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수(敎授) 겸 도훈도(都訓導)이었던 눌연(訥淵) 정민도(丁敏道) 선생이 강학을 했던 눌연정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청도군 금천면 방지리(芳旨里) 우측 눌연천(訥淵川) 위에 자리잡고 있는 눌연정을 찾았다. 이곳은 교수(敎授) 겸 도훈도(都訓導)이었던 눌연(訥淵) 정민도(丁敏道, 1553 명종8〜1635 인조 13) 선생이 강학을 했던 곳이다. 공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방지리에서 선무랑(宣務郞) 정복(丁復)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열 살이 미처 되기도 전에 이미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여 막히는 곳이 없었을 정도이었으니 그 학문적 경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관직에는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고 자호(自號)를 ‘눌연’(訥淵)이라 하고 책을 벗 삼아 도(道)를 즐겼다.
그런데 1608년(선조 41), 조정(朝廷)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문란한 세속과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고심하던 차, 고결한 인품과 높은 학덕을 겸비한 눌연공의 명성을 듣고 공에게 특별히 전국 동서남북 네 학당 중 하나인 남학교수(南學敎授) 겸 구읍도훈도(九邑都訓導)를 제수했다. 아홉 고을은 청도, 영천, 신령, 양산, 경산, 하양, 자인, 언양, 기장이다.
그 때 공은 사도(師道)로써 소임을 다하며 유생(儒生)들에게 “사람은 하늘의 명(命)을 받은 천성(天性)을 지녀서 도(道)와 더불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인데 즉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란 요지의 흥학문(興學文)을 발표하고 그 이후 28년간 도훈도(都訓導) 직을 맡았다.
눌연 선생은 이 도훈도 직 외에도 유림이나 지역 발전을 위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하나가 우연서원(愚淵書院) 창건이다. 1620년(광해군12) 매전면 동당(현재 당호리)에 신축하고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 경재(敬齋∙警齋) 곽순(郭珣)을 배향했다. 또 소요당과 삼족당이 매전면 동산리에 주민들을 위해 설치한 동창(東倉)이 임진왜란으로 무너지고 그 터가 어느 공신 집에서 부당하게 점유하는 일이 벌어지자 순찰 중이던 안렴사(垵廉使)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돌려받았다. 그리고 예부운략(禮部韻略)이 1615년(광해군7) 박경전∙박경윤 형제에 의해 만력본(萬曆本)으로 새로 복각(復刻)되었을 때 교정을 한 뒤에 발문(跋文)을 썼다.
공은 사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예조참의(禮曹參議)로 증직 받았으며 ‘조선명인전’에 수록 되었다. 저서로는 집중예설(集中禮說)과 역경연의(易經演義)가 있다.
눌연정은 1591년(선조 24) 건립했으며 1608년(선조 41) 아홉 고을 향교를 대신하여 강학당으로 지정되었고 1826년 건물이 허물어져 유림들이 재건했다. 1896년 화재로 소실되어 1897년 재건했다. 또 1947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1948년 건물을 축소 현 정각으로 재건했고 1973년, 2016년에 기와 교체, 담장, 도색 등 전면 보수를 했다.
큰 스승을 회고하며 ‘흥학興學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눌연 물가 바위 위에 아홉 고을 선비들
그 모습 백학이라 학소대가 무색했네
지금도 크게 들리는 흥학의 가르침


다음은 눌연선생의 후손인 정해원(시조 시인)이 정리한 눌연선생 행장입니다.
눌연(訥淵) 정민도(丁敏道) 선생
丁敏道先生의 字는 德邵이고 號는 訥淵이며 本貫은 羅州이다. 朝鮮朝 明宗8年 癸丑(1553年)에 出生하여 仁祖13年乙亥(1635年)에 卒하였다.
平生에 學問을 窮究하여 林泉에서 養德하며 後進啓導에 專念하였다.
宣祖朝에 南學敎授兼 九邑訓導에 除授되고 沒後 通政大夫 禮曹參議를 贈職받았다.
訥淵先生逸稿가 刊行되어 世上에 傳한다.
1. 출생(出生)
공(公)께서는 명종(明宗) 임금때인 1553(癸丑)년 10월 13일 청도군 금천면(淸道郡 錦川面) 방지(芳旨)마을에서 선무랑공(宣務郞公 휘 復)의 아들로 태어나시었다.
2. 휘∙자∙호(諱∙字∙號)
공의 휘는 민도(敏道)요 자는 덕소(德邵), 호는 눌연(訥淵)이시다.
3. 유소기(幼少期)
공께서는 이가 나고 말을 배울 무렵에 효(孝)와 글을 깨달아 눌연공의 조부이신 판서공께서 “우리 집안을 번성(繁盛)시킬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셨으며, 열 살이 미쳐 되기도 전에 이미 ‘제자백가’(諸子百家: 많은 학자와 그 학파들)를 두루 거쳐 막히는 곳이 없었으니, 고을 사람들은 “丁씨 문중은 대대로 인물이 배출(輩出)되니 丁씨의 홍복(弘福) 뿐이랴 우리 고을의 길운(吉運)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한다.
4. 과거포기(科擧抛棄)
15세 때 할아버지(판서공)께서 돌아가시고 36세에는 아버지(선무랑공:宣務郞公)를, 38세에는 어머니(의인 월성이씨: 宜人 月城李氏)를 여의셨다.
이후 과거(科擧) 보기를 권하면 “나는 이미 양친께서 돌아가셨으니 비록 관직에 높이 오른다고 하여도 무엇이 영화이리요. 오히려 거듭 불효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고 하시면서 끝내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눌연천(訥淵川) 가에다 정자(亭子)를 세우고 ‘눌연’(訥淵)이라 스스로 호(號)를 지어 책을 벗 삼아 맑고 조용한 도(道)를 즐기시었다.
공께서 일찍부터 과거를 보지 아니하신 것은 판서공의 전력을 보아 관로(官路)에 나가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신 것도 이유의 하나일 것으로 여겨진다.
5. 사학당(私學堂)시절
공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인근에서 오는 이가 많아도 이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성심껏 교수하시니 눌연정(訥淵亭)은 정자가 아니라 학당(學堂)이 되고 말았다.
