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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군 운문면 지룡산성

 청도군 운문면  지룡산성/ 행전  박영환

 

 

                                       <아래서 바라본 지룡산성>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산53 일대에 위치한 운문산성(雲門山城)은 일명 호거산성(虎踞山城) 또는 지룡산성(地龍山城)으로 부른다. 운문산성은 복호산(伏虎山·678m)과 지룡산(池龍山·659.2m)을 중심으로 석축과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다. 운문산성의 총 길이는 약 2.6이며, 계곡부의 수문지를 비롯하여 문지 3개소,  5개소가 확인되나 흔적은 미약하다. 대체로 북서쪽은 자연 절벽을 이용하여 토성으로 쌓았고, 암반이 많은 남동쪽과 북동쪽은 암반 위와 그 사이를 막은 석축이 조금씩 남아 있다. 성 내부는 약한 경사의 평탄면이 성벽을 따라 이어지고 있으며, 계곡 상단에 절터로 알려진 터가 있다. 성 안에는 북대암 쪽으로 흐르는 계곡이 있으나 수량이 적으며, 식수를 구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대군을 수용하기에는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또 사방이 천연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적을 막기에 용이하다.

 

 <몽돌더미 - 방어용 무기로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노(爐)의 받침으로 사용된 듯하다고 한다>

 

 

  운문산성의 축조 시기와 목적은 알 수 없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927(신라 경애왕 4)에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할 때 기지로 삼았으며, 마을 주민들이 청동제 그릇 등을 발굴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고려 무신 정권 시기에는 운문을 중심으로 김사미 난이 일어났을 때 농민군들이 운문산성에서 정부군에게 저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에는 운문산성을 중심으로 박경전(朴慶傳) 등 청도 의병들이 많은 활약을 하였다고 한다.

  운문산성은 경주에서 밀양으로 가는 교통로와 대구에서 언양 방면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에 만든 산성으로 그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하는 오갑사와 연관지어 추론하면 운문산성은 오갑사에서 신라의 군사들이 교육과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인 군량미와 병기, 식료품들을 보관한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운문산성의 남쪽 성루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아래쪽에 대작갑사와 장군평이 한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운문산성에서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군사 훈련을 파악하고 전체를 지휘 통솔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운문산성 안에는 아직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절터가 남아있다. 이곳을 가슬갑사지로 추론해 본다. 가슬갑사는 원광법사가 머물면서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였고, 점찰보를 시행한 것은 가슬갑사의 중요성과 오갑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말해 준다.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가슬갑사를 보호하고 군사 훈련 과정에서 필요한 물품들의 보관 장소로 만든 것이 운문산성으로 추론한다.

 

2) 추정 가슬갑사지

  가슬갑사를 중심한 오갑사 지역은 화랑정신의 발상지요, 삼국통일의 기초가 형성된 곳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오갑사 중 대작갑사(雲門寺), 천문갑사, 소작갑사(大悲岬寺), 소보갑사의 대략적인 위치는 추정되고 있으나 가슬갑사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고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옛 기록에는 가슬갑사지에 대해서 명기(明記)를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그 터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가슬갑사가 오갑사 중 다른 사찰에 비해 그 중요성과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오갑사의 기능이 상실되고 난 뒤 당시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슬갑사는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 세속 오계를 전수한 사실로 인해 다른 사찰에 비해 그 중요성이 높았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 일연법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가슬갑사지를 기록해 놓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청도문화연구회 회원들이 가슬갑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흩어진 기와조각을 살펴보고 있다>

 

  대작갑사를 비롯한 오갑사는 원광법사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즉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기 100여년 전인 신라 진흥왕 11(557)에 어떤 신승이 금수동에 들어와 소암을 짓고 3년을 수도하다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가운데 대작갑사(현 운문사),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소작갑사(일명 대비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7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룩된 오갑사는 단순한 종교적 의미로 지어졌다기 보다는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그 이유는 운문산을 중심한 깊은 골짜기에 오갑사를 짓고 또한 그 창건주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중요하고도 비밀스러운 목적을 간직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 건립된 대 사찰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에 지었다고 보면 그 비밀스런 목적이란 당시 신라의 적인 백제나 고구려가 알 수 없고 그것도 신라의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 은밀한 곳에 대규모의 사찰을 지었다면 이는 삼국통일과 관련된 군사적, 정치적 목적으로 창건한 사찰이 아닌가 여겨진다. 특히, 오갑사가 지어지던 당시는 신라의 국력이 크게 융성하던 진흥왕 때로 수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최고의 고승 원광법사가 주재하면서 점찰보를 열고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 세속오계를 전수한 곳이 오갑사 지역이라면 이 지역의 중요성과 함께 군사적 의미는 더욱 크다.

