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리의 덕양재와 모룡재



덕양재(德陽齋)
청도군 이서면 양원리 뒤편 선대의 묘소 바로 옆 332번지에 있으며 2000년에 건축했다.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대문(출입문, 수납장1, 방1)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목조와가 정면 5칸, 측면 1칸 덕양재(방3칸 마루 2칸, 중당 협실형)이 있으며 대청에 ‘덕양재기’가 걸려 있다. 마당은 시멘트로 마감했으며 블록 담장을 둘렀는데 산소가 있는 쪽은 담을 따로 쌓지 않았다.
경주인 춘보(春寶) 이춘득(李春得)의 선재이다. 고려 공민왕 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이재현(李齋賢) 선생의 10대손으로 증 통정대부 참의를 지냈다. 조선 숙종조에 낙향하였다.
이곳은 조상들의 은덕을 기리고 자손들의 전통 예절 교육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모룡재(慕龍齋)
청도군 이서면 양원리 마을 안 313번지에 있으며 1985년에 건축했으며 여러 차례 중수했다.
3칸 규모의 대문(출입문, 방1, 수납공간1)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1칸의 모룡재(온돌방 3칸, 마루 2칸)가 있다. ‘태종대왕 어치제문’, ‘모룡재 상량문(진양 하재우 근서)’ ‘모룡재 기’ 등이 대청에 걸려 있으며 재사 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대문 맞은 편 측면에 주방이 배치되어 있고 주변에 시멘트 블록 담장을 둘렀다.
동래인 정성림(鄭聖淋)의 묘재이다. 동평군 정종의 13대손, 봉천군(逢川君) 인운(仁耘)의 12대손, 통정대부 이(以)의 6대손으로 부호군직에 이르다가 사임하고 성주에서 청도로 이거하여 양원리에 은거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양원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차북면(次北面)의 중심 마을이었지만,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과 함께 면사무소가 학산리로 이전하면서 시장도 옮겨 가 변두리가 된 마을이다.
명칭 유래] 팔조령을 넘나들던 관로변(官路邊)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원(院)을 두어 양원(陽院)이라 했다. 원을 두어 행려자들의 숙소를 제공하였던 곳에 시장(市場)을 개설해서 인근의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경찰관 주재소가 생겨 해방 후까지 있었다.
[형성 및 변천] 조선 시대에는 차북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신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양원동이 되었으며 이서면에 편입되었다. 이때 이서면사무소를 지금의 학산리로 옮기면서 시장도 함께 옮겨갔다. 1988년 양원동에서 양원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상원산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의 산이 양원리에서 두 줄기로 나누어져서 한 줄기는 토평리로 이어지고, 또 한 줄기는 유등리에서 멈춘다. 산을 등지고 앉은 양원리는 산자락을 밭으로 일구었으며, 대곡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 앞 경작지는 경지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예전에 유등리로 가는 관도인 영남 대로를 따라 도수로(導水路)가 있어 영남 물고개라고 불렸다. 물이 고개를 넘어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지금은 거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현황] 2012년 7월 현재 면적은 1.13㎢이며, 총 111가구에 270명[남자 142명, 여자 12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이서면 칠곡리·화양읍 유등리, 서쪽은 이서면 신촌리, 남쪽은 이서면 고철리, 북쪽은 이서면 팔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양원 마을과 가마실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가마실에는 조선 시대까지 토기 가마가 있었고, 옹기굴이 늦게까지 있었다. 국가 지원 지방도 30호선이 양원리를 북동에서 남서로 비스듬하게 지나가고 있다. 이 길을 따라 풍각 버스 정류소에서 출발하여 대구 남부 공용 정류장으로 이동하는 버스가 고철리에서 양원리로 이동한다. 그리고 청도 공용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여 대곡리, 신촌리, 칠곡리로 이동하는 버스가 30번 지방도를 따라 지나고 있다. 영남 물고개에는 공장이 들어서 있고,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 마트와 축협 하나로 마트가 있다. 특히 청도 특산물인 쇠고기는 다른 곳보다 질 좋고 값이 싸서 대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한편 청도군지 (1991년)에는 양원리(陽院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송정산의 성현령이 이어져오다 칠곡에서 분기하여 중산봉이 되고 주붕은 구릉봉으로 이어져 마을 둘레를 감아 돌아서 낮게 또는 높게 솟으면서 둔직(屯直)능선이 되어서 이서국을 자리 잡게 하였다. 마을 둘레는 산등선이 뻗어서 흡사 가마솥 같이 되어 있다. 양원리는 이 솥같이 오목한 곳에 자리잡은 마을과 떨어져 나와 길가에 자리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부곡(釜谷)은 북서풍을 막아주는 지형으로 포근한 감을 주는 마을이다. 새벌(陽院)에는 고려말 밀양인 두촌 박양무 공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심으로 청도 대현(大峴-한재)에 거주하면서 후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이곳 새벌판을 찾아 장착하였다.
가마실(釜谷)
마을 주변 산의 형세가 가마솥(釜)형국이라고 붙여진 동명이며 가마솥에는 언제나 물이 있어야 된다고 지당(池塘)을 마을에 축조한 것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새벌
박양무 공이 새 벌판을 가리켜 새벌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양원(陽院)
양지바른 곳이라는 설이 있으나 고려시대부터 육로의 요충지로 원이 있던 곳으로 원(院)명이 양원인 것을 보면 양원의 기원은 현 주민들의 구전과는 연대차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조현을 눈앞에 두고 대구로 통하는 국도변에 원이 설치되어 공용자나 일반 여행자의 편의와 안정을 기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의 새벌 시장의 규모는 작았을 것이나 원의 유지와 교통 및 골 안의 경제에는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주재소(警察支署)가 면소재지에 있지 않고 이곳에 설치한 것도 팔조현이 어떤 고개임을 단적으로 짐작케 해 주고 있다. 일인들이 본 관점도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영남 물고개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양원리와 화양읍 유등리의 경계에 있다. 즉 이서면과 화양읍 경계이기도 하다. 물고개란 조그마한 보로 물이 육안으로는 아무리 보아도 하류가 아닌 상류인 높은데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 보가 국도변에 있어 행인들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로 이내 유명해진 것이다. 측량기술의 묘미로 수심력(水心力)의 영향이나 당시는 불가사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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