공의 학덕(學德)이 매우 높다는 소문이 인근 각 고을까지 넓게 전파되자 먼 고을 선비들까지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거나 학문을 담론(談論)하게 되었다.
6. 피란(避亂)과 귀향(歸鄕)
1592(壬辰)년 왜란(倭亂)이 청도에까지 미치므로 공께서는 식솔을 데리고 연일(延日: 지금의 迎日郡)로 피란 차 옮겨 가셨다. 연일은 처가곳이었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이어 일어난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다시 일어난 왜란)이 1599년에야 끝을 맺고 왜적(倭賊)이 물러간 후 돌아오셨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다만 전후(前後) 십여 년이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돌아와서 보니 피란 간 마을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살던 집은 불에 타거나 다 허물어지고 겨우 정자와 몇 간의 허드레 방만 남아 있었기에 잿더미를 쓸고 우거진 가시덤불과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고 다시 옛생활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7. 교수(敎授) 겸 도훈도(都訓導)
1598년 왜란(倭亂)은 끝났지만 7년간의 긴 전란(戰亂)으로 말미암아 불타거나 부서지고 혹은 왜병(倭兵)에게 약탈(掠奪)된 그 참상(慘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렇다 보니 민심은 흉흉하고 도의(道義)는 땅에 떨어졌다. 조정(朝廷)에서는 이 흩어진 민심을 위무(慰撫)∙수습하고 도의를 일깨우며 문란한 세속(世俗)과 사회 기강(紀綱)을 바로잡기 위하여 고심 중에 있던 차, 고결(高潔)한 인품과 높은 학덕(學德)을 겸비(兼備)한 눌연공의 소문을 듣게 된 선조(宣祖) 임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눌연공에게 특별히 남학교수(南學敎授) 겸 구읍도훈도(九邑都訓導)를 제수(除授 ; 과거를 보지도, 특별히 추천되지도 않았지만 임금이 특별하게 관직을 내리는 것을 말하며 혹은 ‘特除’라고도 한다)하셨다. 1608(戊申)년 선조(宣祖) 41년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
가. 남학(南學)
서울에 동(東)∙남(南)∙서(西)∙중(中)등 네 학당(學堂)이 있었는데, 이를 사학(四學)이라 하며 각 학당마다 교수 2명씩이 있는, 지금의 국립대학(國立大學) 격(格)이다.
※ 성균관(成均館)은 대학원 격임.
나. 교수(敎授)
종육품참상(從六品參上) 선교랑(宣敎郞)이고, 4학 외에 8도감영(八道監營)에 1명씩 있으며 중앙부서에 의학(医學)∙율학(律學)∙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등 4명이 있었다. 교수관(敎授官)이라고도 한 듯한 기록도 보이며, 대제학(大提學)∙제학(提學)∙부제학(副提學)∙직제학(直提學)등과 같이 정무직(政務職)이 아닌 순학문(純學問)이나, 교육직을 맡은 “선생”이므로 다른 종6품보다는 더 좋게 평가되고 우대하였었다. (이후 “눌연선생”이라 칭한다)
다. 구읍(九邑)
읍(邑:고을읍)이라 하면 지금은 시(市)와 면(面)사이의 행정구역 단위(單位)로 쓰이지만 옛날 성읍국가(城邑國家)시절에는 그 뜻이 자못 달랐고, 그 뒤에는 주∙부∙군∙현(州∙府∙郡∙縣)의 정청(政廳: 官衙)이 있는 부락(部落)을 말하기도 하고, “군”과“현”을 묶어서 말할 때에 “읍”이라 하였다. 지금은 군아(郡衙)가 아닌 군청(郡廳)이라 하고 “현”은 모두 “군”으로 승격하고 없어졌으니, 앞으로는 “군”이라 하는 것이 혼돈스럽지 않을 것이므로 “군”이라고 하겠다.
<아홉 고을>
1)청도군(淸道郡 - 守 ; 종4품)
2)영천군(永川郡 - 守 ; 종4품)
3)신령현(新寧縣 - 監 ; 종6품)―개화기(開化期)에 영천군으로 편입됨
4)양산군(梁山郡 - 守 ; 종4품)
5)경산현(慶山縣 - 令 ; 종5품)
6)하양현(河陽縣 - 監 ; 종6품)
7)자인현(慈仁縣 - 監 ; 종6품)
8)언양현(彦陽縣 - 監 ; 종6품)―개화기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와 통합되어 울산군으로 개칭되었다가 지금은 울산광역시에 편입됨.
9)기장현(機張縣 - 監 ; 종6품)―양산군∙동래군 등에 편입되었다가 지금은 부산광역시에 편입됨.
라. 훈도(訓導)
품작(品爵)은 종사랑(從仕郞: 정9품)이고 네 학당(學堂)에 각 2명씩 8명과 지방 각 고을에 1명씩이 있었다. 중앙에는 율학∙의학∙산학∙천문학∙지리학 등 특수학과 훈도가 18명이 있었다.
△ 도훈도(都訓導)라 함은 아홉 고을의 훈도직을 눌연선생이 혼자 도맡아라는 특별한 예외적(例外的)인 인사발령이다.
8. 눌연강당(訥淵講堂)과 흥학문(興學文)
임금의 특명을 제수(除授)받은 “눌연선생”께서는 이를 진사(陳辞)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아홉 고을 유생(儒生)에게 흥학문(興學文)을 발표하시고 회유(回諭)와 훈도(訓導)에 나섰다. ※ 문집 42쪽 「回諭九邑諸生興學文」 참조
≪흥학문의 요점(要點)≫
○ 사람은 하늘의 명(命)을 받은 천성(天性)을 지녀서 도(道)와 더불어, 그리고 “도”로 말미암아 성인(成人)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인데 즉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이다.
○ 기왕에 소임을 맡았으므로 마땅히 사도(師道)로써 거느릴 것이다. 스승의 존대한 바와 “도”의 존귀한 바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강(講)하고 사람됨을 만드는 데 있을 뿐이다.
○ 15세 이하의 학도(學徒)에 대한 오개조(五個條)의 규칙(동치학규: 童稚學規).
