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道東書院)과 김굉필(金宏弼) 선생
행전 박영환
2017년 7월 16일 경북 선비 아카데미 회원들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위치한 '도동 서원'을 찾았다.

<도동서원 전경>

<도동서원>

*아래 도동 서원에 대한 내용은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의 강의 자료 '도동서원과 김굉필'을 중심으로 현장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곁들여 사진을 찍어 재구성한 것입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은 한훤당(寒暄堂)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처음 세운 곳은 현풍현 비슬산 기슭이다. 그 때는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고 1604년 정유재란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건립했다고 한다. 강당은 5칸으로 지어져있는데 가운데는 대청을 이루고 있고 좌우양측에 난방을 할 수 있는 방이 있다. 전퇴가 있어서 예를 올리고 집회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도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 서원은 북향인데도 여기에 세운 것은 선생의 부친묘가 서원 뒤에 있어 시묘살이를 한 곳이고 또 한훤당 산소도 여기 있기 때문이다.
사당(祠堂)을 먼저 짓고 위패를 봉안했다. 이듬 해 강당과 서원 등을 완성했다. 이 서원의 건립을 주도한 사람은 한훤당(寒暄堂)의 외 증손자이자 뛰어난 예학자인 한강(寒岡)정구(鄭球) 선생과 퇴계(退溪)이황(李滉) 선생이었다.

<도동서원 현판은 퇴계 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현판이다. 현판은 그 건물의 특성을 알려주는 큰 단초이다. 도동서원의 중정당(中正堂)은 도동서원이라는 현판 아래에 걸려있다. 도동서원이라는 현판은 이 서원의 총체적인 이름이다. 그러나 여기 건물은 중정당(中正堂)이라 하여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라는 뜻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도동서원 앞은 특별히 하마비가 없다. 그 대신 기둥에 흰 띠를 하여 5현 중에 수현이라고 표시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말에서 내렸다.>

1607년에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사액(賜額)되었는데 그 뜻은‘성리학의 도(道)가 동쪽으로부터 왔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 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의 서원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이 도동서원은 서원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의 서원 건축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되며 유학자들의 교학 중심지가 되었다.

<도동 서원 향사는 2월과 8월에 있다. 금년도 향사의 제 집사 분배기이다,

도동서원 앞에 당도하면 처음서원을 건립하고 학사나무로 한강(寒岡)정구(鄭球)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수백년의 연륜을 자랑하고 있다. 서원이나 재실에는 대체로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을 쌓고 교육했던 것에 기인한다.

<추모비>

<문화해설사가 은행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월루>

<수월루 뒷면>
수월루(水月樓)는 부석사와 합천의 해인사. 경주의 불국사와 마찬가지로 원래의 넓은 터는 아니었지만 자연을 이용하여 축대를 높이 쌓아 터를 만들다 보니 상당히 가파른 지형으로 이루어진 서원을 안정감 있게 하기 위해서 누각(樓閣)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 시회를 열고 또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이기도 하지만 경사진 터를 안정적으로 보이기 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안의 모습을 감추려 했던 조선시대에는 더할 나위없는 건축물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단체 촬영>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도동서원의 진면목을 알려면 일년에 네 번은 와야 한다고 한다. 봄에는 모란을 보고 여름에는 배롱나무를 보고 가을에는 은행나무를 보며 겨울에는 비움을 알기 위해서다.


도동서원에는 자연경관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나직나직하게 쌓은 석축이 여럿 있다.사당정면에는 삼문이 있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석축이 4단 쌓여 있다. 이 석축은 사당과 강당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 곽을 유지하고 있다. 도동서원은 석축이 많기 때문에 사당에 이르기 까지 18개의 석단이 폭과 높이를 달리하며 쌓은 것이 보이는 경사진 터를 적당하게 나누어 넓은 곳은 건물을 짓고 좁고 가파른 곳은 화단을 가꾸었는데 석축을 쌓은 모습이 비슷하게 동일성을 갖추면서도 변화를 주어가면서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이 석축은 맞물려 쉽게 무너지 않게 했다.



도동서원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돌조각들이 있다. 축대에 보면 용머리가 조각되어 고개를 내 밀고 있다. 용은 등용을 의미하고 거북은 장수를 의미하는데 이들이 공통으로 물에 사는 동물이기 불이 나지 않게 해달라는 화재 예방차원도 있다고 한다.

내삼문을 갖춘 사당이다. 이곳에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한강 정구 선생의 위패를 모셔두고 있는데 벽면에 '설로장송', '강심일월주' 벽화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여느 서원과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따로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서원의 사당은 출입을 할 때 동쪽 문에 들어갔다가 서쪽문으로 나오는 동입서출을 하나 이곳은 동입동출이다. 즉 동쪽 문을 통해 들어갔다가 동쪽문으로 나오는 것이다.
또 일반 다른 서원에는 보기 어려운 차(次)라고 하는 곳이 있다. 이 차라고 하는 곳은 담장가운데 네모지게 구멍을 내어 제문을 불태울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향사를 지내고 난 다음 제문을 태울 때 아무곳에서나 태우는 것이 아니라 이 차(次)에서 태우는 것이다. 뒤에는 전사청이 있다.




