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의 뜨락에서
행전 박 영 환
‘학교’란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종소리이다. 사실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운 노래도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문에서 기다리신다’ 이다.
생각해보면 교단에 서 있는 사람들은 ‘종소리’로 시작해서 ‘종소리’로 끝나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학창시절 18년은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기다리며 울려주신 종소리 속에 ‘어서 모이자’를 외쳤으며 교단생활 40년 동안은 ‘기다리신다’의 종소리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어서 모이자’의 마음을 만들려 했던 것 같다.
그 동안 삶의 반경이고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하며 한 번도 거역하지 못한 이 종소리의 둥근 원 속에서 울고 웃으며 많은 연(緣)을 만들었다. 은사, 제자, 학우, 선배, 동료, 후배, 학부모, 지역 인사, 그 외에도 많은 분들. 눈을 감으면 따뜻한 얼굴과 아련한 목소리들이 시공을 건너 뛰어 정겹게 다가온다. 아무튼 나는 종소리 속에서 ‘만남과 나누기’를 했던 삶을 사랑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만들어진 인연을 한없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받들고 있다.
어서 모이자
가장 먼저 종소리를 들은 곳
가장 먼저 종소리를 들은 곳은 초등학교이다. 청도 고향집에서 이서 초등학교가 있는 곳까지는 2킬로미터 정도이다. 처음으로 교무실 앞에 걸려 있는 종소리의 둥근 원 속에 뛰어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아주 작은 동그라미에 불과한지 모르지만 또래들과 어울려 ‘만남과 나누기’를 할 때 울리는 종소리는 항상 새롭고 마냥 신기하며 재미가 있었다.
1․2학년 때는 교실에 책상이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책상이 없어 불편했다는 생각보다는 책상이 없어 장난치기가 좋았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친구들과 뒹굴기가 좋았고 겨울이면 연못의 얼음을 떼다가 타고 놀기가 좋았다. 그러다가 담임 정몽주 여선생님께 혼이 나기도 했다. 그 당시는 우산이 없어 비가 오면 삿갓을 쓰고 학교에 가서 교실 뒤편에 모아두었는데 빗물이 흘러내려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기도 했다. 2학년 담임이신 김태균 선생님은 공부를 하던 중 아이들이 꼬박꼬박 졸면 장난삼아 삿갓 하나를 머리 위에 씌워놓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없어지고 삿갓 하나만 동그랗게 남아 있는 모양이 너무 재미있어 깔깔거렸다. 3학년 때 담임 손병희 선생님은 총각 선생님이셨는데 아이들을 어깨 위에 올려 목말을 태워주시는 등 거리감이 없어 좋았다. 그러나 내 이름의 환(桓)을 항(恒)으로 착각하여 부르실 때는 입이 부어 있었다. 4학년 때 담임은 박광조 선생님이셨는데 그 때 교과서에 ‘삼광조’란 새 이름이 나와서 우리는 ‘삼광조’ 선생님이라 부르곤 했다. 5학년 담임은 박영대 선생님이신데, 내가 글을 잘 읽는다고 졸업식 때 ‘송사’를 읽게 하신 분이다. 선생님 덕분에 소리 내어 글 읽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이후 첫 교단에서 내가 선생님 따님의 담임이 되었으니 대를 이은 인연이 되었다. 6학년 담임인 예창수 선생님은 풍금을 잘 타셨다. 한 번은 내가 ‘장다리 노래 듣고 봄나비 한 쌍~’ 하는 노래를 선생님의 풍금에 맞춰 부른 적이 있었는데 잘 불렀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이상하게 그 노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 ‘칭찬의 힘’은 세월의 벽도 막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같이 졸업을 한 동기가 83명인데 3학년에서 5학년까지 3년은 한 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중도에 전학을 가거나 그만 둔 사람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90명 정도가 한 교실에서 복작거리며 생활한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이 만남은 그야말로 ‘죽마고우(竹馬故友)’의 만남이다. 이를 세속말로 의역하면 ‘불알친구’라고 하던가! 6년 동안 같은 ‘종소리의 뜨락’에서 살며 내가 그들의 마음에, 그들이 나의 마음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이 끈끈한 인연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바로 나의 고향 마을이고 고향 산천이다.
작은 꿈, 큰 꿈
중학교는 대구로 갔다. 촌놈이 고향을 떠나 도회지 학교의 종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까까머리에 교모란 것을 쓰고 또래들과 만나게 되었다. 모자 쓰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 곧장 잊어버리기가 일쑤였다. 마침 고종 사촌 동배와 같이 이 학교에 입학하여 우리는 같은 방을 쓰고 학교도 같이 다니게 되었는데, 동배도 모자를 잊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가다가 되돌아 와서 쓰고 가곤 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배와 성수가 싸움이 붙었다. 괜히 인상을 썼느니 등등 시비 거리를 만들어 토닥토닥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기 싸움이었다. 이들뿐만 아니고 싸움을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지만 이내 어깨동무를 하고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아버지가 경마장에서 근무했던 나의 짝지 성호는 말을 태워주었다. 내가 말을 타면서 좋아하자 하루는 그 아이가 자기네 말이 새끼를 낳으면 꼭 한 마리 주겠다고 했다. 내가 미심쩍어 하자 일부러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했는데 그 녀석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동배도 역시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와 나는 같은 방에서 약 10년 동안 같이 생활했다. 사촌이라고 하지만 형제 이상으로 지내며 많은 추억을 남겼다. 그와 내가 이따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은 밤을 새워도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급해 홀연히 떠났는지 야속하고 그립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범학교는 정식 건물이었지만 우리 사범병설중학교는 콜타르를 칠한 목재 가교사였다. 건물은 시골 초등학교보다 나을 것이 없었지만 운동장은 훨씬 넓었다. 그리고 예술관에는 피아노가 참 많았다. 마음껏 이용하라고 했지만 풍금만 보던 촌뜨기라 겁이 나서 피아노 뚜껑만 만지다가 흠집이라도 낼세라 조용히 닫고 나오곤 했다.
선각자적 안목으로 ‘새 농촌운동’을 벌이시던 농업 과목 김재덕 선생님이 계셨다. 이 분은 이미 1950년대 중반에, 그 보다 훨씬 뒤인 70년대 거국적으로 추진하여 그야말로 민족중흥을 이루었던 ‘새마을 운동’ 같은 것을 구상하고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지금의 낙후된 모습으로는 어려우니 ‘새 농촌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당신의 고향에서 이를 접목하셨다. 이를테면 초가집을 없애고 기와집을 만들었으며(뒤에 정부는 초가 대신 슬레이트 지붕을 이었다) 자가 발전을 일으켜 전깃불을 밝히고 젖소를 들여와 유축농업을 시작했다. 특히 지금도 어렵다는 유통 구조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도시와 농촌의 직거래’를 추진하셨다. 그것이 ‘농업협동조합’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학교에도 협동조합을 만드셨다. 그리고 학교 내에 젖소와 젖양 등을 키우고 학생들에게는 ‘1인 1토끼 기르기 운동’을 장려하셨다. 그런데 협동조합은 학생자치회가 중심이 되어 잘 운영되었는데 토끼는 문제가 생겼다. 학교 남쪽 언덕에 농장이 있었다. 그곳에 선생님께서 직접 키우시는 젖소와 젖양이 있었고 그 옆에 토끼 공동 사육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하게 토끼가 없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범인을 잡기 위해 학생들이 잠복을 했는데 잡고 보니 우리와 동급생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아이의 어머니는 폐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그 토끼를 훔쳐서 판 돈으로 어머니 약값을 대었던 것이다. 딱한 사정을 안 아이들이 처벌을 하지 말아 달라고 선생님들께 건의를 했으나 아이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이후 토끼를 다시 키웠으나 전처럼 신바람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끝내 농촌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범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완전히 고향 마을에 정착하셨다.
이 분은 나의 1학년 담임이시기도 했는데 나는 선생님의 ‘새 농촌운동’에 감동을 받아 ‘새 농민’이 되어 ‘새 농촌운동’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며 일기장에 앞서가는 ‘농촌상’을 그리곤 했다. 그것이 나의 작은 꿈이자 큰 꿈이었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덴마크를 유축농업국가로 발전시킨 그룬트 비 목사와 이엠 달가스의 깃발을 그려놓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나는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주문처럼 외치곤 했다. 나는 결국 ‘새 농민’을 하지 않고 교단에 머물게 되었지만 학생들도 곡식처럼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기에 또 다른 측면에서 ‘새 농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 한 분, 시인이시던 여영택 선생님을 만나 문학의 씨알을 심게 되었다. 1학년 때, 교지 ‘사원’에 ‘나의 삽’이란 글을 투고했는데 뽑아 주셨고 교내 백일장에 ‘보릿고개’란 작품에서 상을 받았을 때 선생님께서 분에 넘치게 칭찬을 해주셨다. 부족한 글이지만 지금까지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 때의 칭찬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50 계단의 추억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건물 자체부터 중세 교회를 연상시키는 붉은 벽돌에 담쟁이 넝쿨이 덮고 있었으며 교문에서부터 본관에 이르는 50계단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 학교는 ‘고등학교’를 붙이지 아니하고 유독 ‘계성학교’로 통한다. 지금도 우리는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그 자체가 ‘전통’과 ‘교풍’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51회 졸업생이니 지금은 100년이 된 학교이다. 이 학교는 ‘자유’를 강조했다. 신태식 교장선생님은 당신의 학교 경영관인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란 주제의 훈화를 많이 하셨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며 책임을 지는 사람이 누리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학교는 기율부란 것이 없었다. 머리도 완전 까까머리가 아니고 조금 길렀다. 교복도 단일색이 아니고 두어 가지 색깔을 허용하여 입게 했다. 교실에 환경 정리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어려운 일인데 그 당시에 벌써 선생님들마다 연구실과 사택이 있었다. 운동장 조례가 없었고 큰 강당에서 매주 1회 예배시간을 가졌는데 전체 학생에게 전달할 일이 있으면 그 때 했다. 졸업을 할 때 앨범도 만들지 않았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처음에는 매우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친구들 따라 교회도 더러 나갔고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 하는 교훈의 의미를 새겨보기도 했다. 졸업 이후는 유교적인 가정 분위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그 당시 배운 성경이며 찬송가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어 지금도 주기도문이며 찬송가 몇 곡은 부를 수 있다. 고등학교 친구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반반 정도 되었는데, 교인이나 비교인이나 간에 그 당시 종교 교육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학년 때 방송반에 들어갔다. 1학년 초, 아나운서 모집에 응시하였는데 내 목소리가 마이크를 잘 받는다고 뽑아주었다. 교내 뉴스도 내보내고 운동경기를 할 때는 중계도 하는 등 제법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면서 문예반 선배들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었다. 백일장에 장원을 한 사람은 문예반에서 활동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강제적으로 데리고 갔다. 이후 문예반 역시 적성에 맞아 서정원 선생님의 지도 아래 소설 습작도 하고 교지 편집을 맡는 등 문예반 활동을 열심히 했다.