○ 성인(成人)에 대한 8개조의 규칙(장년학규: 壯年學規)
※ 참고 : 학규의 주요 조항
△ 나는 늙어 기력이 달려 자주 멀리가기 어렵고, 수사(秀士; 배우러 오는 선비들을 좋게 말함)들 또한 먼 길에 자주 찾아오기 힘들므로, 거리를 정하되 삼십 리 이내에 살면 한 달에 두 번, 육∙칠십 리 이내에 살면 두 달에 한 번, 백 리이면 석 달에 한 번, 그리고 그 밖이면 봄∙가을에 한 번씩 모인다. 만일 따로 의문(疑問)이 있으면 편지로써 주고받는다. 직접 찾아오거나, 혹은 볼 일 때문에 지날 때는 이 규정에 구애되지 않는다.
△ 나 또한 마땅히 매년 각 숙[塾 : 글방∙교사(敎舍 - 각 고을에 한 곳씩 있는 “향교”를 뜻한 듯]을 돌겠으나 늙은이의 일이라서 기일을 정할 수 없다. 그때그때 알리겠다.
△ 모이는 장소는 “눌연정”으로 하되 사람의 수와 날씨에 따라 큰 나무그늘이나 솔밭속 등으로 수시변통하기로 하며, 이 동안의 식사는 각자가 마련하여야 한다.
이 「흥학문」이 1991년도 청향(淸鄕)지(誌) 6호에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는 청도읍지(淸道邑誌)와 청도문헌비고(淸道文獻備考) 등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글인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여해원중창이문(如海院重創移文)」∙「강학제생유문(講學諸生諭文)」∙「주홀헌기(拄笏軒記)」 등과 함께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임진왜란’의 대국난(大國難)을 겪어 허물어진 사회기강을 바로잡고, 쇠퇴한 학문을 도로 일으키기 위하여 눌연 정민도(訥淵 丁敏道) 선생이 구읍도훈도(九邑都訓導)를 제수 받아, 아홉 개의 군∙현(郡∙縣)의 향교(鄕校)를 총망라(總網羅)한 도훈도로서 눌연강당(訥淵講堂)을 임시향교로 삼아 아홉 군∙현 유생에게 유시(諭示)한 글로서, 사회교육학자들이 가장 좋은 사료(史料)로 삼고 있다.”
“‘눌연강당’에는, 항시 공부하러 오는 인근마을 생도(生徒)며, 강(講)을 받으러 고을에서 모여드는 선비와, 원근 고을에서 선생과 학문을 담론(談論)하기 위하여 찾아오는 학자들로 성시(盛市)를 이루었다. 마주 보는 건너 마을 임당(林塘)에서 바라보면, 솔밭과 눌연물가 바위 위에 즐비(櫛比)하게 앉아 있는 선비들이 마치 백학(白鶴)이 때지어 쉬는 듯이 보이는 까닭에 ‘눌연강당’ 때문에 남산(南山)의 학소대(鶴巢臺 ; 임당마을 남산에 큰 송림이 있는데 ‘학’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가 무색하게 되었다고들 말하였다고 한다.”
9. 우연서원(愚淵書院) 창건(創建)
1608년(戊申)년 전란(戰亂)으로 흐트러진 도의(道義)를 바로 세우고 학문을 진흥(振興)시키기 위하여 서원(書院)을 짓기를 주창(主唱)하여 많은 고을선비들의 동참(同參)을 얻어, 1620년 매전면(梅田面) 동당(현-당호리; 堂湖里)에다 ‘우연서원(愚淵書院)’을 창건(創建)하시고 4월 20일 삼족당(三足堂) 김선생(휘 大有)을 봉안(奉安)하였다.
※ 눌연정회유음영취집(訥淵亭會遊吟詠聚集)에 의하면, 이 날 봉안을 마치고는 바로 눌연정으로 옮겨와서 하루를 즐겼는데 모두 열네 분이었고 이중에는 현풍(玄風)∙영천(永川)∙합천(陜川)∙창녕(昌寧) 선비도 섞여 있다.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소요당(逍遙堂) 박선생(휘 河淡)과 경재(敬齋∙警齋) 곽선생(휘 珣)을 같이 봉안하였다. 이후 춘추로 제사(祭祀)를 모시는데 이를 향사(享祀)라 하고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 일진이 丁자인 날)에 행하였다고 한다.
1623(癸亥)년 당파싸움으로 애꿎게 이 서원이 헐리게 되어, 이 해 3월 7일의 향사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향사 때 읽던 축문(聯享文)은 공께서 지으셨는데 문집 37쪽∙38쪽에 실려 있다. 이상의 기술은 문집과 내가 소장하고 있는 문헌 중에서 우연서원에 관련된 구절을 근거로 하여 정리한 것이므로, 행여 후손이므로 과장(誇張)하거나 미화(美化)∙분식(粉飾)한 것으로 오해 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들의 객관적인 기록을 참고로 첨기한다.
다음은 청향(淸鄕)지(誌) 제5호(1989년판) 69쪽~72쪽에 실려 있는 「愚淵書院의 창건(創建)과 유허(遺墟)를 새로이 발견(發見)」이란 제목의 글의 주요 부분(원문 그대로)을 발췌(拔萃)한 것이다.
