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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의 고성(古城) 오례산성(烏禮山城)

청도의 고성(古城오례산성(烏禮山城)/ 행전  박영환

 

  2019년 6월 19일(수) 청도문화연구회 회원들과함께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와 청도읍 거연리 뒷산 능선에 있는 오례산성(烏禮山城)을 찾았다. 오례산성은 오례산의 정상부인 해발 520~620m에 위치하고 있으며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낙동강을 따라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이 산성은 오혜산성(烏惠山城), 오례산성(鰲禮山城), 구도산성(仇刀山城)으로도 부른다.

 

09:40분 산중턱에 있는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12:36분에 정상에 도착했다. 12:50분 식사를 했으며 1:46분 하산을 시작하여 14:30 주차장에 도착했다.

 

 

 

 

회원들이 올라가고 있다

 

 

 

유적지 관련 자료

1) 우리나라의 성곽(도정탁 : 울산지역 성곽의 성격 요약)

성곽이란 외적으로부터 국가 혹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시설이며, 지형적 여건을 고려하여 인공적으로 축조한 것이다. 성곽은 구성원들의 방어를 목적으로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 지형을 잘 이용한 천연적 요새라 하더라도 인공적인 축성의 요소가 없으면 성곽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언제부터 축조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사기의 조선전 기록에 의하면 우거왕이 성을 지키고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기원전 2세기인 위만 조선 시기에 이미 성곽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남쪽 지역은 중국의 영향을 북쪽에 비해서 비교적 늦게  받았기 때문에 성곽의 축조도 다소 늦은 초기 철기 시대에 해당하는 삼한시대에 성곽이 축조되었다. 성곽의 형태는 방형이 아닌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대부분 산성의 형태이다.

초기의 성곽은 목책 등 간단한 시설로 축조하였으나 점차 성곽의 재료로 흙을 이용한 토성과 돌을 이용한 석축으로 발전하였다. 목책은 나무 기둥을 엮어 만든 원시적인 울타리 형태이지만 외부 세력의 침입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목책에서 더욱 발전한 형태가 토성이다. 토성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축조하였는데 평야지대에서는 판축법으로 흙을 다져서 성곽을 축조하였고, 산악 지대에서는 삭토법으로 산등성이의 주변 흙을 파내어 둔덕을 쌓아올려 축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석성이 본격적으로 축조된 것은 삼국이 고대국가의 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성곽이 주로 판축법을 사용하여 토성을 쌓았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협축과 편축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석성을 축조하였다. 협축으 성곽의 안팎을 모두 수직에 가까운 방법을 쌓는 방법이며, 편축은 축성을 할 때 자연 할석의 편평한 한쪽 면을 성벽의 바깥 부분으로 맞대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를 땔 때 나오는 부스러기를 넣고 다시 그 안쪽에 흙과 잡석을 채우는 방법을 작업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의 성곽들은 대부분 편축의 방법을 사용하여 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성이 대부분 산성인 것과 관련이 깊다. , 편축은 주로 산성에 많이 사용하였고 협축은 평지나 성문 좌우에 많이 사용하였다. 하지만 동일 성곽 내에서도 협축과 편축을 병용하여 성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성곽 축조 방법을 나눌 필요성이 적다.

우리나라 성곽의 배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산성의 평면 구성은 서양이나 중국과 달리 산지가 많은 지형이기 때문에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성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구조가 심한 굴곡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산성에 들어가서 적을 지키는 전통적인 전술로 인하여 성곽 안에는 특별한 부대시설을 갖추지 않고 적당한 지형을 이용한 경우가 많았다.

 

2) 성곽의 종류와 성격

 축성 제료에 따른 분류로 토성, 석성, 토석혼축성, 목책, 전축성 등이 있다.

 위치와 형태에 따라 산성, 평지성, 평산성, 국경성, 해안성 등이 있다.

 거주 주체에 따라 도성, 왕성, 황성, 재성, 행재성, 읍성, 창성(倉城) 등이다.

 목적에 따라 행정적인 성과 구사적인 성이 있다.

이처럼 성곽은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의 성곽이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다양하게 분류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0%를 산지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형을 이용한 산성이 대부분이다. 삼국시대부터 축조된 성곽의 주류가 산성이다. 우리나라의 산성은 자연의 지세를 잘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초기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부근에 일정한 띠를 두르듯이 축조한 퇴뫼형이 많으며, 후기로 내려오면서 골짜기와 계곡을 둘러싼 포곡형으로 성곽의 축조 형태가 점차 바뀌었다.