백일장은 나와 인연이 많아 2학년 때는 ‘차하’를 하고 3학년 때 역시 장원을 했다. 그 인연으로 계속 글도 써 신문 및 문학지 몇 곳의 ‘작품모집’에 시와 수필 등이 당선했으며 책도 몇 권 내고 이 학교 출신들의 문학 모임인 ‘계성문학회’ 회원으로 활동도 하고 있다. 이 문학회에는 김동리, 박목월, 김성도 선배님도 계셨고 현재 문단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문인들이 많이 있다.
윤혜승 선생님께서 YMCA 소속 ‘H-Y’ 활동의 일환으로 ‘청맥회’란 서클을 만드시고 지도를 해주셨는데 내가 2기이며 한 기에 10여 명으로 구성되어 지금도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청맥은 ‘나를 바르게 알자, 남을 귀하게 여기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자’란 표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해마다 문학, 음악, 연극 등 종합 학예제를 가졌는데 이름하여 ‘청맥의 밤’이라 했다. 그 때 ‘낙엽 시화전’도 곁들였는데 우리는 이것이 전국 최초 ‘낙엽 시화전’이기에 큰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낙엽을 수집하기 위하여 가을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대구 근교의 송림사나 은혜사 등을 가기도 했고 때로는 경주까지 원정을 간 적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예쁘고 색깔이 아름다운 낙엽들을 수집하였으나 유독 한 친구는 벌레가 몹시 파먹어 일그러진 낙엽만 모았다. 얼른 보면 못 쓸 것 같은 것이라도 잘만 제 자리를 찾으면 그 나름대로 빛나는 면이 있을 것이라고 어른스런 주석을 붙였는데 과연 전시가 되었을 때 그 친구의 작품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그 아련한 추억들을 가진 우리들은 지금도 ‘맥우’란 이름으로 우의를 다지고 있다.
오씨와의 전쟁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대학 학보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수습기자로 시작해서 편집국장을 거쳤으니 4년 내내 학보사 지킴이 노릇을 했다. 그러니 전공보다는 오히려 기사를 취재하고 편집하는데 더 열을 올린 셈이다. ‘경북 인쇄소’에서 신문을 제작했는데 그 당시는 활자를 하나하나 주워서 판을 짜던 때이니 신문 한 장을 만드는데 며칠씩 걸렸다. 吳씨란 분이 조판을 맡았는데 그 분, 엄청 예민하여 약간만 뒤틀어지면 신경질을 부렸다. 그 분을 잘 구슬리는 것도 신문 제작의 한 역할이었다. 그 吳씨도 문제였지만 오자(誤字)의 ‘誤’씨도 엄청 문제였다. 오자를 내지 않기 위해 벌금을 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誤’씨는 용하게 숨어 우리를 괴롭혔다. 오자는 옥에 티가 아니고 흰 쌀밥 속의 지렁이였다. 그 때 스스로 ‘작은 별’이라고 부르던 여기자가 작사를 하고 신 아무개 편집 차장이 작곡을 한 ‘오자 타령’이란 것도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난 뒤 피로를 풀기 위해 향촌동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보면 기숙사 귀사 시간은 늘 늦었다. 호랑이 사감님께 고개를 조아리기가 일쑤였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던 서재극 교수님을 잊을 수 없다. ‘신문쟁이 하다가 시간을 놓치지 말고 학문의 길을 택하여 대학 강단에 설 생각을 하라.’고 충고를 하셨는데 그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 못내 죄송하다.
대학 서클 팀들이 월포 바다에 가서 캠핑을 한 적이 있다. 월포는 물빛이 푸르고 백사장 모래가 무척 고운 곳이다. 그리고 이름 그대로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운 포구이다. 이따금 지나간 앨범을 펼치고 그 때 찍은 사진을 들여다본다.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수영복을 입고 바다에 풍덩 빠져 마음껏 물장난을 치는 장면이다. 그 사진 속에 나에게 물을 끼얹는 아가씨가 있고 그 뒤에 흰 이빨을 내어놓고 웃는 친구가 있다. 그 아가씨가 ㅅ양이다. 그런데 그 흰 이빨의 친구는 이튿날 수영을 하던 중 갑자기 바다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청천벽력이었다. 이 친구는 나의 고등학교 동기로서 고등학교 때도 같은 서클에서 활동을 하던 친한 친구였다. 그 친구 마지막 가는 길에 하얀 소복을 입고 나타난 여자 친구가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커플이었는데…. 얼마 전에도 월포에 갔을 때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조약돌만 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ROTC 훈련도 받았다.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 강행되었던 병영훈련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래도 시원한 음료수 사들고 면회를 왔던 ㅅ양이 있어 많이 위로가 되었다. 그미는 임관식 때 나의 계급장을 달아주기도 했다.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임지로 가기 위해 열차를 탔을 때 여동생과 함께 배웅을 나와 손을 흔들었다.
공교롭게도 한탄강 가에서 근무하게 되었을 때 ‘한탄강’이 되지 말라고 그미를 본명 대신에 ‘吉江’이라고 불렀다. 편지도 ‘길강 통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 뒤 그 통신이 끊어지고 말았으니 결국 ‘한탄강 통신’이 되고 말았다.
교육대학원을 다니면서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시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회를 가진 것은 보람이었다. 논문은 ‘고시조 종장 초구에 나타난 감탄사 연구’이었다. ‘아희야’, ‘어즈버’, ‘두어라’ 등의 감탄사의 어원과 그 율격을 연구한 것이다. 논문을 지도해주셨던 강용권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기다리신다
교단에 서면서 이제는 종소리를 울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 종소리는 ‘어서 모이자’가 아니고 ‘기다리신다’로 바뀌었다. 기다리는 선생님은 제자들과 참 만남, 참 나누기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에 ‘어서 모이자’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해야 한다.
아동문학가로 한 평생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 어느 분은 젊은 시절 교회 문간방에 생활하며 종을 쳤던 분인데 그는 늘 맨손으로 종을 쳤다고 한다. 맨손으로 종을 쳐야 진실한 마음이 전달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갑을 끼면 마음을 가로막는 것 같고 어쩐지 종소리가 멀리 날아가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얼마만큼 맨손으로 종소리를 울렸을까? 교직을 마감하면서 두려운 마음 그지없다.
첫 교단, 첫 사랑
첫 교단 이서고등학교(伊西高等學校)는 나의 첫 사랑이다. 1970년 9월, 어수룩한 청년 한 사람이 그의 고향인 경북 청도의 이서고등학교 교문에 들어섰다. 그 때부터 그의 40년 교단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이 학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이서고 5회들이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종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두드리는 것이라 어깨에 힘만 잔뜩 들어갈 뿐 기대하는 소리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햇병아리 교사의 티는 첫 대면부터 나타났다. 첫 인사를 하는데 아이들이 ‘쿡’하고 웃었다.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급장이 ‘차렷 경례’를 하는 데 내가 꼿꼿하게 부동자세로 서 있는 것이 너무 낯설어 그렇게 웃었다는 것이었다. 장교로 제대한 직후라 나도 모르게 몸에 밴 습관대로 그런 어색한 모습을 연출했던 것이다.
1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학급 학생 수가 무려 75명이나 되었다. 그 당시는 공식적인 정원만 해도 60명이었다. 이 인원만 해도 지금의 2학급 정도인데 거기에 15명이 더 있었으니 거의 지금의 3학급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그 때만 해도 그런 무리를 하는 학교들이 있었다. 비록 1학년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등학생들의 덩치가 아닌가. 교탁 바로 앞에서부터 뒷벽까지 조금도 빈 공간이 없었다. 아무튼 이 학생들과 이 박 아무개 교사는 전생에 큰 인연이 있었던지 3학년 때도 그들의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 사람들과 만날 때 육군 장교, 박 중위로 나타났듯이 학급 운영도 전투를 연상하는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그 당시 내가 아이들에게 급훈이라고 내건 ‘불가능을 극복하자’란 것만 보아도 그 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당시 나는 나름대로 강렬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러한 일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때 학생들의 분위기가 ‘성적이 좋거나 가정환경이 좋은 학생들은 전부 도회지로 빠져 나갔으니 시골에 남아 있는 우리는 대학에 갈 수 없다’는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각심과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불가능 극복’이란 엄청난 주문을 내놓았다.
연일 나는 종소리 당당당 울리며 ‘돌격 앞으로’ 구령과 함께 소대장처럼 ‘나를 따르라.’라고 외쳤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강행군을 했다. 그 때는 ‘자율 학습’이란 말도 없을 때이니 아마 전국에서 ‘자율 학습의 원조(?)’쯤 된 것 같다. 일요일도 8시간씩 수업을 했다. 대체로 나의 과목인 국어를 기본으로 넣어 국어와 수학, 국어와 영어로 시간표를 짜서 4시간씩 운영하도록 했는데 어떤 때에는 혼자 8시간이나 수업하기도 했다. 평일 저녁에는 수학, 영어 선생님께 부탁하여 야간 보충 수업도 했다. 수당을 드리지 않는 대신 술은 내가 샀다. 한창 젊을 때이니 새벽까지 술을 마실 때가 많았는데 이튿날, 술을 깨우려고 한 시간 마치고 나면 박카스 한 병씩을 마셨는데 마침 국․수․영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기에 책상 위는 온통 박카스 병들로 가득했다.