<이하 발췌문>
「愚淵書院의 創建과 遺墟를 새로이 發見」
編集室
오늘날까지 우리 郡에서 그 이름은 물론 문헌(文獻)마저 남겨지지 않았던 우연서원(愚淵書院)의 창건래력(創建來歷)과 그 유허(遺墟)를 發見 確認하여 記錄하는 것이며 이 사실(事實)의 자료수집(資料蒐集)과 확인작업(確認作業)을 전담(專擔)하여 주신 錦川面 薪旨里 박윤상선생(朴潤相先生)에게 …… (下略)
△ 우연서원(愚淵書院)
눌연(訥淵) 정민도선생(丁敏道先生)은 선조(宣祖)41년 戊申(1608年)에 청도유림(淸道儒林)의 이정탁(李廷卓)∙민지효(閔止孝)∙이담(李潭)∙이개(李漑)∙박숙(朴琡)∙김간(金磵)∙최장(崔嶂)∙박규(朴珪)∙최지강(崔地綱)∙최형(崔逈)∙박동영(朴東英)∙이경춘(李景春) 等과 더불어 숭현숭학(崇賢崇學)의 뜻을 두어 향당(鄕黨)의 先生들을 향사(享祀)하고 강학(講學)하기 위하여 서원(書院)을 청건(創建)할 것을 순모(詢謀:물어서 議論함)하여 이조(李朝) 광해군(光海君) 12년 庚申(1620年)에 淸道 동쪽 상암대(象岩台:지금의 梅田面 堂湖里)에 愚淵書院을 창건(創建)하여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선생(金大有先生)(正言)∙소요당(逍遙堂) 박하담선생(朴河淡先生)(生員)∙경재(警齋) 곽순선생(郭珣先生)(司諫) 세 분 선유(先儒)를 봉향(奉享)하였다. 서원(書院)이 창건(創建)되니 고령(高靈)의 선비 金昌教∙朴文成∙玄風의 선비 徐一元∙白雲龍 等이 불원천리(不遠百里)하여 참회(參會)하고 경전(經典)과 예론(禮論)을 강(講)하니 원근(遠近)의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문풍(文風)이 크게 진흥(振興)되고 우연서원(愚淵書院)은 청도학문(淸道學文)의 中心이 되었다.
불과(不過)4年을 지난 광해조(光海朝)에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이루어져 鄭仁弘(瑞山人 字德遠 號萊菴 領議政) 등 대북파(大北派)가 일시(一時)에 몰락(沒落)하니 前에 대북파(大北派)의 핵심(核心)이자 정인홍(鄭仁弘)의 인척(姻戚)인 박종주(朴宗冑)(高靈人 號二憂軒)가 우연서원(愚淵書院)을 심방(尋訪)한 사실(事實)이 문제(問題)가 되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의 해인 仁祖1年癸亥(1623年)에 훼철(毁撤)되었다.
본 서원(本書院)의 聯享祝文은 訥淵先生逸稿에 수록(收錄)되어 있고, 전술(前述)한 사실은 嶠南誌에 실려 있다.
註① 省略
② 丁敏道先生의 字는 德邵이고 號는 訥淵이며 本貫은 羅州이다. 朝鮮朝 明宗8年 癸丑(1553年)에 出生하여 仁祖13年乙亥(1635年)에 卒하였다.
平生에 學問을 窮究하여 林泉에서 養德하며 後進啓導에 專念하였다.
宣祖朝에 南學敎授兼 九邑訓導에 除授되고 沒後 通政大夫 禮曹參議를 贈職받았다.
訥淵先生逸稿가 刊行되어 世上에 傳한다.
③ 愚淵書院의 舊址(遺墟)는 지금의 梅田面 堂湖里 506番地를 中心한 一帶이다. 지금은 果樹園이 되었고 附近에 柱礎一部가 散在하고 있다.
④ 省略
⑤ 鄭仁弘은 榮達後, 平素의 先師 南冥 曺植의 道交厚契인 道州三先生의 顯彰을 圖謀하여 實行에 着手하던 中 愚淵書院 創建의 士論에 接하여 卽時 道伯에게 緊托하여 積極協助하도록 하였다. 愚淵書院이 埈成된 後, 그의 姻戚이며 大北派의 實勢中의 한사람인 朴宗冑가 南巡하는 機會에 鄭仁弘은 特命하여 그로 하여금 愚淵書院을 尋訪하여 鄕儒를 激勵하게 한 바 있다. 仁祖反正後 이 事實이 問題되어 大北派의 肅淸의 一環으로 擧論되어 同年癸亥(1623年)에 毁撤되었다.
※ 愚淵書院 文獻資料 (내용은 생략함)
◎ 郭警齋先生實記 年譜秒
◎ 訥淵先生逸稿-丁公遺事拔萃
△ 丁先生行狀拔萃 玉山 張升洋撰
△ 丁先生墓表抄 眞城 李中轍謹書
△ 丁先生墓誌銘 永嘉後人 權相翊撰
△ 愚淵書院聯享祝文
◎ 逍遥堂先生逸稿
△ 年譜拔萃
◎ 高靈朴氏大同譜 巻之五 小尹公派 抄錄
◎ 故事大典抄 朴宗冑史料
◎ 嶠南誌 巻之五 拔萃
◎ 淸道郡誌 巻之十五
◎ 朝鮮名人典
(以上)
<봉향한 세 분 선생님의 간략한 소개>
1. 김선생(1479년~1552년)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휘는 대유(大有)∙자는 천우(千佑)∙호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제학(提學) 김준손(金駿孫)선생의 아들이며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선생의 조카이다. 1507년 진사(進士)에 급제, 1519년 현량과(賢良科) 급제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호조좌랑겸춘추관기사관(戶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에 이어 정언(正言: 정6품)이 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칠원현감(漆原縣監: 종6품)으로 가있던 중,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현량과가 폐지되고 급제가 취소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면서 1520년에는 친구인 소요당 박선생과 더불어 사창(社倉)인 동창(東倉: 지금의 매전면 東山里)을 창설하였다.
쇠골(매전면 金谷里) 우연(牛淵)가 절벽 위에 삼족대(三足臺)라는 정자를 짓고 호를 ‘삼족당’이라 하였다. 그 뜻은 계산(溪山)이 족하고, 풍월(風月)이 족하고, 음시(吟詩)에 족하다 하여 삼족(三足)이라 하였다 한다.
1545년 현량과가 복과(復科)되고 조정의 부름을 받자, 왕명(王命)에 따르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라 하면서 일단 상경(上京)길에 올라 도리를 다하는 한편, 평소 관로(官路)에 나가는 것에 염증을 느낀 터라 의도적으로 67세에 노구임에도 하루에 백 리 길을 재촉하다 몸살을 앓게 되자, 병을 얻었음을 빙자하여 이틀 상주(上奏)하고 고향으로 되돌아 와서 삼족대에서 여생을 보냈다.
2. 박선생(1479년~1560년)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휘는 하담(河淡) 자는 응천(應千),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충순공 박승원(忠順公 朴承元) 선생의 장자이다.
151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1524년 서산감역(西山監役), 1525년 사제감 봉사(司祭監 奉事), 1528년 장례원 사평(掌隸院 司評 : 정6품)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현량(賢良)에 추천되었어도 출사(出仕)하지를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을 징사(徵士)라고 한다.
