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창계 100주년 군자정 강학계
행전 박영환

2019년 9월 16일(음 8월 18일),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고성이씨 추원재에서 창계 백주년 군자정(君子亭) 강학계(講學契)가 열렸다.
군자정 강학계는 1919년(己未) 12월, 모헌공 이육 선생의 유풍유열(儒風遺烈)을 우러러 받들어 경모하는 마음에서 370 여 사림이 뜻을 모아 군자강학계를 조직했다. 매년 음력 8월 18일, 유호 군자정에서 강회를 하여 경서를 송독하고 시를 지어 읊는 등 창계 당시의 전통을 흐트림없이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해(1919)는 특히 창계 100주년을 맞아 경향 각지에서 700여 유림들이 모여 다양한 행사로 강학계의 의미를 되살리고 특히 100주년 기념 한시 백일장을 열기도 했다.

추원재

축하공연

향사 전 헌관 및 유림대표가 좌정하여 있다



제관들이 도열하여 있다



초헌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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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헌공께 공손히 절을 올리고 있다

시제

심사위원 - 시작에 대한 주의 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백일장 참가자들

전구의 운자- 수

결구의 운자 - 희

참가자들이 시작에 몰두하고 있다

심사장면

장원 작품 발표


창계 백주년 기념 백일장 시상식에 참석하신 분들

이승율 군수 축사 - 이 군수는 모헌공의 후손이기도 하다

심사위원

장원 수상자

꽃 중에 군자인 연꽃 속에 자리 잡은 군자정

<저도 한시백일장에 참가하여 글을 제출했습니다. 제일 끝자리 상 하나 받았습니다.>
君子亭 講學契 一百週年 記念 군자정 강학계일백주년기념
행전 박영환
創契君亭百歲時 군자정 강학계 백주년 기념시에
慕翁懿蹟孰無知 모헌공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누가 모르겠는가
文章卓犖養鄕士 뛰어난 문장으로 향토의 선비를 길러내고
性學隆崇爲大師 융숭한 성리학으로 큰 스승이 되셨네
常禮興仁千世繼 예를 숭상하고 인을 일으켜 천세를 이어가고
修風導俗萬年垂 풍속을 닦고 이끌어 만년 동안 드리우리
先生自適吟詩處 선생께서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던 곳에
此會綿綿發展熙 이 모임 끊임없이 발전하여 빛나기를 바라네