  대작갑사가 고려초에 태조로부터 운문선사란 사액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주지이던 보양국사가 선종계의 승려라서 운문선사라고 사액했다고 할 수 있으나 한편 운문이라는 음과 훈 그대로 운문 구름문 구름에 문이 가린 곳 은밀한 곳에 위치한 사찰이란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다. 또한 견훤이 호거산성에 숨어 있다가 신라를 공격했다는 전설에서도 이곳은 수도인 금성과 가까운 곳이면서도 은밀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옛 대작갑사 유적지에 들어서니 홀연히 한 노승이 나타나 자칭 圓光이라고 말하고 절을 다시 세울 것을 당부한 이후 인궤를 주고 사라졌다. 이에 보양국사가 북령에 올라가 살펴보니 황금탑이 보이므로 다시 내려가 보니 보이지 않고, 올라가 보면 황금탑이 보이고 다시 내려가 보면 보이지 않고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해 용왕이 말하던 작갑이란 말이 생각나서 땅을 파보니 무수한 벽돌이 나와서 옛 절터 임을 알고 절을 다시 세우고 대작갑사라 하였다 한다.

 

  위에서 까치떼란 다름아닌 작갑을 의미하며 이는 보양국사가 무너지고 폐허화된 작갑사지에 절을 다시 세웠는 뜻인데 신라 시대는 불교가 이 땅에 성행하던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큰 사찰이 폐허가 되도록 방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는 신라가 오갑사를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했다가 삼국 통일이 이뤄지므로써 창건 목적 달성으로 인하여 그 유지를 파괴했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사()란 사찰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관청이나 마을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이런 뜻으로 보면 오갑사는 단순한 불교의 사가 아닌 형태상으로는 절이나 실질적으로는 삼국 통일을 위하여 마련된 관청이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부근의 지명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옛부터 소금 창고가 있었던 큰 마을이라 해서 염창 혹은 큰말이라 부르고, 운문사 옆 넓은 지역을 장군평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여기서 신라의 정예병들이 군사 훈련을 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황정리,대비사, 낙화암 등의 지명은 국왕이 이곳을 들렀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오갑사 지역은 신라 진흥왕 시기에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했다가 삼국 통일을 완수한 이후에 와서는 창건 목적의 달성으로 인하여 인위적으로 파괴했다가 신라말 고려초에 와서 보양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산 위에서 바라본 운문사>

 

  운문사 사적에 의하면 중앙에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동에 가슬갑사, 서에 대비갑사, 남에 소보갑사, 북에 천문갑사가 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오갑사의 배치로 미루어 보아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대작갑사로 추정할 수 있다. ,대작갑사는 그 주위의 지명에서 연유하듯(장군평) 군사 훈련장, 심신 단련의 수련장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나머지 사갑사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이 문제점으로 남는다.

  이러한 문제점은 현재까지 대체로 밝혀진 오갑사의 위치를 살펴보면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 방향으로 사갑사가 배체되고, 중앙의 대작갑사와 함께 전체적으로는 오방을 구성하고 있다. 대작갑사가 오갑사 중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라면 나머지 사갑사는 대작갑사의 기능을 보해주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즉 소보갑사와 소작갑사는 경주에서 매일 고개  소보갑사  방음리  소작갑사  밀양으로 통하던 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보갑사와 소작갑사는 대작갑사로 통하던 통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소작갑사에서 동쪽 고개를 넘으면 바로 대작갑사에 도달하기 때문에 그 기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천문갑사는 경주  삼거리재  삼계리  배넘이재  운문산  밀양으로 통하는 요지인 배넘이재와 운문산 사이에 위치하여 계곡을 통하여 대작갑사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였을 것이다.

가슬갑사의 기능은 경주에서 밀양으로 이르는 길목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가슬갑사의 기능은 나머지 삼갑사의 기능과는 다르다고 본다.