김삼족당선생과 동창을 창설 하였으며 그 옆에 운수정(雲樹亭)을 지었고 섶마리[薪旨里] 선바위(仙巖)에 소요정(逍遥亭)을 지어 기거(起居)하며 명사(名士)들과 어울렸다. 이 중에는 남명 조식(南冥 曺植)∙삼족당 김대유(三足堂 金大有)∙경재 곽순(警齋 郭珣)∙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선생 등도 있었다.
1560년 가훈십조(家訓十條)를 만들어 자손에게 보이고 돌아가셨다.
선암서원(仙巖書院)에 모셔졌고 소요당유고(逍遙堂遺稿) 3권이 있다.
3. 곽선생(1502년~1545년)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휘는 순(珣)∙자는 백유(伯瑜)∙호는 경재(警齋∙敬齋)이다. 사제감 첨정(司宰監 僉正)을 지낸 수령(遂寧)공의 아들이다.
1524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528년 식년문과병과(式年文科丙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 博士)를 시작으로 호조좌랑(戶曹佐郞)∙호조정랑(戶曹正郞)∙춘추관 기주관(春秋館 記注官) 등을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 종4품)에 이르렀다. 운문면(雲門面) 공암리(孔巖里) 앞 냇가에다 곡천대(曲川臺)를 짓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되었다. 우연서원 외에도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향사되었다.
위의 이 고장의 이름난 명유(名儒) 세 분을 눌연선생께서는 손수 연향축문(聯享祝文)을 지어 우연서원에 봉사하신 것이다.
10. 예부운략(禮部韻略)의 감교(勘校)
예부운략(禮部韻略)은 한자(漢字)의 고음(高音)∙저음(低音)∙청음(淸音)∙탁음(濁音) 등 네 가지 음(四音)과 상성(上聲)∙평성(平聲)∙거성(去聲)∙입성(入聲) 등 네 가지 성(四聲)을 분류하고 해설해둔 책으로서 글자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바른 발음(正音)과 바른 발성(正聲)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은 원래 영동(永同)에서 출간한 영동본(永同本)이 있고, 1464년(세조10년)에, 세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황희(黃喜)의 손자인 황종형(黃從兄)이 청도군수로 있을 때 찍어낸 도주본(道州本: 道州는 청도의 옛 이름)이 있었다. 이 ‘도주본’의 판목(版木: 인쇄하기 위하여 글자나 그림을 새긴 나무판)을 청도 적천사(磧川寺)에 보존해 두었는데 전란(戰亂) 중에 소실되었으므로 박경전(朴慶傳)∙박경윤(朴慶胤) 형제분이 ‘영동본’을 보고 새로이 복각(復刻)을 시작하여 1615년(광해군7년)에 완성하였다. 이 해가 만력(萬曆: 명(明)나라 연호) 43년이었기에 이 판(版)을 ‘만력본(萬曆本)’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판목은 지금 섶마리(薪旨里) 선암서원(仙巖書院)에 보존되어 있다.
이 판각을 마친 두 분은 박경윤공의 자제 인(璘)을 눌연선생께 보내어 발문(跋文)을 써주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눌연선생께서는 “이 책(도주본을 말함)의 서문(序文)은 대제학(大提學) 김맹선생(金孟先生)께서 지으셨는데 부족한 내가 감히 그 뒤를 계승(繼承)할 수 있겠는가. 돌아가서 고명(高名)한 문장가를 달리 구해보라”고 하시자 “선생만한 분을 어디서 찾겠습니까”라 하며 굳이 간청하므로 마지못해 이 글을 쓰시었다 한다.(문집 39쪽 참조)
선생께서 감교(勘校: 조사하고 校正하는것)하고‘발문’을 쓰신 것만이 아니라 친한 벗인 성한 손기양(聲漢 孫起陽: 주8 참조)공에게 부탁하여 ‘서문’을 받아주셨다. 서문을 받고 사의와 칭송의 뜻을 담은 서신을 보냈는데 관계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적어 보내신 예부운의 ‘서문’은 글의 뜻이 간중(簡重)하고 취의가 전아(典雅)하여 진실로 지은이의 필법을 읽으니 상쾌합니다”. (문집 36쪽 「손성한에게 답함」 참조)
11. 동창(東倉)터 회복(恢復)
옛날에는 곳간(庫間)에다 볏섬을 쌓아 두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春窮期)에 백성(百姓: 주민)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돌려받는 ‘사환조례’(社還條例)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곡식을 ‘사환’이라 하고 이 곳간을 ‘사창(社倉)’이라 하였다. 청도군은 서쪽에는 사창이 있었으나 동쪽(山東地方: 雲門 ∙ 錦川 ∙ 梅田面)에는 없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삼족당 김선생과 소요당 박선생께서 군수에게 진정하여 허락을 받고, 이어 감사(監司: 觀察使, 지금의 道知事)로 부터도 허락을 받아 ‘사창’을 설치케 되었으나, 실제로 설치할 때는 주민으로부터 재물을 모아서 터도 마련하고 곳간도 지었었다. 이 곳이 지금의 매전면 동산리(東山里, 舊東倉洞)었는데 청도읍에서 동쪽에 있으므로 산서지방(山西地方)에 있는 ‘사창’의 대칭(對稱)으로 동창(東倉)이라고 하게되었다고 한다. 이 ‘동창’ 창설은 어느 때인지 알 수 없으나 1553(癸丑)년에 곳간 하나를 증설(增設)하고 1578(戊寅)년에도 한 채를 증축(增築)하여, 추수 후에 환곡(還穀)을 받을 때는 비축량이 5만 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크게 혜택을 입은 주민들이 사당(祠堂)을 지어 두 선생을 춘추로 제사지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이 ‘동창’은 창사(倉舍)가 무너지고 ‘사창’의 구실을 못하게 되었으나 다시 짓지를 못하고 있던 차에 ‘동창’에서 이십 리 떨어진 곳에 부조(父祖)의 묘를 써 둔 식성군 이운룡장군(息城君 李雲龍將軍)의 미망인(未亡人)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가 공신집(功臣家門)이 된 위세(威勢)를 믿고 그 터를 호조(戶曹)로부터 샀다고 주장하면서 부당하게 점유(占有)하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히 여긴 눌연선생께서 이 사창이 창설된 내력 및 공공성과 창설한 두 선생의 숭고(崇高)한 정신 등을 들어 이를 돌려받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진정서를 영남지방을 순찰중이던 안렴사(垵廉使) 홍세공(洪世恭)공에게 제출하여 이 터를 돌려받게 되었다. 주민은 물론 두 선생의 후손들은 문중을 들어 눌연선생의 이 공덕을 칭송하였으며 그 후 우리 문중에 대한 존중도(尊重度)도 한층 높아졌다.(문집 30쪽∙사진4 참조)
