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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외길 인생, 65년 이발소 박산근님

 

 

 

 

              외길 인생, 65년 이발소 박산근님

 

                                                   

                                                                    행전 박영환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주황빛 감들이 제철을 만나 가지마다 등불을 켜고 있는 10 9일 오후, 외길 인생으로 65년 동안 청도군 이서면 소재지에 있는 학산 이용소를 지키고 있는 박산근님(86)을 찾았다. 거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빗 3, 가위 2, 바리캉 두 개, 낡은 드라이기 하나가 님의 분신인양 같이 맞는다.

   사실은 내가 박산근님이라고 지칭하니 어색하다. 지금까지 나는 이발소 아저씨라고 불러왔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우리 고향 분으로 나와는 촌수도 그리 멀지 않는 아저씨뻘 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저씨께 머리를 처음 깎은 것도 60년 정도는 된 것 같다. 아마 아저씨가 이발소를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 것 같다. 물론 나도 객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계속해서 내내 깎은 것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시절과 그리고 첫 교단인 이곳 이서고등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3년을 아저씨께 머리를 맡겼으니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다.

   지금은 옛날 영화를 찍는 세트장과 같은 곳이지만 그 당시 아저씨의 학산 이용소는 인근에서 가장 큰 이발소였다. 거기에다가 젊은 미남 이발사가 기술도 가장 좋은 분으로 평판이 높아 인기가 짱이었다.

   정말 아저씨는 여느 이발사와는 달리 마술사의 손을 가진 것 같았다. 쇠똥처럼 덕지덕지 눌어붙은 까치머리를 맡겨도 이내 훤하게 만들어주셨다. 옛날에는 머리 깎는 바리캉의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았던 때인지라, 흔히 바리캉에 머리가 물려 울상을 지을 때가 많았지만 아저씨는 조금도 머리가 끼이지 않게 잘 깎아 주셨다. 성인들의 머리는 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은 드라이기를 사용할 수 없기에 이발소마다 연탄불에 달궈 쓰는 일명 고데기(머리 인두)’로 머리를 손질했다. 이발소에서 많은 사람의 머리를 다루다보면 머리카락을 태우게 되어 이발사 분과 시비가 붙는 수가 종종 있었지만 아저씨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1970 - 80년대만 해도 교사들은 머리에 매우 신경을 썼다. 가르마를 단정하게 타고 포마드 기름을 반질반질 발라 세심하게 신경을 쓴 뒤 넥타이에 정장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발소에도 자주 가야했다. 그래서 요금도 이발을 할 때마다 내는 것이 아니고 월 요금제로 하여 수시로 드나들었던 추억이 새롭다. 하기야 당시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포마드 기름을 바른 뒤 외출을 했다.

   아저씨도 1970년대와 80년대가 이발소의 전성기라고 회상을 하신다. 이때는 하루에 30명이 넘는 손님들이 왔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가는 분들도 많았다. 당시는 종업원도 4명이나 있었다. 3명은 이발을 하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감겨주고, 그 사람은 또 수도가 없던 때이니 물지게로 물을 지고 오기도 했다. 아저씨는 현재 구순을 바라보는 최고령 이발사이다.

   아저씨는 원래 일본 야마구치[山口]에서 태어나셨다. 거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이 되자 부모님의 고향인 청도에 오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인데다 아래로 많은 동생들이 있었기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아무 일이나 마다하지 않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관계로 어려움이 많았다. 거기에다가 태평양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1944년 전쟁에 내몰려 오른 발을 다친 것도 큰 걸림돌이었다. 그 사고 때문에 지금도 지체장애를 갖고 있다. 그러던 차에 우연하게 청도읍 어느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다가 일본에서 살다가 돌아온 종업원을 만나게 되었다. 우선 말이 통하게 되니 지금 처한 사정을 털어놓을 수가 있었고 생계를 꾸려야 하니 배울만한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는데 그분이 이발을 권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저씨는 그 이발소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물을 길어오는 일부터 시작하여 점차 사장에게 이발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이발 기술을 익히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말까지 같이 배워야 했다. 그게 3년이다.

  그 이후 23세 되던 해, 1952년에 집안 형님이 운영하는 학산 이용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도 몸이 성치 못했다. 6.25 전쟁으로 군민방위군으로 참전했다가 열차사고로 허리 부상까지 입었기 때문이다. 그 때 보수는 하루 쌀 반 되 값 정도였다. 이렇게 몇 년간 생활을 하다가 이용소 주인인 형님께서 가게를 판다기에 매입을 하여 1954년부터 학산 이용소를 직접 운영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면허 이발사였다. 그러다 1956(단기4289)에 시험을 봐서 정식으로 자격증을 획득하였다. 그 자격증이 바로 경북 이발사 자격증 제1호이다. 응시생은 30명 정도였는데 시험은 실기 시험과 필기시험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실기 시험은 몇 년간 현장에서 닦은 체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치를 수 있었으나 필기시험은 한국말이 서툴러 작성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시험관이 일본말로 작성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던 것이다.

   힘들여 번 돈으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당신께서는 비록 학업을 중단했지만 동생들만큼은 꿈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소망이었다. 동생들도 다행히 아저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를 잘 했다.

