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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밀양박씨 소고공파 여충사 및 충렬사 추향

 밀양박씨 소고공파 여충사 및 충렬사 추향

 

2015년 10월 17일(음 9월5일)/ 경북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용강서원/  행전 박영환

 

 

용강 서원 입구

 

 

 

                    여충사 -  고려말 충신인 송은 박익 선생을 모시고 있는 사당

 

송은(松隱) 박익(朴翊, 1332- 1398)선생 

 

  박익(朴翊, 1332- 1398)선생은 밀양 삽포리에서 출생, 초명(初名)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밀성이며 판도판서를 역임한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  영균(永均) 공의 장자이다. 어머니는 능성 구씨 구위(具褘)의 딸이다. 

   선생은 공민왕조에 등과하여 동경판관겸권농방어사(東京判官兼勸農防禦使, 종5품), 사재소감(司宰少監, 종4품), 예부시랑(禮部侍郞, 정4품), 예조판서(禮曹判書, 정3품)  등을 역임했다. 여러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선생은 원나라 간섭기에서 고려말, 조선초에서 걸치는 격동기를 살았다.  어린 시절을 원 간섭기라는 외세 종속구조 하에서 보냈고, 장성한 후 중앙관료로 활동했던 시기는 왕조 교체라는 격변기를 몸소 겪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세력은 조선 건국에 뜻을 두고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이에 반대하는 많은 인물들을 숙청하였다. 우왕 폐위, 공양왕 옹립, 정몽주 살해 사건 등이 발생할 때마다 고려왕조를 지키려는 인물들은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이런 와중에도 송은 선생은 끝까지 단심으로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켰다. 

   기어이 조선이 건국이 되었을 때, 공의 인품을 높이 산 태조 이성계는 선생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차에 걸쳐 좌상(左相) 등 고위 관직을 제의하며 회유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고향  밀양으로 낙향, 은거하여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후세 사람들은 선생을 포은, 목은, 야은 등과 함께 8은으로 또 두문동 72현으로 추앙하여 높이 숭상했던 것이다.    

 

 

 

 

 

 

 

 

 

 

 

 

 

 

 

 

 

 

 

 

 

 

우당 박 융 선생 (憂堂 朴 融) 선생

 

우당 박 융 선생 (憂堂 朴 融)선생은 태종, 세종조의 문인으로 자는 유명 (惟明)이며 호는 우당(憂堂)으로 송은 박 익(松隱 朴 翊)선생의 장자이며 전국 밀성박씨의 종손이다.

  일찌기 포은 정 몽주(圃隱 鄭 夢周)선생의 문인으로 1408년(태종 8년)에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411년(태종 11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에 오르고 뒤에 성균관 수찬, 전적, 전한(修撰, 典籍, 典翰)등으로 옮겼다. 호당으로 들어가 매양 첨민하였다. 다시 돌아와 이조정랑 (吏曹正郎)의 요직에 있을때 1423년(세종 5년)에 흉년을 당하여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으로 나아가 각 군순령을 독려하여 여러 고을 백성들을 진제하였다.

  다시 1424년(세종 6년)에 경상도 도사(都事)로 나아가 권양촌(權陽村)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각지방의 향교제기를 정비하고 제법을 일신하고 청도향교의 중창에 힘을 썼다.

  또한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나아가서는 원운시(原韻詩)를 지었는데 여지승람 금산편(輿地勝覽 金山篇)에 실려있다. 1425년(세종 7년)에 다시 성균관 사예(成 均館 司藝)로 있을 때 그 전년에 경상도에 있을 때 각지방의 예속을 바로잡은 공로로서 특히 촉석루(矗石機 ) 제영(題詠) 원운(原韻)의 청을 받아 원후운(原後韻)이 백여수나 되는데 이 원운(原韻)은 현재 개축한 촉석루 정면에 걸려있다. 이후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아가서 선치 하다가 1428년(세종 10년) 3월 15일 함안 객사(咸安 客舍)에서 졸하니 전군민이 친아버지처럼 조상하였다.

  선생이 문과급제할 때 고적 (考績)에 관한 책문은 당시 많은 응시자중에서도 두드러지게 훌륭하다고 하면서 지공거 이직(知貢擧 李稷)이 선생을 장원으로 뽑아 올렸다고 하니 그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참뜻인 민본사상(民本恩想)이 이 때부터 가장 중요시한 것으로서 그 전문이 문집에 실려 있다.

 

 

 

 

 

 

 

 

청도에 세거해 온 밀양박씨(密陽朴氏) 일문이 그 현조(懸祖)인 충숙공 박익(忠肅公 朴翊)과 임란(壬亂) 14의사를 제향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용강서원(龍岡書院)이다. 경내에 있는 충렬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때 의병을 일으켜 청도·밀양·경산 등지에 큰 타격을 준 박경신(朴慶新)·경인(慶因)·경전(慶傳)·경윤(慶胤)·경선(慶宣)·지남(智男)·철남(哲男)·선(瑄)·찬(璨)·린(璘)·우(瑀)·근(瑾)·숙(琡)·구(球) 등 14의사를 모신 사당이다. 14의사는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 사이로 이 가운데 11분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2·3 등에 각각 등재되었고, 한 분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타가문에 찾기 어려운 매우 희귀한 예라 하겠다. 14의사 묘정비는 1876년 건립한 것으로 임란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며 비각의 구조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분연히 일어난 밀양박씨 일족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그 전통을 400년이 넘도록 면면히 이어온 후손들의 의지는 후대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