  가슬갑사에서 원광법사가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고 점찰법회를 실시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가슬갑사는 고승 대덕이 안주하면서 사갑사의 기능을 통제하고 관리하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그 위치는 대작갑사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곳에 위치하여 대작갑사에서 심신을 단련하던 화랑 혹은 군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은밀한 임무를 수행한 곳이 가슬갑사였기에 그 위치를 은유적 방법을 사용하여 표시하였을 것이고, 그 사지(寺址) 또한 대형이라기보다는 작은 암자 혹은 동굴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갑()을 한자 사전에 찾아보면 산허리 갑, 곶 갑으로 표시되어있다. , 곶은 지형이 앞으로 볼록 튀어나온 곳으로 우리 지명에서는 장산곶’, ‘장기곶 등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 원광서학편에는 嘉瑟岬 或作 加西 又加西 皆方言也 岬俗云古尸 古或云古尸寺 有言岬寺也로 되어 있다. 또한 삼국유사 열전 귀산조에는 가실사라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가슬갑은 가서, 또는 가서로 쓰나 모두 방언이라 하였다. 갑은 속언에 고시 즉 곶이라 하며 혹은 고시사 즉 곶절이라 하니 마치 갑사라하는 것과 같다고 되어 있다. 즉 가슬갑  가서  가서는 방언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 신라어를 이두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가서 이라고 보면 산을 뜻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우리말에 갓에 간다.’라고 말을 할 때 은 산을 표시한다. 또한 갑고시고시사가실사로 보면 가슬  가서  고시     가실로 모두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즉 모두 곶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특별한 사찰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곶 곳으로 통용해 보면 공간의 일정한 부분인 실   곡에 건축한 절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가슬갑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절이라 보기 보다는 갓실 즉 산골짜기에 건축된 절이라는 의미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이러한 의미를 확장해보면 소보갑사는 소보실 속실속골에 있던 절이고, 천문갑사는 천문골 천문실 깊은 골짜기에 있던 절이고 , 소작갑사는 대작갑사 보다는 작은 새()골에 있던 절이라는 의미가 된다. 또한 대작갑사는 큰 새()골에 있던 절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의미는 가지산이라는 지명에서 그 뜻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쇠산  새산  까치산 가지산으로 의미가 연결된다고 본다. 여기서 쇠    까치와의 관계이다. 운문산 신원리는 옛부터 속계솥으로 유명하다. 물론 쇠는 울주 지방으로부터 유입되었다고 추측은 되지만 대작갑사 주변 지역은 쇠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보양국사가 운문사를 재 창건할 때 까치가 땅을 쪼았다는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다. 즉 운문산 가지산, 일대는 신라 시대에는 모두 까치산 혹은 쇠산으로 불렀고 그 중에서도 가장 골이 깊고 중앙인 현 운문산 골짜기는 통칭 새골, 혹은 까치골로 불렀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의미를 연결해 보면 오갑사의 명칭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운문산 지역을 중심한 각 골짜기나 지명을 절의 명칭으로 삼았고 이것을 이두화해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혹은 처음에는 절의 명칭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전이 되고 일연법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 각 절이 있었던 위치명을 그대로 이두화해서 표현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어찌 5개소의 사찰 이름에 동시에 갑()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사명으로 삼을 수 있었겠는가?

  위에서 가슬갑사는 단지 골짜기에 있었던 절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왜 삼국유사는 가슬갑사의 위치를 가슬현 북동이라고 하면서 현 운문사 동 9,000보라고 표시하고 있을까? 학자에 따라서는 9,000보란 정확한 숫자상의 개념으로 표시했다고 주장한다. 주척 6자를 1보로하고 주척 1자는 20로 계산하여 운문사에서 동으로 10 내외에 가슬갑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척 1자를 20로 확정한 것부터 오류를 범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척 1자를 20로 정한 것은 조선 초에 들어와서라고 한다.(이홍직 국사대사전) 그렇다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에 1보와 1척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치 아니하고는 잘 알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9,000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9,000보란 정확한 거리를 표시했다고 보기보다는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아주 먼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가까운 거리도 아닌 현재의 개념으로 보면 10여리 정도의 거리(4)라본다. 9,000이란 숫자는 가득찬 개념의 수(10,000)가 아닌 조금 모자란다는 뜻을 지닌다고 본다. 1보를 실제의 보폭을 기준하여 약 50㎝~60를 적용하여 계산해보면 9,000보는 약 45의 거리가 된다. 운문사에서 45 거리에 있는 고개라면 현재 예정해 볼 수 있는 곳이 배넘이재가 된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배넘이재를 가슬령으로 표현하고 있다. , 깊고 깊은 심산 유곡에 배넘이재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는 운문사의 지형이 풍수지리상 주형이란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운문사 입구 동리 이름에 오진과 소진이 있다. 여기서 진이란 나루 . 로 배와 상관성이 있는 의미다. 9천보는 실제 거리를 표기한 것이기 보다는 고개가 높고 험하기 때문에 구천(九天)을 표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운문사 주변에 높고 험한 고개는 지금은 이용하지 않고 있는 통점에서 내원골을지나 내원암 운문사로 이어지는 고개를 지칭한다고 추정한다. 골짜기 입구나 고개 초입에는 통점이라는 지명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이용되지 않지만 옛날에는 통점에서 내원암으로 넘는 고개가 있었으며, 그 고개를 가슬령을 불렀다고 생각한다. 추정한 가슬령을 중심으로 가슬갑사지를 찾으면 운문산성 안에 있는 절터가 곧 가슬갑사지로 볼 수 있다.