그 때 나는 ‘부모 격리 운동’ 같은 엉뚱한 발상도 했다. 일반적으로는 수험생 곁에 당연히 부모가 있어야 하나 농촌의 사정은 그것이 아니었다. 농번기 때는 죽은 시체도 일어나서 일을 하는 시기였다. 그만큼 일손이 달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수험생이라도 우선 급한 것이 농사일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면 시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학교 앞에 방을 얻어 공부에 전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정방문도 많이 했다. 그 때는 자전거가 가장 좋은 교통수단이었다. 쉽게 허락을 하는 부모님도 있었지만 전혀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분도 있었다. 대개 몇 번 찾아가면 허락을 했지만 한 분은 도저히 아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분 왈, 나도 고집이 세다고 제법 소문이 났는데 나보다 더 세다고 하면서 허락을 했다. 그리고 먼 길을 오셨는데 달리 드릴 것이 없던 차에 마침 갓 낳은 계란이 몇 개 있으니 가져가라고 하면서 양쪽 주머니에 억지로 넣어 주었다. 그런데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오는 도중에 움푹 파인 길을 지나다가 자전거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일어나서 보니 주머니 속 계란이 깨어져 주머니와 옷이 온통 계란으로 범벅되고 말았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고 지성이면 감천이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을 켜게 되어 있듯이 결국에는 양이 질까지 변화시켜 불가능도 극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좋아서 그런지 나의 그 서툰 전략이 먹혀들어 의외로 입시 결과는 좋았다. 학력고사 응시생 50명 중 35명이 합격하여 퍼센트로 보아 경북 도내 10대 우수학교가 된 것이다. 이사장님께서 크게 기뻐하며 직접 먹을 갈아 친필로 쓴 표창장과 함께 적지 않은 부상금도 주셨다. 그 상금이 당시로는 꽤 큰돈이기에 직원 회식도 하고 학생들의 장학금으로도 내놓았다.
나는 이 첫 제자들과 지금도 이따금 만나 옛날이야기를 하는 기회가 있다. 나와 나이 차이도 별로 없는 사람들이니 선생인 나보다 머리가 더 하얗게 센 제자들도 많다. 어떻게 보면 스승과 제자가 아닌 같이 늙어 가는 친구 같다. 고향에서 이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객지에 나가 있는 형님을 대신해서 고향집을 지켜주는 동생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있을 때 결혼하여 인생 반려자도 만났다. 그 때 이 학교는 직원 식당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들도 도시락을 전부 싸가지고 갔다. 보온밥통이니 하던 것도 없던 때이니 겨울철에는 4교시쯤 되면 난로 위에 얹어 다시 덥혀 먹었다. 아내는 계란 프라이를 하여 밥 위에 덮어주곤 했는데 그게 별미였다. 퇴근할 때는 도시락을 자전거 꽁무니에 실었다. 떨어질세라 굵은 줄로 친친 감았는데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반찬통이 몹시 요란스럽게 울어댔다.
삼대가 같이 살던 집이라 갓 결혼한 새댁인 아내는 남편이 퇴근을 해도 부끄러워 그냥 입만 방긋할 뿐이었다. 그 때 장녀가 태어났는데 제 아이도 어른들 앞에서 안아 주면 흉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무릎 위에 기어오르려 하면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손으로 슬슬 밀어내었다. 그 아이가 자라 벌써 30대 후반이 되었으니 덧없이 흘러가는 것이 세월이다.
전생에 큰 인연이 있었던 사하
사하중학교(沙下中學校)는 내가 고향 청도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처음 만난 학교이다. 1973년 3월부터 1980년 2월까지 7년 동안 초대, 2대, 3대 교장 선생님이 바뀌도록 근무했으니 내가 근무한 학교 중에 가장 오래 근무한 학교이다.
처음 이 학교에 올 때만 해도 주변에는 논밭이 많아 모내기를 하고 쟁기질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시골 태생인 나는 그런 분위기가 오히려 좋았다.
이 학교에서는 급훈을 ‘불가능을 극복하자’란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하루가 하루 되게 하자’로 했다. 상황도 달라졌고 나름대로 ‘하루’란 기본적인 단위를 강조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붙였다. 아무튼 이 ‘하루가 하루 되게 하자’ 급훈은 그 이후 내가 담임을 맡는 반에 늘 붙어 있었다. 하루를 잘 사는 사람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이고 생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반에도 붙이고 나아가 나의 삶의 지표로 삼고자 했으나 돌아보면 제대로 된 ‘하루’를 만들지 못한 날이 너무 많아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 당시 ㄱ교장 선생님께서 독특한 아이디어로 파격적인 상을 제시하셨다. 연중 학급을 평가하여 학년말에 가장 우수한 반 전원에게 고급 만년필을 부상으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만년필이 귀할 때이니 학생들은 상당히 고무되어 있었다. 우선 학급마다 학급 기를 만들었고 그 학급이 단체상을 받을 때마다 그 기에 해당 분야의 리본을 교장선생님께 직접 달아주셨는데 연말에 그 리본이 많은 반이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 반도 만년필을 차지하기 위해 ‘성적 우수반’ ‘저축 잘 하는 반’ ‘환경미화 우수반’ 등의 리본을 달면서 꽤 분위기가 달아올랐는데 중간에 전입생 한 명이 학급의 분위기를 흔드는 통에 아쉽게 탈락하였다. 몹시 실망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자유 교양 도서 읽기 대회’란 것도 있었다. 동서고금의 명작들을 학생들이 읽고 학교 대회, 지역 예선 대회를 거쳐 전국 단위 경시대회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 대회는 당시의 문교부(지금의 교육과학부)가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으로 전 학교가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있었는데 마침 내가 이 학교 학생들의 지도를 맡게 되었다. 우선 교내 대회에서 10여 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밤늦게까지 지도했다.
아이들이 열심히 따라 주어 부산 경시 대회는 물론 전국 경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렸고 또 독후감 부문에서도 전국 은상이 나왔다. 이 아이들 덕분에 나는 우수 지도교사에 이름을 올리고 청와대에 들어가 영부인과 악수를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때 연구 논문도 참 많이 썼다. 내가 자의로 쓰기보다는 당시 ㅈ교감 선생님께서 자료를 계속 제공해 주셔서 쓴 것이다. 아마 그 때는 교사들의 연구 실적이 학교 평가와 관련이 있었던 듯싶다. 교감 선생님께서 권유를 해도 다른 선생님들은 별로 반응이 없는데, 내가 고분고분 작성을 할 뿐더러 상도 타오고 하니 기특한 마음에 계속 자료를 주셨다. 결과적으로 이 연구물들이 뒤에 교직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학교에 있을 때 연식정구를 배웠다. 이것도 테니스이지만 보통 공이 말랑말랑한 것은 연식정구라고 불렀으며 공이 단단한 것은 테니스라고 했다. 지금은 연식정구를 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 때는 테니스보다 연식정구가 주류였다.
학교에 정구장도 없었다. 운동장 귀퉁이에 대충 비로 쓸고 선을 그어 공을 치니 공이 제 마음대로 튕겨 나가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조금 지나면서 우리가 직접 땅을 파고 흙을 고르는 등 작업을 하여 간이 정구장 하나를 만들었다. 그 당시 선생님들 중에 학창시절 선수 생활을 하셨던 분도 있었고 구력이 오래된 분도 많아서 따로 레슨비가 들지 않아도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공이 조금 몸에 익자 ‘교직원 연식정구 클럽’에 가입하고 에덴 공원 등에서 정기 시합을 가지며 마산, 의령 등지에 원정 경기도 했다. 공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의령 원정 경기에서 결승전에 진출하여 준우승을 한 일이 있었다. 경기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공이 잘 맞을 때도 있고 반면 너무 맞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 날은 강적들이 많았는데도 게임이 잘 풀렸다.
일본 교사들과 교환 경기를 하기도 했다. 그 때 우리나라는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해 공무원들 여행을 통제하고 있었기에-통제를 하지 않아도 돈이 없어 못 갔겠지만-일본에 가지 못하고 일본 교사들이 2년 단위로 한국에 나왔다. 자기들만 계속 오게 되자 일본 교사들이 미안해하며 일본에 오게 되면 자기들 차로 안내할 테니 꼭 한 번 방문하라고 했다. 그 때 마음대로 해외여행을 하고 자가용까지 굴리는 일본 교사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 당시 우리 교사들 중 차를 가지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때는 내기 정구 경기도 참 많이 했다. 그 때 쌍방이 합의하여 작성한 계약서가 참 재미있었다. “승자는 패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단 승자가 그만 할 때까지 따라 다닌다.” 이 무슨 해괴한 계약인가? 즉 패자는 승자가 ‘이제 그만 집으로 가도 좋다.’ 할 때까지 술을 사주면서 따라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이기면 기고만장했다. 참, 젊은 기분에 술도 엔간히 마셨던 것 같다. 그때는 ‘소콜주’, 즉 소주와 콜라를 같이 타서 마시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면 “그냥 갈 수 없잖아 소콜주 한 잔 하고 가야지~” 하고 어떤 노래 곡에 개사하여 부르곤 했다. 어깨동무를 한 동료들의 땀 냄새까지 사랑하던 젊음의 계절이었다.
이곳에서 동 학년을 같이 했던 선생님들의 끈끈한 우의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학교를 떠날 때 아홉 명의 선생님들이 ‘구구회(九久會)’란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름 그대로 아홉 명의 부부가 99세까지 건강하게 정을 다지자는 것이다. 구구회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30년 이상 기쁠 때는 같이 웃고 슬플 때는 함께 울고 있다.