모헌공 이육선생 산소
모헌(慕軒) 이육(李育) 선생의 생애와 행적
자는 원숙(元叔)이며 호는 모헌(慕軒)이고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이다. 성리학을 숭상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년기부터 총명하였으며 부모가 교훈이나 감독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장성해서는 백형인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과 중형인 망헌공(忘軒) 이주(李冑)를 따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나날이 학업에 힘써서 그 성취함이 빼어났다.
특히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행하는데 힘을 다하였기에 점차 사림에서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가 지향한 성리학적 실천윤리의식의 근원은 가문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문을 보면 5대조 행촌공(杏村公) 이암(李嵒) 이래 대대로 문한(文翰)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문인학자가 배출되었기에 고려조로부터 명벌(名閥)의 반열에 올랐고 조선 초기에도 성리학을 숭상하는 사림파 가문으로 세인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같은 가풍에 따라 유학을 바탕으로한 인격형성이나 가치관 확립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쌍매당, 망헌 두 형이 유학사상에 바탕 된 경세의 의지를 펴고자 일찍이 벼슬에 나아간데 비해 그는 부친을 봉양하는데 마음을 다하다가 성종 22년(1491)에 친상(親喪)을 당하게 되니 애통함을 다하고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여막(廬幕)에서 시묘하였다. 그 후 성종 24년(1493)에 문음(門蔭)으로 안기도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4년이 지난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 쌍매당, 망헌 두 형이 거제도와 진도로 각각 유배되었고 다시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는 더더욱 참혹하여 중형 망헌은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곧이어 한양으로 옮겨와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을 당하였고 외아들마저도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의 갑자사화는 온 집안의 불운을 가져와 비통함을 감내해야 했다. 그의 선친 승지공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아버지로 몰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동생 수찬공(修撰公) 이려(李膂)도 진도로 유배되고 숙부인 이굉(李浤)과 이명(李洺)도 영해와 영덕으로 각각 유배되었으니 한 가문의 수난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당시 통분을 삼킨 체 난세를 개탄하면서 세상을 피하여 임천에 은거하고자 안동에서 남하하여 청도 유곡(柳谷) 죽림촌(竹林村)에 정착하였다.
이곳 청도는 공이 지난 날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중형 망헌을 문후하고자 왕래한 적이 있던 곳인데 당시에 그는 유곡 죽림촌을 지나다가 “山不高而秀麗하고 地不廣而肥沃하니 가히 전거(奠居)할만한 곳이로다. - 산이 높지는 않으나 수려하고 땅이 넓은 편은 아니나 비옥하니 가히 머물만한 곳이다-”하고 뒷날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는 유곡에 머물면서 유학적 실천윤리를 실행하고 향당의 후학을 가르치며 미풍양속을 교화하는데 진력하였다.
한 편 연못을 파고 연을 심은 가운데 정자를 지어 ‘군자정’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詩), 부(賦)로써 그 뜻을 펴고 문주(文酒)로 그 회포를 달래기도 하였으며 일찍이 중형 망헌이 진도 배소에서 지은 ‘방백한부(放白鷴賦)’를 벽에 걸어두고 원사(寃死)한 형을 사모하기도 하고 바람 맑은 아침이나 닭 밝은 저녁이면 단종(端宗)의 두견시를 읊으면서 눈물을 흘려 소맷자락을 적셨고 한정(閒靜)한 날 정대(亭臺)의 청류양풍(淸流凉風)과 원림(園林)의 풍미에도 울울불긍(鬱鬱不肯)하였다고 한다.
그후 중종(中宗) 반정으로 난정이 종식되고 공은 중종 2년(1507)에 사마시(司馬試) 진사과에 합격했는데 최근 계명대학교(啓明大學校)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덕정묘춘증사마방복(正德丁卯春增司馬榜目)”에서 모헌공이 사마시 진사과에 3등 제7인(합격자 100명 중 37인)으로 합격한 사실을 고증할 수 있다.
중종 2년, 어머니 숙부인(淑夫人) 양천 허씨가 별세하니 아버지 상 때와 같이 엄수한 뒤 “순 임금이 종신토록 그 부모를 극진히 사모하였다.”는 큰 효도를 본받아 자호(自號)를‘慕軒’이라 하였다. 그는 가문이 겪은 엄청난 피화로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후진교도(後進敎導)에 전력함으로 유학자의 본분을 실현하고자 유곡에 전거(奠居)한 후 건립한 ‘君子亭’을 일명 ‘慕軒精舍’라 명명한 것도 다분히 이에 연유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가 살아오는 동안 시속(時俗)을 교화하며 향토와 교유하고 처세한 유적 등이 적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임진왜란, 인조반정, 갑자정변 같은 국난을 겪어온 터라 고증할 자료가 거의 없고 다소의 일화가 구전으로 전하고 있는 실정이라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청도문헌고’에서도 “모헌공 장자의 문집이 병화로 소실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보더라도 그의 많은 문적 등이 병화로 소실된 것 같다.
후손들은 본거지인 유호(柳湖)를 중심으로 늑평(勒平), 연지(蓮池), 무동(舞洞), 거연(巨淵), 관곡(館谷), 명대(明坮), 방지(芳旨) 등에 분포되어 있다.
묘소는 부인인 숙인(淑人) 흥해 최씨와 쌍분으로 유호연지를 바라보는 곳 원산 기슭에 있다. 넓은 묘정에 서산옹(西山翁) 김흥락(金興洛)이 찬한 묘비와 석물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연화부수(蓮花浮水)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국(形局)’으로 자손이 번창할 명당이라 하여 태백산 지맥의 신령스런 땅으로 영남명기(嶺南名基)로 세칭되고 있다.
공께서 타계한지 400여 년에 후손들은 수 천호 대 문벌을 형성하여 대대로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있으니 공의 음덕인 것 같다.
**위의 내용은 ‘慕軒固城李先生諱育實記’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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