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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32)청도 유림들이 풍월(風月)을 읊던 선유지(仙遊地)인 산수정(山水亭)

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32)

청도 유림들이 풍월(風月)을 읊던 선유지(仙遊地)인 산수정(山水亭)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향교 홍보장의. 청도문협 회장

 

산수정
(청도신문 2020,10.13)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남산에 자리 잡고 있는 산수정(山水亭)을 찾았다. 이 정자는 1893년(고종 30) 단오날에 소강(小岡) 최익주(崔翼周) 선생이 청도의 진산인 화산(남산) 옥정동 계곡에 창건하여 청도 유림들이 모여 풍월을 읊던 선유지(仙遊地)였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쇠락하여 무너진 채 복원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1959년 최덕수(崔德壽), 박도야(朴道也)가 중심이 된 화양보승회(華陽保勝會)가 청도 지역 선조들의 풍류를 잇고자 복원을 했다. 그러나 장소는 동천리에서 교촌리 청도향교 뒤편에 있는 화강지 언덕으로 옮겼고 이름도 ‘화악루(華岳樓)’라 하였다. 산수정의 유지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옛 정자의 목재를 일부 활용했다고 최덕수의 아들인 최의식이 전했다. 그 뒤 소유자인 최의식이 관리하면서 한 차례 중수했고 2006년에는 청도군에 기부하여 군민의 재산으로 남게 되었다. 현재 화산 본래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이 ‘山水亭’은 2011년 청도군(당시 군수 李重根)에서 새로 지은 것이다.

  처음 산수정을 지은 최익주 공은 각남면 일곡리 출생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화강(華岡) 최학승(崔鶴昇)의둘째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서지 않고 아버지의 호에 이어 소강(小岡)이라 호를 삼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사람이란 뜻으로 ‘화악일민(華岳逸民)’이라고 부르며 산수정에서 시를 읊으며 지냈다.

  남산’의 입구 바위에 ‘화산동문(華山洞門)’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화산 골짜기 입구란 뜻이다. 이는 ‘남산’의 원래 이름이 ‘화산’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화산이란 이름은 중국 서안에 신선이 사는 산으로 알려진 화산의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화산에도 그 도교적 신선의 세계를 꿈꾸며 우리 선인들이 풍류를 즐기며 경치 좋은 계곡의 바위에 이름을 붙이기도하고 시를 새기기도 했다.

  물 밑의 흰 돌이 보석처럼 반짝인다는 백석뢰(白石瀨), 하늘의 구름이 맑은 물에 비치어 마치 수를 놓은 모습인 운금천(雲錦川), 11수의 시를 새겨놓은 취암(醉巖)과 봉화취암(奉和醉巖), “워이〜 워이〜 양들아 어서 일어나라” 하니 이내 흰 돌들이 모두 양으로 변했다는 질양석(叱羊石),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치 옥구슬같다는 만옥대(萬玉臺), 물이 용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고 붙여진 용항(龍吭), 거울같이 맑은 못인 일감당(一鑑塘), 신선이 마시는 술을 의미하는 유하담(流霞潭), 당나라 문장가 한유의 ‘태화 산봉우리 옥정의 연꽃’이란 구절에서 따온, 옥정암(玉井巖), 중국 화산의 남쪽 봉우리 ‘낙안봉’에서 따온 낙안봉(落雁峯),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계속해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음을 말한 “자시유인불상래(自是游人不上來)”, 황금빛의 아름답고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관세음보살의 거처지 금사계(金沙界), 계곡 가장 위에 있으며 신선을 사모한다는 뜻인 모선동(慕仙洞)이 그것인데 아무튼 도교적인 것이 많다.

  최익주 공의 ‘산수정’ 시 구절인 “春來莫放桃花水 봄이 왔다고 함부로 복숭아꽃 개울에 떠내려 보내지 말게/ 恐被漁郞世外傳 어부에 의해 신선세계 알려질까 두렵다네”에 붙여 ‘산수정에 답함’이란 시제로 몇 자 적어 올린다.

봄을 타는 꽃잎을 그 어찌 막을손가

청도 땅은 어느덧 복사꽃 무릉도원

산수정 시 한 수 흥취, 유하주도 익었구려

 

남산 입구에 새겨진 '화산동문'
산수정 후면
용항
유하담
화악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