이 학교에서 교지 ‘낙동강’의 편집을 맡았다. 2호부터 7호까지, 무려 6권의 책에 관여했으니 ‘낙동강’도 나와 인연이 깊은 추억의 강인 셈이다. 이후 내가 만들지 않았던 창간호와 8호까지 구하여 책장 속에 잘 보관하였다. 책장이 비좁아 정리를 할 때도 이것만은 계속 보물단지 모시듯 했다. 그런데 몇 해 전 사하중학교에서 역사실을 만들려고 하는데 교지가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듣고 전부 기증했다. 30년 이상 보관하고 있던 것이라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오랫동안 보관한 큰 의의를 찾은 것 같았다. 그날 그 교지를 다시 쓰다듬으며 이제는 사하중학교 역사실에서 소중한 자료로 잘 보관되기를 빌었다. 당시의 앨범도 함께.
아무튼 ‘사하’란 이름은 나와 전생에 큰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사하중학교’에 근무한 7년만 해도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사는 집까지 이 학교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정문 앞에 10여 년을 살았고, 조금 벗어났다고 해도 걸어서 10여 분 정도의 거리이다. 그것이 어언 약 40년의 세월이니 고향보다도 훨씬 더 오래 살게 된 것이다.
이 학교에 있을 때 숙직을 하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잠깐 저쪽 세상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목숨을 건졌으니 새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사하에서 다시 출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집 아이 3명도 모두 이 사하 지역의 초․중․고를 졸업했다. 특히 아들은 바로 이 사하중학교를 졸업했다. 항상 모교 같은 기분이 드는 사하중학교, 그 이름을 소중히 받들고 있다.
사랑받은 꺼벙이
은하여자중학교(銀河女子中學校)-지금의 부산여자중학교(釜山女子中學校)이다. 1980년 3월에 부임했다. 이듬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령이 나는 통에 꼭 1년밖에 근무하지 않은 학교이지만 오래 근무한 학교처럼 정이 들었다. 이 학교를 생각하면 살구꽃 화사한 꽃망울에 매달리던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항상 귀에 쟁쟁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정말 호흡이 잘 맞던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울고 웃으며 감격 속에 박수를 보내주던 아이들, 별 행동이 아닌데도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난 듯 웃음을 달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국어 시간을 기다리던 교탁 위의 과자며 음료수들, 홍조 띤 얼굴로 건네주던 넥타이, 손수건, 도장, 친구 몰래 책상 위에 가져다 놓던 꽃꽂이, 이 모두가 앳된 꼬마 숙녀들의 사랑스런 향기였다.
내가 한 자리에서 100여 장의 사진을 찍는 기록을 남긴 것도 이때이다. 부산에 눈이 잘 오지 않는데 80년 어느 겨울날 그야말로 하이얀 백설이 온 교정을 덮었다. 이에 감동한 아이들이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나를 놓아주지 않고 한 아이가 나가고 나면 또 다른 아이가 옆에 서는 통에 계속 그들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눈만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아이들은 그 자신들을 닮은 하이얀 눈을 너무 좋아했다. 그 아이들은 해가 달면서 눈이 녹기 시작하자 탄식을 하며 발을 굴렸다. 너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 통에 수업이 안 될 지경이었다.
요즈음은 편지를 잘 쓰지 않았지만 그 때는 이메일도 없고 휴대폰도 없으니 편지가 최대의 교신 수단이었다. 방학 때가 되면 정말로 많은 편지가 왔는데 답장을 하는 것이 방학생활의 주요한 일과였다. 얼마 전, 보관하고 있던 추억에 젖은 편지들을 다시 꺼내어 ‘25년 만에 다시 쓰는 답장’을 썼으며 이를 나의 수필집 ‘솔바람 초록빛 바다’에 실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따르는 것은 좋은데 민망하게 만든 일이 몇 건 있었다. 한번은 교육청 장학사가 나와서 이 학교 학생들을 표집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날 나는 출장을 가고 없었다. 그런데 그 설문 항목 중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하는 것이 있었는데 황송하게도 거기에 나의 이름이 너무 많이 섞여 나왔다. 장학사는 아이들이 장난을 쳤다고 화를 내며 새로 작성하게 했다. 또 하나, 하루는 내가 교과를 맡고 있는 어느 반 급장 어머니가 아이의 일기장을 몰래 가지고 왔는데 ‘낳으신 분은 부모님이고 기르시는 분은 박 아무개 선생’ 이라고 적혀 있었다. 너무 송구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었으리라.
내가 이 학교에 근무할 때만 해도 30대 중반이었다. 한 번은 학생들의 체격 검사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줄자를 들고 여 선생님들의 가슴둘레는 내가 재겠다고 나섰다. 여 선생님들이 도망을 갔다. 그 때 마침 교장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임 모 여 교장 선생님이셨다. “교장 선생님, 박 아무개 선생이 가슴둘레 재려고 해서 못살겠습니다.”하고 고자질을 했다. 그 때 교장 선생님 “그래, 그럼 내부터 한 번 재 봐라.”하고 두 팔을 번쩍 드셨다. 졌다. 내가 어떻게 감히 여 교장 선생님의 가슴을 잴 것인가? 또 한 번은 교장 선생님께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하고 오셨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며 농담을 했다. “교장선생님 오늘 30대로 보이십니다.” 그 때 교장 선생님 “그래, 그럼 오늘 박 선생과 데이트 한 번 하자.” 또 졌다. 그런데 한 번은 이긴 적도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그 때는 교무실에 대형 기름 난로를 피울 때인데 난로의 굴뚝이 교무실을 가로질러 나갔기 때문에 꽤 길었다. 그 때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즉석에서 백상지를 구해 굴뚝에 ‘은하그룹 회장 임 아무개’를 필두로 부회장, 기획이사, 행정처장 등 내 마음대로 직책을 붙여 죽 늘어놓았다. 그런 뒤에 교장 선생님을 교무실에 오시라고 했더니, 교장 선생님께서 이를 보시고 “박 아무개 선생이 돈을 내라고 하는구나.” 하면서 꽤 큰돈을 붙였다. 교장 선생님께서 돈을 붙이자, 교감, 행정 과장, 각 부장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법 많은 돈이 모였다. 그 돈을 가지고 그날 저녁 전 교직원 회식을 한 적이 있다. 아마 2차까지 간 것 같다.
아이들은 나를 만화 주인공 ‘꺼벙이’를 닮았다고 ‘꺼벙이’라고 불렀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엄청 꺼벙한 사람이다. 아마 그 꺼벙한 것이 바탕색이 되어 그들의 마음이 편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은하여중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정말 고마우이’하고 웃는다.
영원한 아카라카인들
경남상업고등학교(慶南商業高等學校)-지금의 부경고등학교(釜慶高等學校)이다. 1981년 3월부터 1986년 2월까지 5년간 근무한 학교이다. 나는 이곳에서도 교지 ‘구덕(九德)’을 5권 편집했는데 그 교지에 특집으로 ‘경상 40년사’를 정리했다. 이 학교 출신도 아니면서 학교 역사를 정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고 관계되는 분들의 증언을 듣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완성을 했는데, 나는 이 작업 중 ‘경상인’들이 정말 의리와 협동심으로 똘똘 뭉쳐 그 어느 학교보다도 모교애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학교에는 ‘아카라카’란 특유의 구호가 있다. 학교의 주요 행사나 학교의 교기인 야구와 축구 경기를 할 때마다 신발을 거꾸로 들고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외치는 것이다. 이 ‘아카라카’는 진한 모교애를 만들어내는 그들의 강력한 주문이었다. 나도 그들이 ‘아카라카’를 외칠 때 덩달아 좋아서 그 구호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정작 이것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 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이 뜻을 ‘경상 40년사’에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고증했다. 그 결과 ‘아’는 모음의 가장 큰 소리고 ‘카’는 가장 예리한 소리이며 ‘라’는 가장 명랑한 소리이니 즉 ‘크고 예리하고 명랑하게 화합하여 영원히 모교를 사랑하자’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 내용을 ‘경상사’에 기술하고 또 그 정신을 상기할 수 있는 ‘아카라카頌’이란 시를 지어 교지의 권두시로 실었다.
몇 년 전에 이 학교 제자들이 마련한 ‘졸업 20주년 기념 사은회’에 연속해서 3년 동안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격려사를 할 기회가 있어 제자들에게 이 ‘아카라카’ 어원을 다시 설명하고 자리에 선 김에 ‘아카라카頌’ 시를 암송하겠다고 했다. 그 날 격려사는 전혀 예고된 것이 아닌 즉석연설이었고 시 역시 메모한 것이 없었다. 순간 분위기에 들떠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나 자신도 일변 20여 년 전에 쓴 시를 과연 외울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시 구절들이 의외로 술술 잘 풀려 나왔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사실 이는 나의 ‘경남상고’에 대한 관심이다. 만일 20여 년 전에 쓰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덮어두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학교를 떠나 있는 중에도 생각이 나면 그 시를 머릿속에 떠올린 일들이 많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카라카頌’의 낭송이 끝나고 난 뒤 자리에 돌아왔을 때 여기저기에서 제자들이 몰려와 다투어 술을 권했고 노래도 몇 곡 하는 등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 때 ㅎ군이 나의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보살펴주신 덕분에 오늘의 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면서 술을 권했다. 그러면서 ㅎ군은 그가 20년 전, 수업시간이나 조․종례 시간에 내가 한 말들을 줄줄이 풀어 놓았다. 그 때 옆 자리에 있던 ㄱ군이 “그 녀석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좋아 국어 공부밖에 안 한 것 아십니까?” 했다. “아니, 그랬어?”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학교에 다닐 때도 잘 따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무튼 너무 고마웠다.