퇴뫼형은 대체로 규모가 작은 산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고 포곡형은 골짜기와 계곡을 내부에 포용하고 있는 구조로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규모가 큰 산성 축조에 사용되었다. 또 규모가 큰 산성과 도성의 경우에는 두 형식을 결합한 복합식 산성의 형태도 있다.

산성 축조에 제일 적합한 지형은 사방이 높아 성과 밖에서는 성곽 안의 종정을 살필 수 없고 성 안의 중앙부가 낮아 풍부한 수원과 넓은 공간을 갖추고 있는 고노봉(拷栳峰)이 성곽 입지의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 외에도 산봉(蒜峰)이라 하여 정상부가 평탄하고 넓으며 사방이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도 산성 축조에 유리한 지형이다. 성곽의 입지가 좋지 못한 지형은 성곽의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경우와 두 개의 봉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지형 등이다.

우리나라의 산성의 경우 대부분이 축성 제료로 돌로 쌓은 석성이다. 처움부터 석성으로 축조한 경우도 있으나 토성이었던 곳을 석성으로 개축한 경우도 많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초기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개축이 많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산성의 축조 방식은 물림쌓기 방식으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약 1 3푼씩 뒤로 물러가면서 축조하여 전체적으로 성벽이 15도 가량의 경사지게 쌓았다. 이는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을 공격하기에 좋은 구조이며 성벽의 단면이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어 쉽게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도록 축조한 것이다.

군사적 기능을 가진 성곽 외에도 읍성과 같이 행정적 기능을 가진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의 읍성 축조는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말부터 해안가를 자주 침범하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읍성은 평소에는 지역의 행정 기능을 수행하다가 왜구가 침입할 때에는 백성들을 성에서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조선 초기에 행정 구역은 330개소이었으나 읍성의 수는 190개소가 있다. 읍성은 대부분 석축으로 경상도에 45, 전라도에 35, 함경도에 23, 평안도에 33개소로 국경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읍성의 축조 양식은 산성과 평지성의 절충형이라 할 수 있는 평산성(平山城)의 형태와 조선 초기부터 나타난 평지에 축조하는 평지성의 형태가 있다. 릅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부정형의 타원 또는 원형을 이루고 있고, 읍성의 성벽 축조 재료로 초기에는 흙을 사용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새로 정비하면서 대부분 석재로 개축되었다.

읍성 내에는 관청과 객사, 도로 및 우물 등을 갖추어 평소에는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다가 외적의 침입 때에는 주민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으로도 이용되었다. 읍성은 당시에 군사적 중심지에 설치되었는데 그 지역은 오늘날 도시로 발전한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읍성은 도시 개발 정책에 의해 성곽이 크게 훼손되어 원형 보존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의 읍성들은 체계적인 복원 계획에 의해 관리되어 관광 자원과 역사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멀리 새마을 발상지 신도마을이 보이고 있다>

 

<멀리 한재 고개도 보인다>

 

 

<계단의 수가 1100개 정도 된다고 한다. 올라갈 때는 도움이 되는데 사실 내려올 때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오례산성(烏禮山城)은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와 청도읍 거연리 뒷산의 해발 500626m의 능선에 있는 산성으로 오혜산성(烏惠山城), 오례산성(鰲禮山城), 구도산성(仇刀山城)으로 부른다. 오례산성은 오례산의 정상부인 해발 520~620m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앙이 함몰되어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낙동강을 따라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기에 좋은 위치이다.

 

<문 초석의 흔적>

 

성의 크기는 대략 남북 1.0, 동서 1.5로 전체 둘레는 4.6이다. 사방이 가파른 능선과 암벽으로 되어있으며, 서문지와 남문지, 봉수대, 망루, 샘 등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밀양(密陽)과 경산(慶山)에서 수취한 군량미를 보관하는 군창(軍倉)으로 이용하였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충청도 방어사 박명현(朴明賢)이 대규모 수축을 꾀하였으나, 정세가 위급하여 끝마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축성의 무너진 모습>

 

<원상으로 잘 보존된 축성>

 

회원들이 축성을 살펴보고 있다

 

 

<토성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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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향토사학자) 선생이 오례산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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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선생의 설명(동영상)

 

오례산성은 이서국이 신라의 침공으로 병합될 당시 최후까지 저항했던 성으로 마전암과 조방대의 전설이 전해 온다. 이서국이 멸망한 이후 청도지역에는 대성군이 만들어졌다. 오례산성은 신라가 대사(大祀)를 지낸 3산 중 하나인 혈례산(穴禮山)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대사(大祀)를 지낸 곳인 오례산성은 신라 화랑들의 유오지로서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오례산성 동쪽 바위 절벽 사이에는 화랑도의 수련지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장군굴이란 석굴이 남아 있다.