 

3) 북대암(北坮庵)

  운문산 중 최초로 세워진 암자인 북대암(北坮庵)은 운문산성(雲門山城, 일명 지룡산성)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창건주는 오갑사를 세운 신승 혹은 보양국사(寶壤國師)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건물은 법당을 위시하여 산신각, 칠성각, 요사 등의 건축물이 있다. 북대암에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고 좌우에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이 모셔져 있는 특색 있는 불상 배치법이다.

 

<북대암>

 

  운문사에서 보면 북쪽이며, 제비집처럼 높은 곳에 지어져 있어 북대(北臺)라고 한다. 북대암에서 내려다 보면 한 폭의 동양화를 대하는 듯 멋진 선경(仙境)이 펼쳐진다. 지금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가 쉽도록 북대암 바로 아래까지 길이 완전히 포장되어 있다.

 

4) 청신암(靑神庵)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운문사 부속 암자로 1840년 운악화상(雲岳和尙)이 처음 지었고, 1889년 최현화(崔玄化) 화상이 중창하였다. 운문사 암자 가운데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처로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하며, 처음부터 비구니 스님들이 살기 위해 지어진 암자였다고 한다.

  불교 정화 이전에는 운문산 내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거주한 곳은 이 곳 뿐이었다. 조계종 정화 당시 운문사가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 도량이 되면서 부속 암자도 비구니 스님들의 수도 도량이 되었으나 처음에는 청신암이 유일한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법당을 인법당으로 사용하였고, 그 외는 초가로 조그만 건물들이 여러 개 있었다.

현존 건물은 인법당, 요사(寮舍), 북극전, 창고 등이 있다. 건물 가운데 북극전(北極殿)은 다른 사찰의 칠성각(七星閣)으로 앞에는 돌탑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칠성(七星) 기도를 하면 영험이 있어 틀림없이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온다.

 

5) 내원암(內院庵)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암자로 최초의 창건주는 원응국사(圓應國師)로 전해온다. 설송(雪松) 연초대사(演初大師)(1694)가 중창하고, 운악화상(雲岳和尙)(1831)이 중수하였으며, 산령각(山靈閣)은 유긍파(兪肯波)스님이 지었다고 한다.

 

    < 내원암>

  내원암은 운문사 부속 암자 중 가장 오래된 곳으로 조선 후기에 설송(雪松)스님이 주석(主席)하면서 내외전(內外典)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들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항상 백여 명의 학인들이 모여 수학하였다고 한다.

  1950년대에 불교 정화가 이루어지면서 운문사가 비구니의 도장이 될 때 내원암도 비구니의 도량이 됐으며 초대 원주(院主)는 유섭스님이었다. 현재의 원주(院主)인 재문(在汶) 스님은 1992년부터 지금까지 무량수전, 멱우선실(覓牛禪室), 삼성각, 요사 등을 새로 짓고, 법당 앞에는 1998 4월 초파일에 삼층석탑을 세우고 탑 속에 천탑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다. 내원암은 운문사 부속 암자 중 유일하게 독성각(獨聖閣)이 따로 없는 곳이기도 하다.

 

 

 

 

 

 

 

 

 

 

 

 

<축성이 있었던 지역을 돌아보고 있다

 

 

 

 

길을 넓힌 흔적 - 통로로 사용했거나 망루가 설치되엇던 곳으로 본다

 

위의 내용은 김태호 선생이우리문화회원들에게 설명한 내용을 옮겨서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