특히 이곳의 36회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은 지금도 자주 안부를 묻고 틈틈이 자리도 같이 한다. 나는 이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교사의 보람은 재물도 명예도 아닌 제자들이 옛 스승을 잊지 않는 것인데, 이 친구들은 졸업을 한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사제지간의 끈끈한 정을 이어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부부 동반으로 청도 고향집까지 같이 동행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고 하니 너무 고마울 따름이다.
이 학교에 있을 때 아버님께서 별세하셨다. 당신께서는 항상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을 강조하셨다. 공직자는 개인의 일 때문에 공적인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어떻게 되어도 공적인 것이 더 중요하면 그 쪽 일을 해야 된다고 하셨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 정말 돌아가시는 것도 방학 때인 12월 31일에 돌아가셔서 학교 업무에 지장이 없게 하셨다.
아버님, 이제 교직을 마감하려 합니다.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하려고 다짐을 하곤 했지만 돌아보면 그래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죄스러울 뿐입니다.
바람돌이의 행복
부산여자고등학교(釜山女子高等學校)-86년 3월부터 91년 2월까지 5년 동안 생활했는데 이 학교의 교화인 동백꽃 송이마다 사연이 소복소복 쌓였던 것 같다. 이곳의 아이들은 나에게 ‘바람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는 처음에 ‘바람돌이’라고 부를 때, ‘바람둥이’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하루에 한 가지씩 소망을 들어주는 만화영화의 주인공 ‘바람돌이’라고 해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 근무하던 5년 내내 ‘바람돌이’ 노래를 들으며 행복했던 것 같다.
부산여고에는 ‘반짝이’란 게 있었다. 어떤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가면 눈이 ‘반짝반짝’한다고 붙여진 말이다. 나에게도 꽤나 반짝이들이 있었다. 틈만 나면 사진을 같이 찍자고 졸라대었다. 한번은 축제 가장 행렬에 참가한 아이들이 달려와서 나의 팔짱을 끼었다. 한 아이는 족두리에 색동옷을 입은 새색시이고 한 아이는 면사포를 쓴 5월의 신부였다. 지금도 그 사진이 남아 있는데 흡사 결혼식 사진 같다. 이 친구들 덕분에 MBC 방송의 ‘파이팅 우리 선생님’이란 프로그램에 초대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 때 나는 부산여고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부산여고는 낙동강을 어머니로, 승학봉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학교입니다. 낙동강이 1300 리를 흘러오는 동안 주변 학교에서 저마다 자기네 강이라고 교가 등에 붙여서 유혹했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하단포구까지 유유히 흘러온 것은 백두대간의 마지막 정기가 고스란히 담긴 승학봉이란 짝을 만나 부산여고를 잉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부산여고야말로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부산여고는 멀리서 바라보면 백학이 나래를 펴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산여고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관입니다. 낙동강이 바다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아쉬운 미련이 노을로 변하여 붉게 타오르며 하늘에서 시작한 노을은 들이며 강까지 붉게 물들입니다. 소녀들은 감동에 젖어 탄성을 자아내며 눈물까지 그렁그렁 달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습니다. 이 노을 하나만 보아도 부산여고에 입학한 보람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동백의 향기가 가득한 이만 사천 평 큰 배움터에서 미래의 아리따운 일꾼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교내에 풀장을 갖춘 학교이다. 여름방학이 되면 풀장을 이용하여 ‘수영 교실’을 열었다. 정말 교정에 수영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이 친구들이 누리는 큰 즐거움이었다. 한번은 아이들이 수영을 하는 곁에 얼쩡거리다가 갑자기 물에 밀어 넣는 통에 양복이 흠뻑 젖는 봉변을 당한 적도 있다. 이곳 친구들은 지금도 나의 홈페이지를 찾아와 그 때 소녀의 꿈이 묻은 분홍빛 자락을 살포시 내려놓기도 한다. 문득문득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 ‘바람돌이’를 외치며 강짜를 부리던 그 아이들과 등나무 그늘에서 다시 한 번 문학 수업을 하고 싶다.
나는 이곳에서 이른바 야전군 사령관이라고 불리는 3학년 부장을 2년이나 맡았는데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넣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다행히 입학 성적이 좋았다. 평준화 이후에 제일 좋은 성적을 올렸다고 동창회에서 크게 기뻐하며 3학년 담임 전원, 제주도 여행을 보내주었다. 그 팀들이 지금도 ‘승학회(乘鶴會)’란 모임을 가지고 있다.
‘동백마을’이란 학교 신문을 만들었다. 그 때는 아직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은 시기라 가장 빠른 것이 ‘타자’였기에 개인적으로 전동 컴퓨터를 구입하여 직접 쳐서 만들었다.
이 학교에 근무하던 86년도에 중고 승용차를 한 대 구입했다. 비록 중고차라 해도 상당히 빨리 차를 산 셈이었다. 그 당시에 이 학교 전체에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5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차주 계를 조직하여 새 차를 구입하면 시트커버도 해주고 차에 이상이 생기면 즉시 출동하여 같이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그때는 차를 구입하면 꼭 고사를 지냈다. 돼지머리를 놓고 무사 기원의 축문을 읽었는데 내가 많이 담당했다. 돼지머리에 꽂힌 돈을 모아 그날 저녁 회식을 했으니 불공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행사였다. 내가 처음 차를 구입했을 때, 고사를 학교에서만 지내는 것이 아니고 집에서도 지내야 한다고 했다. 할 줄 모른다고 하니 푸닥거리를 하는 사람이 와서 해준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짝 남몰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큰 북과 징을 가지고 와서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두드려댔다. 차나 좋은가? 고물차 한 대를 놔두고 그 작당을 벌였으니. 구경거리가 난 줄 알고 온 아파트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았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홍당무가 되어 사고가 나도 좋으니 그만두라고 애원하여 전을 거두었다. 그 때만 해도 아파트에도 차가 별로 없던 때이다. 88 올림픽 이후 차가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니 90년대 중반부터는 학교에서 고사를 지내던 것도 자연히 없어졌다.
내가 3학년 부장을 할 때, 3학년에 우리 집 장녀가 다니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있는 학년을 맡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전 해에 입시 성적이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 거기에 미련을 가진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 억지로 맡겼다. 불편한 점이 역시 많았다. 수업도 보통 같으면 1반에서 6반까지 맡는데 아이의 반인 3반을 빼고 7반을 맡았다. 시험문제도 말썽이 생길세라 엄청 조심을 했다.
정말 더 어려운 것은 마지막 대학 진로를 결정할 때였다. 그 때는 선 지망을 하고 후 시험을 볼 때이며, 입학전형도 지금과 달리 전국 대학이 동시에 같은 날 했기 때문에 한 해에 한 대학만 지원하게 되어 있었다. 연중 모의고사 성적을 가지고 사정 자료를 만드는데 공교롭게도 그해, 이 아이와 성적이 비슷한 학생들이 많았다. 욕심 같아서는 눈 딱 감고 한 번 넣어 볼 수 있는 곳도 있었지만 학년 부장은 그렇게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렇게 하다가는 다른 아이들까지 부추겨 한 해의 입시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딸을 설득했던 일이 지금도 미안하다.
당시 강 아무개 선생님도 딸이 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나의 경우는 억지로 딸 아이 학년을 맡게 되었지만 이 분은 일부러 딸이 있는 반에 자원하여 수업을 하셨다. 그 때 내가 “나는 같은 학년에 있는 것만 해도 불편한데, 선생님은 직접 그 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하시니 불편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씀드렸더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딸이 항상 감시한다고 생각하니 교재 연구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공평하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항상 저울추가 복판에 있어서 좋습니다.”하고 말씀하셨다.
정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신 분, 저울추가 복판에 있던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교단은 밝고 든든하게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물결의 메아리
부산남고등학교(釜山南高等學校)-1991년 3월부터 1996년 2월까지 이 학교에서 5년 동안 근무했다. 나는 이곳에서도 3학년 부장을 맡고 3학년 담임도 여러 차례 했는데 지금도 이 학교의 정독실인 ‘홍지관(鴻志館)’에서 아이들과 밤 12시까지 씨름을 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 아이들과 이따금 만나면 꼭 떠올리는 곳이 ‘홍지관’이다. ‘홍지(鴻志)’란 ‘참새 같은 소인배가 되지 말고 기러기처럼 큰 뜻을 가지자’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뜻을 새기며 잘 이겨내던 친구들은 지금 각계각층에서 나름대로 큰 뜻을 펼치고 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인사차 들렀던 김 아무개 군도 ‘홍지관’ 생활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또 ‘부산남고’ 하면 ‘한물결’을 빼놓을 수 없다. 교가며 교지, 강당 이름 등등 많은 이름이 ‘한물결’로 시작한다. ‘한물결’이란 태평양을 향하는 ‘큰 물결’을 말하는 것으로, 이 ‘한물결’ 속에 큰 꿈을 키우고 있다. 이곳에 재직할 때 부산남고 응원가를 만들었는데 내가 가사를 쓰고 전세용 선생님이 곡을 붙였다. 그 가사에도 한물결의 푸른 기상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학교에서 3학년 부장을 맡았을 때 ‘대학방문’을 기획했다.
3학년을 맡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11월 수능 시험 이후 지도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시험 전보다 시험 후 지도가 오히려 더 어렵다고 한다. 수업을 한다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고 체육대회나 영화관람, 고적탐방 등을 해도 별로 호응이 없었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그런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시간 때우기 일과였다.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아무래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좀 더 실속 있는 프로그램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 ‘대학 방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대부분 어느 대학이 어느 지역에 있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대학에 직접 들어가서 설명을 들을 기회는 별로 없다. 딴에는 진학지도를 오래 했다고 생각하는 나도 그런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 방문’ 안을 ‘프로그램’화 하여 교장선생님께 결재를 받고 즉시 대학에 공문을 보냈는데 대학에서도 호응이 좋았다.