사진 4 : 동창터 회복 진정사안이 받아들여져 회복처분하였다는 결과를 알려주는 진정서 사본(1617. 7. 12 받음)
왼쪽 상단에 처분결과와 날자가 명기되어 있음
1617. 6. . 호조와 순찰사가 수용결정
1617. 6. 26. 청도군수가 회복집행
12. 사귄 벗들
눌연선생께서는 73세까지 사셨을 뿐만 아니라 28년간이나 ‘아홉고을의 도훈도’로 계셨으니 일평생 사귄 벗은 얼마나 되며, 그 벗들은 어떠한 계층이었을까? 무척 많은 선비들과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명확히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문적(文籍)들이 불타 없어지고 몇 편만이 문집으로 남아 있는데, 여기 나오는 이름들만으로는 벗인지, 후배나 제자인지 알 수 없다. 또 문집 28쪽 「양산으로 가는 길에 여러 벗들과 작별하면서 준 글」(梁山途中贈別諸友)을 보아도 「여러 벗」이라고 되어 있어 그 수를 알 수가 없다. 아홉 고을을 두루 순회하면서 그 고을 수령이나 선비들과의 사귐도 많았을 것이다. 문집에서는 인근 고을 선비들이 많이 찾아왔다지만 그 수 또한 명확히 알 수 없고, 몇몇 이름이 있어도 그 인물의 계층을 알 수 없다. 부득이 문집에 시문(詩文)이 실려 있는 분들과 아곡동 동욕록(阿谷洞 同浴錄)에 기명된 분들만을 여기 적기로 한다.
<문집에서>
○ 문집 34쪽 「芝山 曺士友 好益에게 줌」 - 曺好益 선생
○ 문집 36쪽 「孫聲漢에게 답함」 - 孫起陽 선생
○ 문집 27쪽 「朴雲谷 文富를 조상 하는 글」 - 朴文富선생
○ 문집 26쪽 「諸公의 詩」 - 金就礪∙趙靖공
◇ 조호익(曺好益)선생 (1545년 ~ 1609년)
선생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사우(士友)∙호는 지산(之山)∙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1576년 경상도 도사(都事)로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검독(檢督)에 임명되었으나 친상(親喪)으로 사퇴하자 명령을 거부한다고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되어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에 유배(流配)되었다. 이곳에서도 계속 학문에 정진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에서 학풍(學風)을 크게 떨쳤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류성룡(柳成龍)의 주청(奏請)으로 풀려나와 소모관(召募官)이 되고 군민(軍民)을 규합(糾合)하여,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피(鹿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후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고, 1595년 안주(安州)목사, 이어 성천(成川)∙정주(定州)목사를 역임한 뒤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고, 뒤에 선산부사(善山府使: 종3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어 영천(永川)의 도잠서원(道岑書院)∙성천(成川)의 학령서원(鶴翎書院)∙강동(江東)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지산집(之山集)∙심정질의고오(心情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証)∙제서질의(諸書質疑)∙주역석헤(周易釋觧)∙역중추설(易衆推說)∙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 등이 있다.
눌연선생보다 8년 연상이지만 오랜 세월을 학문으로 깊이 사귀었다. 심지어는 눌연선생께서 영천(永川)에 가서 장기간 머물기도 하였다(문집 33쪽 참조)는 가장 친한 분이라 하겠다.
◇ 손기양(孫起陽)선생 (1559년 ~ 1617년)
※ 쪽 「예부운략 ………」대목 참조.
◇ 박문부(朴文富)선생 (15 년 ~ 16 년)
선생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운곡(雲谷)이며, 은산군 박영균(銀山君 朴永均)의 둘째아들 충의공 박천경(忠毅公 朴天卿)의 후예(송와공파: 松窩公派)로서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등의 휘하에 종군(從軍)하여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 3등공신(宣武原從 三等功臣)에 오르고 벼슬은 현감(縣監: 종6품상)을 지냈다.
◇ 김취려(金就礪)공(15 년 ~ 16 년)
공의 자는 이정(而靜)이며, 눌연정에는 대구판관(大邱判官: 종5품) 재임시에 온 것이다. 퇴계(退溪)선생의 문인이란 것 외에는 일체를 알 수 없다.
◇ 조정(趙靖)공(15 년 ~ 16 년)
공의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안중(安仲)∙호는 검간(黔澗)이다.
1612년 2월부터 1616년 11월까지 청도군수로 재임했고, 봉상사 정(奉常寺 正: 정3품 당하)을 역임했다. 이 이상 알 수 없다.
문집에 시문은 없지만 유필영(柳必永) 선생이 서문에서 사귄 사람을 말하면서 조정공 손성한공보다 앞줄에다 거명(擧名)한 김정후(金靜厚)공도 있다.
◇ 김정후(金靜厚)공(1576년 ~ 1640년)
공의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사외(士畏)∙ 호는 동리(東籬)이다.
16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1613년(광해군 5년) 보령(保寧)∙예안(禮安) 등의 현감을 역임하고 직강(直講)을 거쳐 옹진군수(甕津郡守: 종4품)가 되었다.
위의 손(孫) 영천군수(永川郡守: 종4품)∙조(趙) 청도군수(淸道郡守: 종4품)∙김(金) 대구판관(大邱判官: 종5품) 세 분 원님은 종6품인 눌연선생보다 모두가 품계가 높은데도 산을 넘고 내를 건너는 80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눌연선생을 찾아와서 네 분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서 손객자(客)와 진실한 박자(朴)를 운자(韻字)로 하여 시(詩)를 지어 주고받았으니 이는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손군수는 그 전에도 눌연정에 와서 낚시도 즐기면서 머물다 갔다하고, 눌연선생의 시에는 처음 만나는 이도 있다고 하였으니, 손군수가 주선하여 모인 것으로 보인다.