모란 - 지금은 꽃이 졌지만 봄에는 장관이라고 한다

<벽의 간격이 점차 좁아진다>


동재- 거인재(居仁齋)

<서재인 거의재(居義齋)>
강당 뜰아래는 동·서 양재가 마주하고 서있다. 기숙사인 동재·서재로 이루어진 강학공간이있다. 동재는 거인재(居仁齋),) 서재인 거의재(居義齋)이다. 도동서원의 정원 15 - 20명이었기에 유생들이 기숙을 할 수 있었다.




<환주문에 있는 연꽃 무늬 - 이는 꽃 중에 군자가 연꽃이라고 말한 주자의 애련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수월문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환주문(喚主門)이 나온다. 적은 문이다. 이 환주문은 우리나라의 서원의 문 가운데 어쩌면 가장 작은 문이다. 환주(喚主)란 집안의 주인을 부르는 뜻도 되겠지만 어쩌면 자기 본인의 마음을 말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갓을 쓰고 다녔다. 그러나 이 환주문은 좁고 낮아서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게 만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 머리를 숙여라 몸가짐을 단정히 해라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예를 갖추게 된다. 선현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또 문을 닫으면 앞으로 더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문 걸 돌은 꽃을 새긴 돌을 심어 두었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른다는뜻이 되겠다. 그러나 주인을 부른다는 것은 중정당에 사람이 있을 때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환주라는 말은 집안의 주인이 아니라 내 마음의 주인을 말하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환주문에서 중정당에 이르는 마당에 중앙에 돌 길이 있다. 만약에 비가 올 때에 신발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만들었을 수도 있고 또 풀이 난다해도 가운데에는 길이 보일 수도 있게 길을 만들었다.

<환주문에 있는 구멍 - 근래 이곳이 포토존으로 각광받고 있다>

<구멍을 통해 본 도동서원>

나도 포즈를 한 번 취해 보고

가운데 있는 돌이 생단(牲壇)이다. 문화해설사가 생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생단(牲壇)이라고 하는 곳은 제관(祭官)들이 이 짐승(보통 돼지)을 향사에 올릴만 한지 심사(審査)하는 곳이다.


<환주문과 담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담장은 중정당 건물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된 곳이다. 담장을 만든 기법은 여느 담장과 같이 진흙과 막돌을 섞어가며 쌓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맨 아래는 막돌로 터를 만들고 진흙으로 굳혔다. 그리고 진흙과 막새를 되풀이 하며 쌓은 것이 특이하고 마무리는 일반의 기와지붕을 마무리 하듯 하였다. 중앙에 듬성 듬성 수키와로 둥근 모양을 넣어 튼튼하게 하였다. 이 담장은 돌과 흙 그리고 기와를 골고루 분포시켜 견고하게 한 축조 기법이지만 장식도 아주 훌륭하다. 특히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낙차를 만들면서 쌓은 것이 특이하다.
김굉필(金宏弼)
김굉필(金宏弼)[1454년(단종2)에 태어나서 1504년(연산10)]은 정치인이며 학자이다.
본관(本貫)은 서흥(瑞興)이고 자(字)는 대유(大猶)며 호(號)는 사옹(簑翁). 또는 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김굉필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이었고 고려후기 사족(士族)으로 번성했는데 증조부인 김사곤(金士坤)이 수령(守令)과 청환(淸宦)을 역임(歷任)하다가 부인(婦人)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玄風)에 이주(移住)하면서 그곳을 주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조선조가 개국할 때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김소형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할아버지부터 살아온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이를 계기로 「소학(小學)」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하고 소학에서 받은 감명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 마음을 다해 자식(子息) 구실을 하려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 라고술회 했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小學)」을 진실하게 믿고 따라(篤信)하고 모든 처신을「소학(小學)」따라 했음으로 「소학」의 화신(化身)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 (성종11)에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승려들과 불교의 가르침을 척결해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斥佛)과 유학(儒學)의 진흥(振興)에 관한 견해(見解)를 피력(披瀝)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典牲署) 참봉 북부주부(北部主簿)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刑曹佐郎)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아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中宗) 반정(反正)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伸冤)이 이루어지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들을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 되어 김굉필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른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결과 1517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정광필(鄭光弼) 신용개(申用漑) 김전(金詮)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관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 되어서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굉필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김굉필을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 (선조10)시호가 내려졌으며 1619년(광해군2)대간과 성규관 및 각도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 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史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小學)」에 입각한 처신(處身), 복상(服喪), 솔가(率家) 가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寒暄堂)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 이장곤(李長坤) 김정국(金正國).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成).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산서원(玉山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喧堂集)』『가범(家範)』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도동 서원으로 내려가는 고개가 다람재이다.>

<조망할 수 있는 정자>

<정자 아래 굽어도는 강물>

김굉필(金宏弼)선생이 쓴 노방송(路傍松)
길가의 소나나무
一老蒼髥任路塵(일로창염임노진) : 한 늙은이 푸른 수염 날리며, 길 먼지에 몸 맡기고
勞勞迎送往來賓(노노영송왕래빈) : 수고하며 오고가는 길손 보내고 맞는다.
歲寒與汝同心事(세한여여동심사) : 날씨 차가워지는데 그대와 마음 같이 하는 이
經過人中見幾人(경과인중견기인) : 지나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나 보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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