대부분의 대학이 스쿨버스를 제공하는 등 교통편을 도와주었다. 어떤 대학은 부산남고 출신 재학생들이 도열하여 환영하고 부산남고를 졸업한 교수들이 후배들에게 대학을 소개했다. 어떤 대학은 총장이 직접 대학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각 대학마다 홍보하는 포인트도 다양했다. 어떤 대학은 도서관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대학은 기숙사를, 어떤 대학은 IT시설을, 어떤 대학은 학교의 실습선을 띄우기도 했다. 이처럼 현장에 가서 직접 듣고 보게 되니 훨씬 효과가 컸다. 대학에서도 담임선생님들에게 간접 홍보하는 것보다 직접 홍보할 기회를 만들어 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다음해부터는 자기들이 기획하여 초청하겠다고 했다.
아무튼 이 ‘대학 방문 프로그램’은 그 다음 해부터 부산 시내 전 고교로 확대되어 수능 이후 주요한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
이 학교에 근무하던 90년대 초반에 컴퓨터가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 학교에 갈 때만 해도 XT 기능의 구형 컴퓨터를 사용했다. 작동하려면 6장의 디스켓을 번갈아 넣어가며 불러들여야 했다. 이를테면 시작하는 디스켓이 있고 한글을 부르는 것이 있고 한자를 부르는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 해도 타자기보다는 몇 배로 더 좋았다. 우선 문서가 저장 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저장해둔 시험 문제나 공문서 등을 다시 꺼내어 볼 수 있으니 이렇게 좋은 것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문서의 혁명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열심히 배우며 적극 활용했다.
얼마 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286컴퓨터가 출시되었다. 즉시 한 대 구입했다. 워드는 그 당시 ‘글 1․5판’이 대종을 이루었다. 다른 종류도 뒤에 나왔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글’에 익숙한 처지라 따라잡지 못했다. 그야말로 도둑을 맞아 성공한 것이 ‘글’이란 말이 나올 만했다. ‘글 1․5판’이 일반화되자 회사에서는 이제 ‘글 2․0’을 개발함과 동시에 잠금 장치를 철저히 하여 고가에 팔기 시작했다. 나도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정품을 구입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잠금 장치가 풀려 해적판이 시중에 나돌아 다녔다. 열 명이 지켜도 도둑 한 명 막지 못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했다.
그 이후 컴퓨터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니 발전이라기보다 비약이란 말이 맞을 듯했다. 나는 처음에 286컴퓨터를 구입했을 때 그 기능에 매료되어 이것만 하면 이제 평생 동안 바꾸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이내 386이 나오고 다시 486 그리고 팬티엄급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따라 잡기가 힘들 정도로 혁명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바뀔 때마다 숨이 찼지만 대열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배웠다. 마침내는 당시로는 상당히 고가품인 노트북까지 구입을 했다.
나는 이 학교에서도 ‘부산남고 40년사’를 정리했다. 이 학교에 2회 이상 재직하셨던 분들의 좌담 형식을 빌었다. 물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사람의 기억에 한계가 있는지라 학교일지, 앨범, 학급일지, 교지, 사진첩, 동문 방문을 통해 많은 것을 보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산남고사’를 정리하면서 이 학교만큼 어려움을 겪은 학교도 드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산남중에서 출발, 남항동에 잠깐 머물다가 신선동에는 새 건물을 지었으나 태풍에 학교 건물이 무너져 다시 남중 구내로 들어와야만 했다. 그 뒤 청학동에 새 터전을 잡았지만 주변이 임해 공단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여섯 번 만에 겨우 현재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제 부산남고는 그 어려움 모두 날려 보내고 동삼동 볕바른 언덕에서 한물결의 큰 기상으로 꿈을 키우며 명문고로 우뚝 서 있다.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 첫 수필집 ‘안경을 왼손에 들고’를 출간했다. 나는 신춘문예 입상 이후 ‘교목’ 및 ‘계성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는데 그 동인지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고향, 여행, 군대, 교단, 사색 등으로 분류하여 엮었다. 특히 이 수필집에는 소설의 형태를 띤 수필들이 많아 ‘이야기가 있는 수필집’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그 이후 창조문학신문(수필), 월간 ‘문학광장’ 신인문학상(수필)에 이어 시에도 관심을 가지고 서정문학 신인문학상(시), 작가시선 신인문학상(시)을 받았다.
섬마을 선생
가덕도(加德島)에 있는 덕문고등학교(德文高等學校)-1996년 3월부터 1999년 2월까지 3년 동안 근무한 곳이다. 불행하게도 ‘총각 선생’이 아니라서 섬 처녀와의 러브스토리 같은 것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쉼표와 느낌표가 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분명히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차가 안으로 들어가지만 내가 근무할 당시만 해도 하루 몇 차례 다니는 도선이 섬과 뭍을 연결해주는 곳으로 어느 모로 보아도 도저히 광역시라 할 수 없는 매우 열악한 낙도이었다.
주민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학교 근처 성북리(城北里)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농사만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 아이들의 구성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우선 이곳 주민들의 자녀가 있고 또 이곳에 소양 보육원이란 큰 보육원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이 학교에 많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반 정도는 시내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시내에서 온 학생들 대부분은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에 실패한 학생들로 다시 한 번 대학 진학의 기회를 잡기 위해 온 아이들이었다.
나는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사택 생활을 했다. 사택이래야 두어 평 남짓한 방 한 개가 전부였다.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오후에는 여유 시간이 많아 사택에 있는 선생님들과 새바지 바닷가에 나가서 수석을 수집했다. 이곳에는 빠알간 핏줄이 엉켜 있는 것과 같은 특유의 혈석(血石)이 많았다. 전국에서 이 돌이 나는 곳은 이곳뿐이다. 잘만 하면 제법 괜찮은 명품을 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가곤 하지만 그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미 수석 수집가들이 샅샅이 뒤진 터라 작품이 될 만한 것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갈 때마다 자기가 주운 돌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명품이라고 우기곤 했다. 그날그날 품평회를 하여 상등품이라고 평가 받으면 기분이 좋아 술과 밥을 샀다. 나도 술과 밥을 산 돌들이 꽤 있었는데 지금은 죄다 고향집 정원에 옮겨 놓았다.
‘할매집’이란 식당이 있었다. 간판이 있는 집도 아니고 허가를 낸 집도 아니다. 그저 가정집인데 음식 솜씨가 좋은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함께 밥집을 했다. 할머니는 정말 정갈스럽게 토속적인 음식을 만들었고 할아버지는 구수한 입담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할아버지는 그림도 잘 그리고 일본말도 잘 하는 개화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이곳 출생도 아니고 덕문 학교에 근무한 적도 없지만 이곳에 정착한 햇수가 오래 되었고 또 밥집을 하면서 수많은 덕문 사람들을 만난 덕분에 덕문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병을 얻어 돌아가셔서 다시는 그 구수한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삼가 명복을 비는 마음 간절하다.
나는 이 학교에서도 ‘덕문 50년사’를 정리했다. 학교사와 나는 인연이 참 깊다. 경상 40년사, 부산남고 40년사, 덕문 50년사, 부산서여고 20년사, 모라중 20년사-부산서여고와 모라중은 기본 뼈대만 정리한 약식 역사이지만 앞의 세 학교는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내가 학교사 정리를 위해 이리 저리 뛰는 것을 보고 지인들이 농담 반 진담 반 ‘일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가는 학교마다 학교사의 작업이 시작되곤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이는 관리자분들께서 나에게 은근히 기대하는 점 때문에 그렇게 된 점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내 자신이 스스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청한 일면도 있다.
학교사 정리의 주요 관건은 자료이다. 학교사를 정리할 때마다 교내 곳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만족할 만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학교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졸업생 및 근무했던 교직원, 학교와 관련이 있는 지역 인사들을 최대한 방문하여 자료를 발굴하고 증언을 청취하는 것이었다. ‘덕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역사의 생명은 진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어떤 일, 어떤 사람의 행적도 잘못하면 과장이 되거나 아니면 자칫 왜곡되는 일이 생긴다. 또 똑같은 일을 했더라도 일의 시점이나 상호관계에 따라 그 사람의 업적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학교 건물을 짓는 일이라고 하자. A가 B에게 돈을 희사하게 하여 건물을 지은 것과 B가 먼저 돈을 내면서 A에게 건물을 짓게 한 것은 똑같은 일이라도 공적은 다른 것이다. 덕문에도 그런 일이 있어 자료를 여러 차례 검토하고 증언을 최대한 청취하여 기록한 일이 새롭다.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이 학교가 대학 입시에 ‘농․어촌 특례학교’에 빠져 있는 것을 알고 매우 놀랐다. 이곳은 그야말로 농․어촌 중 농․어촌인데 오로지 행정구역상 ‘부산광역시 강서구’라는 이유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여건이 좋더라도 군에 속해 있으면 특례가 되고 아무리 조건이 나빠도 도시의 구로 되어 있으면 특례가 되지 않는 것은 탁상 행정의 표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 학년을 맡고 있던 강병수 선생님과 함께 덕문고의 ‘농․어촌 특례학교’를 추진했다.
교육부와 교육청에 탄원서를 발송하는 한편 교육위원을 찾아가 부당함을 알리고 언론에도 호소했다. 마침 교육위원들도 협조를 약속했고 신문과 방송에서도 잘못된 점을 보도했다. 그런데 일이 어렵게 되려니 그 해에 교육부 방침이 바뀌고 말았다. 그 해부터 농어촌 특례에 관한 사항을 교육부가 통괄하지 않고 대학에 위임하고 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각 대학교에 요청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국의 모든 대학교에 요청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우선 덕문고 학생들이 많이 진학하는 대학교부터 얻어내기로 했다. 해당 대학교에 공문을 보내는 한편 학부모님들께서 각 대학교 총장실을 직접 방문하도록 부탁했다. “어머님들 화장하지 말고 물 장화 신고 가서 낙도의 실상을 호소하십시오.” 하자 어머니들이 웃었다. 농담이었지만 사실 그게 필요했다. 아무튼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부산과 경남 지역은 물론이고 서울의 일부 대학에서도 ‘농어촌 특례학교’로 지정하여 주었다. 마침 그해 덕문고는 졸업생 전원이 4년제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덕문고등학교 개교 이래 첫 기록인데 전부는 아니지만 농․어촌 특례학교 지정에 따른 영향이 상당히 컸던 것은 사실이다.
