시간에 업적으로 이룬 것이 삼국유사라는 말이지요.”
  <증보 삼국유사, 최남선 편>을 근거로한 명성 스님의 주장도 위의 기간과 일치한다. 76세(1281, 충렬왕 7) 때는 일본 원정군을 독려하기 위해 경주 행재소를 차린 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셔야했고 77세(1282, 충렬왕 8) 때, 환궁하는 왕을 개성까지 모시고 가야했다. 78세(1283, 충렬왕 9) 때 국존으로 책봉되었으나 곧 하산했으며 79세(1284, 충렬왕 10) 때 96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군위군 인각사로 갔다가 84세(1289, 충렬왕 15)로 입적한다. 아무튼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용천사와 운문사 시기 외에는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경황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용천사는 69세(1274, 원종15)에 주석했다. 이 때 이미 고희의 시기인지라 마지막 주석처로 생각하며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화엄 10찰의 면모를 갖추도록 중수하였다. 그리고 평생 심혈을 기울였던 원고들을 탈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는 중, 나라에서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고 운문사 주지로 불렀다. 이때 72세(1277, 충렬왕3)였으니 늦은 나이라 이제는 정말 마지막 주석이란 생각을 가지고 용천사에서 못다 한 자료들을 집대성하여 편찬하였을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용천사 안내문에서 밝힌 "용천사 탈고, 운문사 편찬"이란 말이 괜한 추정이 아니고 근거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백목련의 고운 자태

천왕문 안의 목조 상: 지방문화재 제 153호이다. 

사귀들: 몹쓸 죄를 지어 한 번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오는 이 가는 이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무차루

보조국사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02호이다. 이 나무 앞에 비석이 하나 위태롭게 서 있는데 강희 33년에 경일화상이 비를 새겼다. 이 비문 말미에 은행나무가 죽으면 적천사도 폐사될 것이라 했다. 

14시 30분 경 다시 산위로 올라갔다.  가파른길이라 힘이 들었다. 도착하니 15시가 넘었으며 15시 20분경 해산을 했다. 즐겁고 의미있는 하루였다. 
 
적천사
 
화악산 울을 삼고 남산도 같이 불러 
수호신 사천왕상 괘불탱화 펄럭이네
감로에 마음을 씻고 대웅전에 합장하네
 
팔백년 은행나무 크고넓게 우뚝서서
봄 여름 가을 겨울 무량으로 보듬으니
또 다른 사랑법이며 보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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