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의 대비사
행전 박영환
2012년 12월 1일 금천면 박곡리 대비사를 찾았습니다.







절 앞 못은 아직 얼지 않았지만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듯
겨울 바람이 탱자나무 가시처럼 짓궂게 휘두르며 지나간다
차를 주차하고
들어서지만 구부정한 고양이 한 마리만 눈치를 보며
삼성각 쪽으로 도망을 갈 뿐 인적이 없다
대웅전의 부처님도 어둠 속에서
잠을 주무시는 것 같다
한 쪽 켠에 사람냄새가 있다
스님의 속옷 빨래가 걸려 있고
문틈을 파고드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을 겹겹이 쳤다
박곡 여느 집처럼 곶감도 깎아 주렁주렁 말리고 있다
그래도 절집의 곶감은 염주알 같다
신라 고찰이 그렇게 이어진 것 아닐까
(박영환 '대비사')

2012년 겨울에 찾은 이래 2018년 8월 22일(수) 6년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그 동안 참 많이 변했습니다.

입구 용소루





경내에 집터로 추정되고 있는 곳을 발굴하고 있다. 과연 구들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옛날부터 절터이었음을 말해준다.


주지스님과 박윤제 문화원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뒤에 좌로부터 박홍갑 박사와 박재연님, 권대웅 교수가 있다.

마과목 - 도량 내에 약재로 사용되는 마과목 군락이 있다.


부도군 - 대비사에 주석했던 고승의 승탑과 비석 등 22기가 세워져 있다.

부도를 살펴보고 있다


2019년 6월 26일 우리문화바로알기 회원들과 같이 찾았습니다.

용소루 앞 단체촬영

용소루 위에서 주지 스님의 설명을 듣다


대웅전

대웅전 뒤
다음은 청도박곡리석조여래좌상(淸道珀谷里石造如來坐像) 편입니다.

청도박곡리석조여래좌상(淸道珀谷里石造如來坐像)
◯소재지:청도군 금천면 박곡길 295
마을 중앙에 보호각을 세워 봉안하고 있다.
◯연혁: 특징은 비록 화재에 의한 박락이 심하지만 당당한 어깨와 잘록한 허리 등 균형 잡힌 신체 비례와 유기적인 신체 표현, 풍부한 살붙임 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 때인 8세기경의 석굴암[석불사] 불상 계통의 조각으로 볼 수 있다. 1928년 화재로 불상의 머리와 손, 광배, 대좌 등의 박락이 심하다.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203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는 2.76m이고, 불상 높이는 1.54m이다.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눈, 코, 입의 일부만이 관찰된다. 목에는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내는 3줄의 삼도가 표현되었으며 전체적으로 강건함과 안정감을 준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는 신체의 굴곡에 따라 밀착하여 흘러내려 다리까지 이어진다.
대좌 또한 박락이 심하나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에는 탱주가 새겨져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불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석조 여래 좌상이 위치한 박곡리 마을 안의 미륵당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소작갑사지(小鵲岬寺地) 혹은 대비갑사지(大悲岬寺地)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


보호각 앞에는 고려 시대 석탑

보호각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새겨진 석조 광배(光背)가 훼손된 상태로 마당에 남아 있지만, 석조 여래 좌상과의 연관성 여부는 알 수 없다.
박곡리(珀谷里)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를 지나 억산 아래 자리 잡고 있는 박곡리를 찾았다. 남쪽과 북쪽은 산등으로, 그 사이 계곡 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다. 자연부락으로는 박곡, 미륵당, 골안, 한질각단 등이 있다.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는 박곡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운문사와 역사를 같이하는 대비사가 있어 오래전부터의 기록이 있는 마을이다.
조선 총독부의 기록에 박석동(珀石洞)이라는 이름은 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박(珀)은 호박을 의미하는데, 호박은 지질 시대 나무의 진 따위가 땅속에 묻혀서 수소, 탄소, 산소 등과 화합하여 돌처럼 굳어진 누렇고 광택이 있는 광물이다. 박곡리는 예전부터 도자기가 발달했던 마을이다.
박곡은 박실, 백곡 등으로 불리는데 이는 마을의 형상이 박 같아서 부르는 이름이며, 원광 법사가 대비사를 창건할 당시 주위를 둘러보니 계곡이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하여 백곡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미륵당은 불상이 있는 마을로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골안은 임당리로 넘어가는 곳이다. 한질각단은 마을에 들어가는 길 입구에 생겨난 마을이다. 한질은 큰길을 말하며 신작로가 생긴 후 불리는 이름이다.
본래 청도군 중동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박곡동이라 하여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박곡동에서 박곡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곡리는 여러 곳에 띄엄띄엄 경작지를 따라 형성된 자연 마을이 많으며, 경작지는 경지 정리가 안 되어 있다. 박곡리 안쪽에 만들어진 대비지는 마을 앞에 있는 논들을 적셔주기에 충분하지는 않으나, 물 가둠이 좋은 흙 성분 덕분에 물이 모자라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한다. 마을 위쪽에 내화 벽돌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규석 광산이 있어 아직도 채취를 하고 있다. 논이 밭으로 바뀌어 대추가 경제 작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동쪽은 운문면 신원리, 서쪽은 금천면 신지리·오봉리, 남쪽은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원서리, 북쪽은 금천면 임당리·운문면 방음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박곡, 미륵당, 골안, 한질 각단이 있다. 마을 서쪽으로만 트여 있어 신지리를 나가면 919번 지방도를 만난다.
문화재로는 박곡리 가운데 미륵당에 있는 보물 제203호 청도 박곡리 석조 여래 좌상과 보물 제834호인 청도 대비사 대웅전이 있다. 점마에는 제일 마지막으로 박실 사발을 만들었던 장인의 후손과 가마터가 남아 있으며, 아직도 자기의 틀과 찌꺼기들이 남아 있다.
한편 청도군지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억산의 웅장함을 과시하듯 수많은 계곡이 나 있는 산기슭 계천변에 자리한 마을로 골짜기마다 깊숙 깊숙하다. 억산 기슭 그것도 900고지의 태산 중복에 위치하여 이마에 닿을 정도인 급경사의 비탈진 곳으로 본 면에서는 오지라 할 수 있다.
문어발처럼 산봉들이 갈라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유서깊은 대비사(大悲寺)는 많은 화랑들이 지나 갔을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의 잔향을 아직도 풍기고 있다. 대비사의 창건 연대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서 주민이 정착한지는 선사시대로 잡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이나 소상하게는 알 수 없다.
1500년 말경 즉 임진란 전에 평택 임씨가 그리고 그 후에 밀양 박씨, 김해 김씨가 차례로 택리를 했다는 것이다.
박곡(珀谷)은 백곡(百谷), 박실 등으로 불렀다. 박실이란 마을의 형상이 박 같아서 박실이라고 부르고, 또한 원광법사가 대비사를 창건하고 이곳을 둘러보니 계곡이 100여개나 되었기에 백곡이라 불렀다 하는데 일제의 행정구역 조정시에 박곡(珀谷)으로 개명 표기되었다는 것이다.
미륵댕이, 미륵당은 이곳 마을에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자진 미륵이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골안, 골란, 곡내(谷內)는 대비사가 있던 깊숙한 골 안에 자리한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기점, 점촌(店村)은 조선조시대의 사기를 구웠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현재도 많은 파편이 산재하고 있다.
이날은 다른 날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박윤제 문화원장과 박홍갑, 권대웅 역사학자 및 이 지역 출신인 박재연님과 같이 동행하며 대비사와 미륵당에 들러 많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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