이 학교가 위치한 곳이 성북동이다. 마침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를 수업하다가 그 시의 비둘기는 번지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지만 이곳의 비둘기인 덕문 학생들은 번지를 찾아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곳의 비둘기’란 시를 하나 썼다.
“이곳의 성북동 비둘기는 번지가 있게 하소서./ 부리로 밀어온 흙내음이 가슴에 살아 축복의 땅이 되게 하소서./ 두 눈에 담는 건 바다와 산, 흔들리지 않는 언어를 배워 씨알을 키우고 꽃을 피워 둥근 열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들이 모여 우리가 되고 우리가 모여 그들이 되며 밀물에는 사랑을 싣고 썰물에는 추억을 띄워 그들의 둥지 내음과 빛깔을 오래오래 사랑하게 하소서.(이하 생략)”
이 시를 학교 교지에 실었는데 당시 배병환 교장 선생님께서 보고 덕문인들이 오래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표구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 현관에 거셨다. 개인적으로는 고맙고 영광이었다.
덕문에서 같이 근무하신 분들도 우의가 두텁다. 특히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통에 하루 세 끼 밥을 같이 먹으며 동고동락을 한 사람들이기에 남다른 정이 있다. ‘덕우회’, ‘덕관회’ 등의 모임이 있다.
선창, 눌차, 대항, 천성, 대항, 새바지, 노루목, 닻거리, 첫골 등 마을과 골짜기, 바닷가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아련한 추억들이 묻어난다.
서향의 향기
부산서여자고등학교(釜山西女子高等學校)-1999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3년 동안 이 학교에 근무했다. 이 학교에서 정보부장직을 맡았다. 대부분 정보부장은 다른 부서와는 달라 그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젊은 사람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기에 나에게 그런 업무가 맡겨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이 학교에 새로 오던 해에 마침 이를 맡을 희망자가 없어 크게 고심을 하고 있었는데 나를 알고 있는 어느 선생님이, 내가 성능이 좋은 노트북도 가지고 있는 등 컴퓨터에 대한 관심도 많고 조예도 있다고 부풀려 추천하여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컴퓨터에 약간 관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솔직하게 정보부장을 맡을 만한 실력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형편이 그러하다니 어쩔 수 없이 맡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IT 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하면서 이를 학교가 선도하도록 했다. 갑자기 전산실을 대폭 확충하고 인터넷 망을 새로 구축하며 생활기록부, 성적 처리, 출제 등 각종 문서를 컴퓨터로 처리하게 되었다.
수업도 백묵과 칠판이란 평면 전개에서 IT를 활용한 입체 수업을 강조했다. 학교 홈페이지가 생긴 것도 이때이다. 이런 상황이니 학교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정보화 마인드에 골몰하게 되었는데 이때 중심에서 선도해야 하니 무척 힘이 들었다. 연수도 다녀오고 관련 서적을 구하여 공부도 했지만 평생 국어만 가르치던 사람이라 용어 자체만 해도 너무 생경하여 도저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끙끙대며 노력하던 중, 차라리 정면 돌파하는 심정으로 자격증에 도전하자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이것이 오기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이미 쉰을 넘긴 나이이기에 머리도 말을 듣지 않고 손가락도 따라 주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곰처럼 미련하게 칠전팔기하여 노동부 주관 ‘문서실무사 1급’도 따고 상공회의소 주관 ‘워드 1급’ 자격증도 받았다.
그 이후 나는 용기를 가지고 개인 홈페이지까지 직접 제작하여 내가 펴낸 수필집의 작품들을 올려 지인 및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통로로 삼았다. 그렇게 재미를 붙여 익히다가 보니 학생들에게 홈페이지 제작에 대한 수업도 했으며 내가 만든 책은 직접 편집도 하게 되었으니 이 모두 정보부장을 맡은 덕분이었다.
이곳에서 신문반을 결성하여 학교 신문 ‘만남과 나누기’를 창간했다. 18회 정도 발간하였는데 정식으로 인쇄소에 넘긴 것은 정년 기념과 개교 기념 특집호이고 나머지는 내가 워드로 A4 용지에 직접 작성한 것이다. 나는 이 신문을 만들면서 학교의 구성원 모두가 신문의 이름처럼 진정한 ‘만남과 나누기’가 되어 역할 행동에 그치지 말고 ‘참 만남’을 하고 ‘참 나누기’를 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모모글래’로 시작하는 서향인들의 축제를 잊을 수 없다. ‘모모글래’는 ‘뭐 먹을래’를 사투리로 표현한 것이다. 학생들이 가장 자율적으로 잘 운영하는 것 중 하나가 학예제이다. 이곳은 여고이니 평소에 남학생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금남의 집이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으니 호기심 어린 남학생들이 여드름 툭툭 짜며 달려왔고 여학생들은 신바람이 나서 마음껏 재능을 발휘했다.
돛단배를 타고
하남중학교(下南中學校)-교감으로 발령을 받은 곳이다. 2002년 3월부터 2004년 1월 16일까지 약 2년 동안 생활했다. 그 동안 새로운 직책을 받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한 결실이기에 기뻤고 부임할 때 생각도 여느 때보다 많이 달랐다. 새로운 다짐을 하며 교문에 들어섰다.
하남중학교는 규모가 큰 학교는 아니지만 짜임새가 있고 정이 많은 학교였다. 이 학교의 교표는 ‘돛단배’ 형상이다. 이를 상기시키며 ‘펄럭이는 기상으로 바다를 열어 어제와 오늘이 새롭게 일어서는 내일을 가꾸자’고 하남인들에게 강조했다. 이 의미를 살리기 위해 학교의 도서관도 ‘돛단배 도서관’이라 했으며 학교 홈페이지에 만든 인터넷 신문까지 ‘돛단배’라고 내가 제안하여 이름을 붙였다.
하남중에 있을 때 ‘통일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했다. 그때 선생님들과 논의하여 주제를 ‘전적지 체험활동을 통한 통일교육’으로 정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실제 전적지를 찾아보면 통일에 대한 생각이 훨씬 더 피부로 느껴지리라 생각한 것이다.
우선 학년별로 동부, 중부, 서부 전선으로 나누었다. 1학년들은 중부전선인 철원지역에서 땅굴, 복구되지 않는 구 철원시의 모습, 백마고지, 녹슨 철마의 처참한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2학년은 수학 여행지를 아예 서부전선 코스로 잡아 강화도, 땅굴, 도라 전망대 등을 돌아보며 통일에의 의지를 다졌다. 3학년들은 동부전선을 체험활동 코스로 잡았다. 울진 삼척 지역 공비가 출몰했던 고포리, 함경도 사람들이 정착하여 사는 아바이 마을, 설악산, 통일전망대 등 동부전선을 다녀왔다. 그 중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은 내가 직접 인솔했다. 학생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흔을 실감하며 통일이 빨리 되어야함을 느꼈다.
특히 철원지역은 내가 군대생활을 했던 곳으로 제대 이후 30여년 만에 방문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만한 세월이 흐른 뒤라 초소도 달라지고 길도 바뀌어 지역을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군사들이 명령만 떨어지면 불을 뿜기 위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돌아와서 ‘아직도 한탄강은 흐르고 있다’란 꽤 긴 기행문 하나를 썼다.
하남중학교는 역사가 오래된 학교가 아닌데도 교지 및 앨범 등 자료가 없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 학교를 거쳐 간 선생님 및 졸업생에게 부탁하여 자료들을 모았다. 그런데 여유 공간이 없어 정식으로 역사실을 만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임시로 5층의 문서실 한 쪽에 캐비닛 및 옷장 등을 구입하여 자료 및 교복 등을 보관하였다. 귀한 자료를 기증하신 분들의 성함도 밝혀 놓았다.
몰운대의 초록빛 바다
다대고등학교(多大高等學校)-2004년 1월 17일부터 2006년 8월 31일까지 약 2년 8개월 동안 근무한 학교이다. 전임 교감선생님이 별세하시는 통에 2004년 1월 17일자로 갑자기 발령이 났던 곳이다. 방학 중이지만 대부분 선생님들이 보충 수업 때문에 학교에 나와 있었는데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두운 분위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다대의 교문에 들어서면 정대(正大), 원대(遠大), 심대(深大)를 새긴 돌비 하나가 우뚝 서서 맞아들인다. 이는 이 학교의 교육 목표이고 지침이다.
인문계 고교의 생명은 입시이다. 입시 성적이 학교 평가 제1호이니 모든 것이 입시로 통한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현실이 그러한데 혼자 독야청청을 할 수만 없는 것이다. 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다시 진학지도에 몰두했다.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내내 ‘진학’이란 이름에 찌들어 살다가 하남중에 있는 2년여는 잠깐 벗어나 있었는데 다시 어쩔 수 없이 폭풍의 대열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감은 거의 전천후 근무다. 보통 밤 10시까지 남는 것은 기본이다. 어쩌다가 밤 8시에 개인적인 일이 생겨 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 시간에 나가도 괜히 근무지 이탈을 하는 것 같아 죄스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빠져나가곤 했다.
이곳에 있을 때 마침 학년부장과 담임들이 너무나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아이들도 열심히 따라주었기에 입시 성적이 좋았다. 세칭 최고의 명문인 ㅅ대학에 합격자가 매년 3~5명이 나왔다. 그것도 그 어렵다는 법대 합격자가 한 해에 두 명이나 나오기도 했으며 의대에도 장학생 합격자가 나오고 또 한의대 등에도 많은 학생들이 합격하여 학교는 잔치 분위기였다. 덕분에 변두리 학교란 선입견을 지우고 신흥 명문교로 우뚝 서게 되어 너무 기뻤다. 지금 생각해도 노력을 아끼지 않던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너무 고맙다.