 

<잠시 휴식>

 

三國史記잡지에 의하면, 신라는 삼산 오악이라는 명산대천에 大祀, 中祀, 小祀 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대사를 지낸 三山 柰歷, 骨火, 穴禮인데, 이중 혈례산이 지금의 오례산으로 비정된 바 있다. 삼산오악에 대한 일련의 比定 연구에서 여러 사료에 나오는 대성군을 청도군의 고지명이라고 보는 점, 대성군에 혈례산이 위치 한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삼산의 하나가 청도에 있는 오례산이라는 것이다. 오례산이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위치가 잘못 비정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지만, 한때 신라 삼산의 하나로 비정될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또한, 인접한 사촌리의 선사유적이 제사유적의 성격이 있으므로, 오례산이 선사시대부터 명산이었음을 반증해준다.

오례산성에 대한 기록은 많은 문헌에서 접할 수 있다. 그 중, 오례산성의 초축기사는 조선조 태종 10 2 29일 기사에서 나타난다. 이 기사에서는 경상도, 전라도에 각각 6개씩 성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노루발>

 

 

<산수국>

 

 

 

 

산불에 소나무가 탄 흔적 

 

<아래는 절벽이다>

 

오례산성은 초축기사에는 오혜산성으로 명기되었으나, 선조때 임란을 맞으면서 수축한 기사에 오례산성으로 불리어지면서, 후속의 문헌에는 모두 오례산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1450)에 의하면 오혜산 석성은 군동쪽 이십이리에 있으며, 둘레는 일천삼백오십이 보이고, 안에는 개울이 2곳이고, 저수지가 3곳으로, 우물이 5군데 있고, 또 군수창고가 있는데, 밀양과 경산군창을 아울러 두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는 산성은 군의 동쪽 오혜산에 있다. 둘레는 1,350자나 되고, 높이는 5자이고, 작은 개울이 3곳 있고, 저수지가 3곳 있다. 샘이 1곳이 있으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 군수창고는 없고, 처음 석축을 쌓은 년도와 달은 알지 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오혜산성 석축의 둘레는 9,980척이고, 높이는 7자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가운데에는 3곳의 계곡이 있고, 5곳의 저수지가 있으며, 3곳의 샘이 있다. 지금 살펴보니 구도를 말하기는 오례산인데, 례는 혜자와 더불어 소리가 비슷하다고 하니, 곧 이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도군읍지(1834)에는 오혜산성석축의 둘레는 9,980척이고지금은 폐하여 사용하지 않는다중간에 3곳의 계곡이 있고, 5곳의 저수지가 있으며우물이 3곳이 있다자세히 살펴보면구도 또는 오례산 이라고 하는데례는 혜자와 더불어 소리가 가까운데 의심이 가지만이 성을 새로 살펴보면 동쪽과 북쪽은 모두 깍아 지른 벼랑에 의지하고 남쪽과 서쪽은 모두 석축을 설치하여 서쪽과 남쪽 문을 튼튼하고 견고하게 보수하였다임진란 때 충청도 방어사 박명현이 조정의 명을 받아 충청도 군사를 데리고 와서 수축하였으나완성치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내용은 김태호(향토사학자)선생의  '청도의 고성(古城) 오례산성' 옮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에서 단체촬영>

 

<산 정상에 묘소가 있었고  그옆에 붉은 딱총나무 열매가 길손을 맞고 있었다. 올라오는 곳곳에 묘지들이 이장된 흔적이 있었으나 이 곳은 아직도 후손들이 잘 관리하고 있는 듯했다. 이 딱총나무도후손들이 조상을 위해 일부러 심은  것 같다.>

 

 

 

<식사>

 

<오늘 드디어 숙제 하나를 마쳤습니다. 늘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자꾸 미루고 있었는데 드디어 정상에 오고 보니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정말 보람있는 답사였습니다. 오늘 동행을 한 문화연구회 회원님 그리고 자상하게 오례산성을 설명해주신 김태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

 

 

 

 

<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