때는 봄이 분명하고 해분은 조정 청도군수 재임기간인 1612년부터 1616년 사이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눌연선생의 성화(聲華)가 넓게 알려져 있었다고 여겨진다.
<동욕록(同浴錄)에서> ※ 사진 5 참조
○ 淸道 朴慶傳 자 孝伯 호 悌友堂 1553년생 (당시 66세)
○ 永陽 鄭 湛 자 淸允 호 復齋 1552년생 ( 〃 67세)
○ 〃〃 鄭四象 자 汝燮 호 愚軒 1563년생 ( 〃 56세)
○ 〃〃 曺以咸 자 克貞 1566년생 ( 〃 53세)
○ 〃〃 鄭四勿 자 亦顔 호 昆峯 1574년생 ( 〃 45세)
○ 〃〃 朴 暾 자 明叔 1577년생 ( 〃 42세)
○ 〃〃 孫 瀣 자 叔浩 1587년생 ( 〃 32세)
○ 〃〃 鄭 㙱 자 器古 1595년생 ( 〃 24세)
○ 〃〃 孫 沆 자 季浩 1599년생 ( 〃 20세)
○ 仁同 張顯光 자 德晦 호 旅軒 1554년생 ( 〃 65세)
○ 玄風 郭 赾 자 稚靜 호 省齋 1559년생 ( 〃 60세)
○ 密陽 朴以訥 자 汝敏 1569년생 (당시 50세)
○ 〃〃 安 㺬 자 待甫 호 五休子 1569년생 (당시 50세)
○ 星州 李心弘 자 毅甫 호 竹峯 1569년생 ( 〃 50세)
○ 月城 鄭克後 자 孝翼 호 䨇峯 1577년생 ( 〃 42세)
○ 慶山 陳 晛 자 叔昇 1581년생 ( 〃 38세)
○ 月城 權 鎣 자 器之 1589년생 ( 〃 30세)
○ ? 孫宇男 자 吉甫 호 綸菴 1564년생 ( 〃 55세)
○ ? 李光暹 자 晦可 1564년생 ( 〃 55세)
위 명단을 볼 때 충청도사람까지 참가하였고, ‘永陽’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지금의 경북영양(英陽)에 있던 온천(溫泉)인 듯하여 밝혀 보려 하였으나 밝힐 수가 없었다.
이 때가 1618년(戊午)년 가을이라 하니 눌연선생의 66세 때이다.
참가자들을 연령별로 헤아려 보니, 60대가 4명, 50대가 7명, 40대 3명, 30대 3명, 20대가 2명이다. 따라서 60대의 4명만은 벗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나머지는 벗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먼 곳에 무엇 때문에 가셨을까. 단순히 온천욕(溫泉浴)을 즐기기 위하여 가신 것은 아닐 터이고, 참가자 나이로 보아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학술(學術) 모임이라고도 볼 수 없다. 관련된 사실기록이 전혀 없이 달랑 이 명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니 더욱 알 수가 없다.
이모저모 분석∙검토 결과 다음과 같은 회동(會同) 성격을 상정(想定)해 볼 수 있다.
“영양에 사는 부유(富裕)한 인사(人士) 정복재(鄭復齋)공이 자제(子弟)들의 학문의 성취와 식견(識見)을 넓히기 위하여 고명(高名)하신 교수 눌연선생을 모시면서 유가 될 만한 몇 분 노(老) 선비를 함께 초청하여 상당기간을 온천욕도 하고 학문의 강론(講論)과 질의를 하는, 말하자면 요즘의 ‘특별초청강의’나 ‘특별강좌개설’ 또는 ‘세미나’ 같은 거였지 않았을까.”
하여튼 20명의 명단만 적힌 세 쪽짜리 종이쪽지 하나로 눌연선생의 또 다른 면모(面貌)의 한 자락을 펼쳐 보게 된 성 싶다.
사진 5: 아곡동욕록(阿谷同浴錄) 첫 쪽
※ 이것은 오래된(389년전) 문적(文籍)으로서 가보적(家寶的) 가치를 지닌 것임.
13. 저서(著書)
선생의 저서(著書)로는 집중예설(集中禮說)과 역경연의(易經演義)가 있다. 집중예설은 예(禮)를 주제(主題)로 한 여러 학설을 비교∙분석(比較∙分析)하고 해설(解說)한 교과서(敎科書)와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역경연의 역시 주역(周易)을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니 도훈도로서 유생들 교육에 필요한 교과서 성격의 책일 것으로 짐작된다. 주역은 수십 권으로 되어있고 책으로만도 20여 책이나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 이 연의는 매우 분량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들은 어느 대(代)인지 분명치 않으나 종갓집 화재로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선생으로부터 교수받은 아홉 고을 선비들이 필경 이 책을 베껴 갔을 터인데 그 후손들이 혹시나 지금도 보존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 후대에라도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14. 서거(逝去)
1635. 3. 13(仁祖 23년 乙亥) 83년을 수(壽)하시다 돌아가시었다.
나라에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의 품작(品爵)과 예조참의(禮曹參議: 정3품 당상)의 관직을 추증하였다.
묘(墓)는 마릉곡 부채산(馬陵谷 扇子嶝: 금천면 동곡리 山12-3번지)에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쪽을 향한 방위)이고, 배위 숙부인 진주류씨(配位 淑夫人 晋州柳氏)의 묘가 선생의 묘 오른편(사람이 보면 왼편: 人之左)에 쌍분(雙墳)으로 쓰여 있다.
묘갈명(墓碣銘)과 묘표(墓表)∙묘지명(墓誌銘)이 있다.(문집 56쪽~61쪽 참조)
묘지명은 족보(辛未譜∙辛丑譜∙巳卯譜)와 파보(派譜)에 실려 있다.
○ 묘갈명 - 홍문관(弘文館)의 벼슬을 지낸 정재교(鄭在敎: 본관 淸州) 지음.