   남동생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세무사이며 정당 정책 자문위원 등으로도 활동한다. 종친회 크고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직책을 맡아 처리하고 있다. 여동생은 우리 또래인데 숙명여대를 졸업한 뒤, 외교관 부인이 되었으며 현재 뉴욕에 살고 있다. 아저씨의 자녀들도 6남매인데 자녀들은 공무원 등 연구직 등에 근무하고 있으며  손자, 손녀 중에는 의사와 한의사로 종사하기도 하는 등 모두 훌륭하게 자랐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미용실에 오히려 남자 분들이 많이 가지만 70 - 80년대는 반대로 여자 아이들도 이발소에 와서 머리를 잘랐다. 상판 위에 여자 아이들을 앉혀놓고 단발머리로 잘라주거나 하이칼라도 해줬다. 어쩌면 이때는 면민 전체가 고객인 셈이다. 그러나 90년대가 되면서 미장원이 생기고 장발을 즐겨하게 되자 손님이 급감하게 되었다. 수지가 맞지 않아 종업원도 다 내보내고 지금은 혼자 이발소를 지키고 있다. 요즈음은 하루에 3-4명 정도의 손님이 찾아온다. 주로 연세 지긋하신 오랜 단골들이며 용돈을 벌어 쓰는 정도라고 한다. 어쩌면 이제 아저씨의 이발소의 역할은 돈을 떠나서 오랜 지기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 구실을 하는 데 더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올해는 감 값이 별로 좋지 않아 농사짓는 사람들 걱정이 많다는 둥, 건너 마을 누구는 아들 집에 갔다가 요양원으로 옮겼다는 둥, 어떤 사람은 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진다는 둥 등등.

   이발 요금도 그 동안 많이 변했다. 처음에는 돈으로 내기보다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 머리를 깎고 가을 수확을 한 뒤, 벼 한 말을 내기도 했으며 53 50, 62 25, 65 35, 66 45, 70 110, 77 550, 90 4천원92 5천원, 94 6천원, 97 7천원 등으로 변해왔다. 이 요금표가 잘 보관되어 있어 이발소 변천과정을 말해주는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가격은 요금표에 1만 1천원이라고 쓰여 있지만 다 못 받는다고 한다. 손님의 형편에 따라 6천원, 8천원 등 적당하게 조절한다.

   아저씨는 봉사활동을 많이 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께서 어렵게 살아왔기에 어려운 사람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여 무료로 머리를 많이 깎아준 것이다. 65년부터 아저씨가 무료로 머리를 깎아준 사람만 해도 자그마치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서 초등학교의 가난한 학생과 이서중·고등학교의 군경 유자녀들에게 한 달에 한 번씩 30년 정도 이발 봉사를 했다. 지금도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집에 직접 찾아가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 이발소 벽면에 빼곡히 들어찬 표창장과 감사장이 이를 말해준다. 아저씨는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는 나는 복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 할 것이라고 했다.

   그 동안 이발 기술을 가르쳐 준 제자만 해도 족히 20명은 넘는다고 한다.

아저씨는 이발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다. 1975년부터 어느 신문의 지국을 맡아 40년 동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직접 배달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문중의 묘사 등 대소사에도 빠지지 않고 꼭 참여하여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매스컴에서 아저씨의 외길 인생을 취재하여 보도하고 있다. 영남일보(2011. 4. 8.), EBS ‘장수의 비밀’(2014, 6), 매일신문과 낙동강 생명의 숲 실천본부에서 발행한 잡지 낙동강’(2015 8), 그리고 최근에는 KBS 황금연못(2015. 9.22)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경향각지의 많은 분들께 감동을 준 바 있다.

   아저씨는 다리가 불편하여 다른 일을 생각도 해보지 않았지만 또 이 일이 적성에도 맞는 같아 천직이라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왔다면서 이 나이에도 아직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16세에 다리를 다친 이래, 6.25 전쟁 때도 다쳤고 3년 전에도 교통사고를 당해 또 다시 아픈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러나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일을 했다. 이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식들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저씨는 오늘날까지 이렇게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주머니(최필출)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아주머니 23, 아저씨 28세에 결혼, 5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쌀이 떨어져 죽을 먹을 때도 많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가정을 지켜준 것이 너무나도 고맙다고 한다. 그 덕분에 동생들과 아이들이 훌륭하게 성장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아주머니는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얼마 전 아저씨는 어느 방송에 출연하여 늦게나마 그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오늘 나도 아저씨께 이발을 했다. 역시 아저씨의 가위는 녹슬지 않았다. 65년 쌓아온 기술로 다듬어 주셨으니 내 머리카락이 오랜만에 큰 호강을 했다. 인간문화재 수준인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아저씨의 소박한 꿈이 오래오래 계속되기를 빌면서 수많은 고객들의 손때가 묻은 이발소 문을 조심스레 밀고 나섰다. 하늘은 역시 푸르다. 아저씨의 마음인양 끝없이 넓다.

 

 

경상북도 이발사 자격시험 제1호 합격증(1956년)

 

 

 

오늘도 단골 손님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매만지고 있다.

 

 

 

아저씨의 분신인 이발기구들

 

 

 

 

 

아저씨의 봉사활동 상을 말해주는 여러 감사장과 표창장들(여기에 올리지 않은 것도 많다.) 

 

 

 

 

 

 

 

최필출 아주머니

 

 

 

결혼 사진

 

 

 

이발 요금표 (1953년) - 아저씨는 그 동안의 이발 요금표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보관하고 있다.

 

오래된 바리캉 - 나이가 약 80년 정도는 될 것이라고 한다. 아래 것들도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영남일보(2011. 4.8) 

 

잡지 '낙동강'(2015.8.) -  아저씨는 신문이나 잡지뿐만 아니라 방송에도 2회나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