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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성현 역

 

 

 

                           남성현 역

 

 

 

 

 

                                                                                                    행전 박영환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토요일이면 고향집에 왔다가 일요일에 대구로 올라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고향 수야 마을에서 대구로 바로 가는 교통편은 없었다. 도보로 얼마간 걸어 나와야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탈 수 있었다. 갈 수 있는 길은 대략 세 방향이었다. 하나는 십 리 정도 걸어와서 칠성리 앞에서 대동버스를 타고 가는 것, 그 다음 하나는 삼십 리 길인 팔조령 고개를 넘어 삼산에 가서 삼천리 버스를 타는 것, 남은 하나는 이십 리 길을 걸어와서 남성현에서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거리상으로는 칠성리에 와서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러나 나는 공교롭게도 가장 먼 거리인 팔조령 고개를 넘는 길을 많이 택했다. 칠성리로 가면 가깝기는 해도 버스비가 비쌌고 또 청도읍, 경산을 둘러서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것도 그렇지만 팔조령 길을 택한 것은 고종사촌 동배 때문이었다.

   동배와 나는 동갑내기이고 중학교도 같은 학교에 다니며 대구에서도 한방에 살았기 때문에 모든 생활을 같이 했다. 마침 그의 고향집이 팔조령에서 가까운 상당리이었다.

   일요일, 아침밥을 먹고 나면 십리 정도 되는 상당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동배와 같이 그곳 들판에 나가서 미꾸라지를 잡거나 못에서 낚시를 하면서 놀다가 점심을 먹고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팔조령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따금 우리는 팔조령 대신 유등고개를 넘어 남성현에 가서 기차를 타기도 했다. 팔조령 고개를 너무 많이 넘어 다녀 지루한 것도 있었지만 경숙이를 만나기 위해서 그곳에 간 것 같다. 경숙이는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집이 남성현역 근처에 있었다. 얼굴이 참 예뻤고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런데 이곳에서 기차를 타면 그 예쁘던 경숙이의 얼굴이 망가져 쩔쩔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고약한 악동들은 그 경숙이의 망가지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그곳에 가곤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석탄을 때는 기차인지라 그야말로 연기가 칙칙폭폭 할 때였다. 그 연기가 멀리서 바라보면 평화롭게 보이지만 가까이서 느끼는 것은 숨을 턱턱 막는 것이었다. 특히 남성현 굴을 지나갈 때는 더 심했다. 남성현 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굴이었다. 이 굴을 지나고 나면 당시만 해도 부실한 창틀인지라 연기가 제 마음대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매운 연기에 재채기를 하며 그을음이 묻은 것을 모르고 문지르는 통에 얼굴이 호랑이 가죽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제 얼굴에 묻은 것은 모르고 남의 얼굴을 보고 배꼽을 잡는 풍경이 일어나곤 했다.

   우리는 일부러 경숙이와 같은 칸을 탔다. 어차피 일요일은 승객들이 많아서 서서 가야하기 때문에  같은 칸을 택할 수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굴에 들어섰다. 경숙이는 새침한 얼굴로 코를 쥐고 있었다. 드디어 통과, 사람들이 그을음을 털어내며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경숙이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경숙이의 교복 상의의 흰 칼라와 얼굴에 묻은 검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거울을 내어 훔쳐보던 경숙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화장실 쪽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우리는 그 당황하는 모습에 킥킥거리며 박수를 쳤다. 잠시 뒤, 그을음을 지우고 돌아온 경숙이가 얼굴이 빨개지며 눈을 흘겼다. 그 모습도 싫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경숙이의 그 모습을 즐기기 위해 남성현역에 여러 번 갔는데 이상하게 경숙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우리에게 그런 꼴을 보이는 것이 싫어서 좀 둘러가더라도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 같았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 둔 동배가 남성현에 새집을 짓고 내려왔다. 이사를 하던 날, 우리는 옛날 남성현역을 회상하며 많이 웃곤 했다. 그런데 그가 내려온 지 삼년도 되지못해 병을 얻어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오늘 남성현역에 와서 대합실에 앉아 있으니 갑자기 동배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 같이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하면 오죽 좋을까. 무심한 사람,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옛날에 우리가 이용을 할 때만 해도 승객들이 꽤 많았다. 남성현 인근마을은 물론이고 우리처럼 이서면 일부의 주민 및 학생들까지 이곳에 와서 기차를 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

  하루 무궁화 열차의 상행선 2편, 하행선 2편에 승객은 겨우 한 두 사람, 여객 운임은 하루 2 만원 정도, 이 정도이면 신거역처럼 문을 닫는 것이 옳지만 선로구간의 위험성 때문에 역은 그냥 유지해야 한다고 한다. 남성현 굴 주변의 철로가 급하게 굽어 있고 오르막 경사로 되어있기에 항상 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5명의 직원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남성현역은 1919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바로 만들어진 역이니 상당히 오래된 역이다. 1923년에는 보통 역으로 승격하고 1943년 지금의 위치로 역사를 이전하고 2003년에 신 역사를 지었다. 그러나 2006년부터 화물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한 때 북적거리던 역사, 옛날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시 붐빌 수 있을는지. 옛날 영화를 돌릴 수 없는지.

  오늘따라 너무 그리운 사람, 동배와 술을 한 잔 하면서 남성현 역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그 때 안주는 아마 경숙이일 것 같다. 경숙이도 많이 늙었겠지. 요즈음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진작 좋아한다고 이야기 했으면 니 한테 시집을 갔을 낀데…."

  능청을 떨지 않을까

 

 

 

 

 

                                                                      (2012.2.29)

 

                                                                                                       (2013, 계성문학 29호)

 

               

 

열차시간표

 

남성현역 앞의 기찻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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