○ 묘표 - 장사랑 혜릉참봉 이중철(將仕郞 惠陵參奉 李中轍: 본관 眞城) 지음.
○ 묘지명 - 권상익(權相翊: 본관 安東) 지음.
1988. 8. 31, 돌비[石碑]를 세우는 동시 봉분 둘레에 호석(護石)을 설치하고, 규모가 큰 새 상석(床石)으로 바꾸었다.
비문은 영남대학교 사범대학장 정순목 교육학박사(嶺南大學校 師範大學長 丁淳睦 敎育學 博士)가 새로 지은 것을 새겼다. (파보 상권 57쪽∙문집 2쪽 참조)
15. 경눌재(景訥齋) 이야기
사림(士林: 孔子의 道를 닦아가는 선비들)에서는 선생의 고결(高潔)함과 깊고 높은 학덕(學德)을 숭모(崇慕: 존경하고 사모함)하여 ‘눌연강당’ 옆에다 사당(祠堂)을 겸한 재실(齋室)을 지어 춘추로 재향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어 모르고 있었는데, 근년에 와서야 두 가지 경로로 알게 되었다. 그 첫째는 1987년 ‘파보’ 초단을 꾸미고 있을 즈음에 방지 고성이씨(固城李氏) 문중의 ‘문장’인 관수 이영기(觀水 李榮基)씨가 이 사실을 알고서는 내가 평소에 문중 일에 관심이 많아 보이니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서’라며 쪽지 하나를 건네주기에 받아보니 ‘朴時翰文集’과 ‘景訥齋’란 여덟 자였다. 그의 말인즉 그 문집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한담(閑談)중에 우연히 들었기로 적어 두었다는 것이었다. 문집에 실려 있다면 필경 ‘경눌재’ 창건에 관여하였을 것이며, 창건에 동참을 구하는 통문(通文∙儒通)을 지었거나 창건에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상량문(上樑文)∙후토축문(后土祝文)∙창건기(創建記)∙향사축문(享祀祝文: 祭享文)들 중에서 어느 하나이든 글을 지었기 때문에 그 글을 문집에 실었을 것이다.
둘째로는 1993년 출간된 청향(淸鄕: 향우지) 제7호에 청도의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가 쓴 ‘눌연정의 연혁(沿革)’에 “사경재 박경림(思敬齋 朴瓊林)을 비롯한 ‘사림’들이 ‘눌연강당’ 옆에 ‘경눌재’를 지어 선생을 향사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 문중에는 왜 단한자의 기록도 없을까. 짐작컨대 과히 어렵지 않다. 눌연정을 다시 세우는 데도 유림(儒林)의 힘을 얻었는데, ‘재실’마저 복구 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이제는 눌연정이 강당으로 쓰이지 않으므로 눌연정에서 행사(行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굳이 재실을 다시 지어 그 관리와 보존에 불필요한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기록 또한 있을 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사경재와 박시한공이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 알아보려 하였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별 의미가 없는 듯하여 그만 두었으니 경눌재의 창건년도와 없어진 시기는 알 수가 없다.
16. 조선명인전(朝鮮名人典)에 오름
28년간이나 경상좌도(慶尙左道) 아홉 고을 향교의 도훈도라는 유례없는 직분을 맡아 훌륭하게 흥학(興學)의 임무를 완수한 위훈(偉勳)이 인정되어 조선조의 명인(名人)의 반렬(班列)에 오르게 되어 조선명인전에 수록됨.




동산재(東山齋)
금천면 방지리에 있는 고성이씨 재사이다. 배향인물은 이억구(李億耈 선생인데 자(字)는 여일(汝一), 호는 송계(松溪)이다. 1652녀 (효종3)에 태어나서 1704년(숙종 30)에 졸했는데 향년 53세였다.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는데 교지가 전해지고 있다. 묘소는 운문면 봉하리(鳳下里) 용이촌(龍耳村)이다.
1940년에 창건했는데 목조와가 팔작지붕 4칸(방3, 마루1) 중당 협실형이다. 대청마루에 6세손 이정국(李庭菊)이 쓴 동산재소지(東山齋小識), 6세 사손(嗣孫) 이정부(李庭復)가 쓴 동산재기사문(東山齋記事門)이 걸려 있다.






금천면 방지리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에 속하는 법정리.[개설] 금천면과 운문면 경계선에 위치한 마을로서 상방지와 하방지가 합쳐서 방지리가 되었다.
[명칭 유래]
방지리는 방마루, 방말, 방지라 불리며 상방지와 하방지가 합쳐서 방지리가 되었는데, 옛 이름이 방지라고 하는 곳에는 못[저수지]가 생긴다는 전설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운문댐이 생겨 선조들의 예언이 적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마을이다. 동창천변의 자갈과 모래가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중동면의 지역이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방지동, 하방지동을 병합하여 방지동이라 해서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방지동에서 방지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동쪽으로 동창천이 지나가고 북쪽으로는 운문댐이 위치한다. 마을 뒤쪽으로 한내재봉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다. 국도 20호선 동쪽으로 동창천이 만든 충적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멀리 억산이 위치한다. 충적 평야는 벼농사 중심의 영농을 하고 있으며, 마을 뒤쪽 경사지는 과수원을 조성하여 사과 및 복숭아, 대추 등을 생산하고 있다.
[현황] 2011년 12월 31일 현재 총 109가구에 204명[남자 92명, 여자 11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남동쪽은 금천면 임당리, 북동쪽은 운문면 방지리, 남서쪽은 금천면 동곡리, 북서쪽은 금천면 사전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경지 면적으로는 논 0.374㎢ , 밭 0.265㎢, 과수원 0.221㎢이다. 굼마는 동네를 개척할 당시 제방이 튼튼하지 못하여 홍수가 자주 생겼기 때문에 마을 주변의 산기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토지가 천박하여 주민들이 굶주리게 된다고 하여 굼마라고 하였다. 하방지는 마을의 위치상 아래쪽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방지와 하방지 사이를 국도 20호선이 관통하여 지나고, 상방지 쪽은 과수 경작 그리고 하방지 쪽은 벼농사 중심의 경제생활을 이루고 있다. 운문면사무소 방면 국도 20호선 좌측에는 방지 초등학교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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