이곳에 있을 때 수필집 ‘솔바람 초록빛 바다’를 펴내었다. ‘안경을 왼손에 들고’ 이후에 문학지 등에 발표했던 글들을 고향, 여행, 사색, 기행, 교단의 이야기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 학교에 있을 때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던 중견 여선생님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그분의 책상 앞에 “하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하려고 하는 데 못할 일은 없다.”는 경구가 붙어 있었다. 꿈도 많고 할 일도 많은 분이었는데 홀연히 떠나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조사를 지어 영전에 드리며 애도했다.
다대고등학교는 비교적 근래 세워진 학교인데도 역사 자료가 부족하였다. 졸업생 및 이 학교에 재직하셨던 분들에게 부탁하여 자료를 모았다. 역사실도 마련하고 연혁도 새로 정리하였다. 특히 이 학교는 현관에 ‘다대를 빛낼 얼굴들’이란 난을 마련하고 기수별로 졸업생의 사진을 전부 걸어 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몰운대의 초록빛 바다를 바탕색으로 아름답고 고운 삶을 그리고 있다.
반듯하고 흥이 나는 학교
모라중학교(毛羅中學校)-2006년 9월 1일 모라중학교 제7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삼년 반 동안 생활했다. 나의 교단 40년에의 마지막 근무를 한 곳이기에 또 다른 정과 감회가 있는 곳이다.
부임하던 첫날, ‘낙엽으로’라는 글을 써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지금까지 내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듯이 이제 내가 다른 나무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낙엽이 되겠다.’는 약속이었다.
모라중학교는 백양산 볕바른 기슭에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 잡은 반듯한 학교이다.
이곳은 모든 것이 반듯하다. 우선 학교로 들어서는 진입로가 반듯하다. 큰 길에서 곧게 들어오는 넓은 길은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어 흡사 대학 캠퍼스에 들어오는 기분이다. 새들의 경쾌한 행진곡이 들려오는 가로수가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드리우고 있어 등교를 할 때부터 발걸음이 상쾌하다.
교내에 들어오면 건물이 반듯하다. 분수와 물레방아를 안고 남향으로 앉아 있는 밝고 따뜻한 교실에는 오순도순 예지의 눈망울이 가득하다.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강당에는 모라인들의 호흡이 항상 배어 있다. 넓은 운동장에는 씩씩한 건각들이 뛰고 달리며 꿈을 가꾼다. 보랏빛 등꽃 송이마다 모라인들이 만든 사랑의 메아리가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있다.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이 반듯하다. 예지의 눈망울을 가지고 오늘의 든든한 땅을 딛고 내일을 설계하는 아름다운 모습에 늘 희망이 보인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모두 반듯한 분들이다. 한결같이 모라에 근무하기를 희망하시는 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 마음이 학생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끊임없는 열정으로 생활하고 계신다.
나는 모라인들이 하루가 하루된 생활을 하며 나를 바르게 알고 모교애를 가져 늘 ‘반듯한 속에 흥이 나는 학교’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학교 특색사업 중 하나가 ‘독서교육’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는 즉시 책을 펴들고 담임선생님과 사제동행하여 책을 읽었다. 하루에 15분만 꾸준하게 읽어도 연간 30권 정도의 책을 읽을 수 있으니 3년간 꾸준하게 읽으면 100권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이 정도만 읽어도 적은 양이 아니다. 열심히 지도하시던 선생님과 따르던 학생들이 고맙다.
도서도 많이 확충되었고 월별로 도서관에는 책을 가까이 하기 위한 각종 행사가 있었다. 방학 때도 도서관은 늘 열려 있었다. 청소 당번들도 청소를 하고 난 뒤 꼭 책을 빌려 갔다. 그렇게 하면 책을 분실하고 잘 반납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책은 표지만 보아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 설사 그런 점이 있다 해도 잃는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연말에는 독서 경시 대회, 독서 골든 벨이 실시되어 여기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통영, 경주 등지에 문학 기행을 다녀왔다. 아무튼 이 모라에서 책을 읽은 습관이 계속되어 이왕이면 모두 ‘독서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유 공간이 부족한 학교이지만 조금 무리가 가더라도 역사실을 마련했다. 자료를 정리하니 역시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재직하셨던 선생님이나 동문들이 협조하여 앨범 및 사진 등 각종 자료를 보완하였다.
흔히 역사실 자료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값이 나가고 오래되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 그런 것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어제까지 사용하던 교과서, 전화기, 프로젝션 TV, 인쇄기, 컴퓨터, 교복 및 체육복, 학예제 전시품, 수행평가지 이 모두 훌륭한 자료들이다. 이들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폐품이고 때로는 쓰레기일지 모르나 50년 100년이 지난 뒤에는 아주 귀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 때는 이런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오래된 학교는 지난 것을 많이 수집하여야 되겠지만, 새로 시작하는 학교는 다음을 생각하여 현재 것을 잘 보관하면 되는 것이다. 모라중학교의 자료도 이런 기준에 의한 것이다.
2008년 11월에는 ‘개교 20주년 기념 역대 교장 초청 간담회’를 실시하였다. 초대교장님은 작고하셔서 애석하게 참석을 하지 못했지만 2대에서 7대까지 여섯 분은 모두 참석하셨다. 이 간담회는 모라의 역사를 새로 고증하고 보완하며 모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유익한 자리가 되었다.
2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보니 끊긴 것이나 묻힌 것이 많았는데 전임 교장선생님들께서 끊긴 것은 이어주고 묻힌 것은 찾아 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정말 세월이 더 가기 전에 잘 모셨다고 생각했다. 어떤 교장선생님은 당신께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도 보내주셔서 역사실에 새로 비치하게 되었다.
(주)농심 및 (주)만성케미칼, 백락클럽, (주)들풀 생활, 모라1 축구회, 동아대학교 의료원 교직원 축구동호회와 ‘업 스쿨 협약’을 하고 신라대학 및 청소년 폭력 예방 재단과 학습 벨트 결연을 맺었다. 관심을 가지고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늘 모라인들과 가슴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교 홈페이지에 ‘모라교장실’을 만들었다. 거기 ‘모라인에게’란 난에 학생들에게 격려의 글을 올렸다. 또 틈틈이 교내를 순시하며 칭찬할 학생들을 발굴하여 ‘칭찬합시다’란 난에 칭찬의 글을 올리고 있다. 이 ‘칭찬합시다’는 약 400회 정도가 된다. 날로 칭찬받는 학생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나의 문학 작품이 탑재된 홈페이지 ‘행전 박영환 문학의 뜨락’을 링크하였으며 2008년과 2009년 방학 때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에 대한 독후감 모집을 하였는데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기뻤다. 이를 통해 모라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다.
마침 재직 중에 시설이 많이 보완되어 다행이었다. 학습도움실, 수업분석실, 역사실, 영어전용실, 상담실, 인조 잔디 운동장, 무선랜, 엘리베이터, 운동장 음수대, 안내 표지판은 새로 만들었고 직원 화장실, 급수 시설, 방송실, 과학실은 증․개축하였으며 담장, 칠판, 게시판, 통신선, 소방시설, 복도바닥, 출입문은 전면 교체했고 교실 내외 도색을 새로 했다. 책․걸상이 낡아 학습 활동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마침 전학생들의 책․걸상을 모두 바꾸어 면학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그리고 본관 앞에 생태 연못이며 거북 돌을 갖춘 정원이 조성되었고 백락관 주변 언덕도 늘 향기가 있는 동산으로 단장되었다. 약간 황량하던 후문 주변에도 대형 화분 및 벽화가 그려져 밝고 따뜻한 분위기가 되었다. 현관 벽면에 잔디 공사 등으로 달라진 학교 전경을 새로 촬영, 확대하여 걸고 동시에 애교심을 고취하기 위한 ‘모라인이여’ 시도 걸었다. 학교 주변에 자귀나무도 많이 심었는데 이는 내가 직접 씨를 뿌려 키운 묘목을 옮긴 것이다.
지난 11월에는 여러 내빈과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푸른 꿈 잔디 운동장’ 개장식을 했다. 모라중학교는 올해 스무 살이 되는 청년 학교이다. 이때 우리 모라인들은 큰 선물을 받았다. 나는 이 넓고 푸른 운동장을 보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말이 생각났다. 중국에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려놓고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리니 용이 힘차게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우리 모라도 복된 땅에 힘찬 눈동자까지 얻게 되었으니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푸른 환경이 되어 큰 긍지 속에 비상하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동안 내내 공사의 연속이었다. 아무튼 끊임없는 공사 속에 기획을 하고 추진하려니 몸은 피곤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학교에 꼭 필요한 것이기에 마음만은 무척 기뻤다.
모라인이여
우리들의 모라는
낙동을 향해 창을 열고
백양의 언덕에서 햇살을 맞는다.
강맥의 큰 호흡, 산의 힘찬 기상
건각들이 달리고 꿈을 가꾼다.
함성이 우렁차고 예지의 눈망울이 가득하다.
모라는 오순도순 정다운 만남이로다.
‘나’가 아닌 ‘우리’로 사는
아름다운 삶이로다.
모라는 우리들의 탯줄이요
모라는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이다.
모라인이여
‘밝게 바르게’
우러러 받들고
노래하며 기리자.
이제 40년 교단생활을 마감한다. 그 동안 계속 종소리 속에서 생활했다. 이 종소리는 나를 키우고 일으키고 위로하고 사랑과 기쁨을 주고 생각에 잠기게 했다. 어쩌면 이것은 처음과 끝이었고 바로 나의 삶이었다.
돌이켜 보면 한평생 종소리가 있는 뜨락에서 생활한 것은 큰 행운이고 행복이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종소리가 울리는 뜨락에서 만남과 나누기를 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