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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34)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은 기오재(淇塢齋)박희(朴僖) 선생의 죽림재(竹林齋)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34)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은 기오재(淇塢齋)박희(朴僖) 선생의 죽림재(竹林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죽림재
2020.11.10(청도신문)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에 소재하는 죽림재를 찾았다. 이곳은 여느 재실과는 다르게 입구인 경지문(敬止門) 위에 가마채를 보관하는 시렁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배향인물은 기오재(淇塢齋)박희(朴僖) 선생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문충공(文忠公) 박덕룡(朴德龍)의 후손이다. 15세 때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거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사에 이르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공은 효행이 지극했는데 부친이 와병에 있는 중 하루는 개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을 때 갑자기 개고기를 구하기 어려워 기도하였는데 홀연 범이 개를 세 마리나 물고 왔기에 이를 장만하여 봉양했는데 며칠 뒤 부친의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이 성종 임금께도 알려져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으며 대동문헌록에도 기록되었다. 배위는 선산 부사를 지낸 노윤창(盧允昌)의 따님이다. 노윤창은 장연노씨(長淵盧氏) 입청도조인데 뒤를 이을 후손이 끊어져 오늘날까지 기오재 후손들이 외손봉사(外孫奉祀)하고 있다.

 공의 손자 소암(小庵) 박경(朴烱)은 장사랑군자감참봉(將仕郞軍資監參奉)으로 임진왜란 때 재종형 판서 박엽(朴燁)과 같이 창의하여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와 죽기로 맹세하고 망우당 곽재우의 화왕산성 및 경주(慶州) 구강진(鷗江津)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증직이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이다.

  죽산 박씨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넷째 왕자인 죽성대군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奇悟)가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우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태보(太保)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죽주(竹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음으로써 후손들이 죽산(竹山)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죽산(竹山)은 경기도 용인군과 안성군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군(皆次山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쳤다가 고려 초에 죽주(竹州)로 고쳤다.

6세 박영후(朴永侯)의 장남 박정유와 차남 박정혁에 이르러 각각 충질공파(忠質公派)와 소경공, 학사공파로 분파되었다. 그 뒤 다시 여러 파로 나뉘었다.

청도의 죽산 박씨는 1400년대 중엽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성삼문과 인척이었던 박원지(朴元智)가 가솔을 이끌고 홍성에서 합천군 삼가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이후 장남인 박승이(朴承李)는 홍성으로 돌아갔지만, 차남인 박계이(朴繼李)의 아들 박희(朴僖)는 청도읍 원정리 원당에 장가를 들면서 1510년(중종 5)에 택리한 것으로 추측된다.

 

‘죽산’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대나무 푸른 기운 큰 뜻 얻어 산이 되니

효행에 임란 공신 거룩한 가문이라

이어서 자자손손이 선대 정신 드높이다

 

경지문
마을의 오래된 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