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실마을/ 2016년 6월 15일(수)/ 경북 고령군 쌍림면/ 행전 박영환
청도문화원 우리문화 바로알기 회원들이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종가가 있는 개실마을을 찾았다.
김종직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1457년 그 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년(세조 5년) 과거에 급제헸다. 특히 선생은 청도가 배출한 절개 굳은 선비인 탁영 김일손 선생과 오졸재 박한주 선생의 스승이기도 했다. 실제 선생의 세조 왕위 찬탈을 풍자한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분이 바로 탁영 선생이고 그 일로 무오사화가 일어났으니, 청도 사람들은 선생에 대한 관심이 또 남다른 데가 있다.
내 개인적으로도 탁영 선생의 산소가 우리 고향집과 아주 지근 거리에 있기에 직계 조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찾는 곳이 되어 어릴 때부터 탁영과 관련하여 점필재 선생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사실 선생의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이 마을 방문은 각별하였다.



점필재 종택



종택에서 문중과 마을에 대해 설명을 듣다
이 마을은 무오사화때 화를 입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인 선산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점필재는 원래 밀양에서 출생하고 밀양에서 돌아가신 분이지만 화를 입은 이후 13세의 아들은 경남 합천 야로 지역에 쫓겨갔다고 한다. 역도의 아들이지만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야로란 지역이 쇠붙이를 녹이는 곳이니 김씨는 쇠 금(金)이니, 그곳에서 서서히 녹아 없어지라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용하게 잘 견디어 자손들이 이어졌으며 마침내 선생의 5대손에 이르러(1650년경)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이 마을이 유독 아름답게 꽃이 피는 마을인지라 아름다울 가(佳) 골 곡(谷)을 써서 가곡이라 했다고 한다. 한편 같은 의미의 꽃 피는 마을 -개화실로도 불려졌는데
경상도적 언어 습관으로 음이 변하여 걔애실이 되었다가 점차 '화'의 의미인 '애'도 빠지고 아예 2음절으로 축약하여 개실로 부른 것 같다.
그런데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려면 나비가 있어야 하는데 마침 마을 앞 산이 흡사 나비가 춤을 추는 형상이라 명당의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꽃이 있어 개화실이 된 것이 아니고 나비 모양의 산이 있어 개화실이 된 듯한 느낌도 든다. 나비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면 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을 이름을 꽃이 피는 마을 - 개화로 하여 나비를 붙들어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문 앞에서 해설사가 느닷없이 '마술을 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마술을 하여 앞의 나비산을 보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문안으로 들어와서 마당에 서니 산이 보이지 않았다. 좀 썰렁한 개그였지만 잠시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제 나비산을 보여주겠다며 사랑채 마루에 앉아보란다. 그것도 중앙 기둥 옆자리에 앉아서 앞을 보라고 했다. 과연 한 마리 나비가 날개를 펴고 꽃을 찾아 날아오는 모습이 되었다. 물론 마을 어느 곳에서 보아도 나비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이곳 종갓집 사랑채 마루에 앉아서 바라본 앞산의 보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그래서 종택의 터를 잡은 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꼭 풍수에 따른 환경적 조화를 고려했던 것이다.




종갓집 안채
이곳에는 현재 86세의 종부가 살고 있다.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
멀리서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사당

사당앞 골목길 토담의 곡선이 아름답다.

종갓집 뜨락의 살구나무

개실 마을 전경
개실마을은 현재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체험활동을 벌이고 있다.
엿만들기 등 전통음식을 비롯하여 디딜방아, 예절교육, 대나무 물총, 모내기, 미꾸라지 잡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이 이루어진다.



도연재 - 이 건물은 김종직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지방 유림들이 고종 원년에 건립하여 유생을 가르치고 제사를 모시던 곳이다.


마을 입구의 비석들


종택을 둘러보고 나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