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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송은 선생의 학덕과 은둔 사상

2024년 11월 14일, 청도군이 주최하고 청도향교가 주관한 제1회 전국 과거(생원과)가 실시 되었는데  생원시 을과에 입격하였습니다.

1回 科擧 再現 行事 生員試 科紙
姓 名 (한글) 박영환 (漢字)朴永桓    
科題 松隱 先生 學德 隱遁 思想
公諱翊 初諱天翊 本貫密城朴氏 字太始 號松隱 新羅密城大君之后 忠肅王 壬
申七月 生公于密城之鍤浦里第 幼有至性 孝親友弟 敬愛備至 及長 文詞冲逸
恭愍王朝登第 歷翰林文學 少監 禮部侍郎 盡忠輔國 征討島倭及邊賊 輒有功
及麗運將訖 時政日非 心懷慷慨 絶意於世 於是 裂冠毁裳 歸鄕里 種松名溪 舊
都之思也 有山曰箕 巢許之趣也 自放於山水 殘花落月 琴酒嘯詠 其措諸詩文
如楚三閭之澤畔行吟 宋文相之京口指南 無非發風泉之感 托榛苓之思 至若立志
之箴 持身之箴 言近而志遠 文博而理切 所存妙契於至精 所養能配於至大 苟非
稟天地之精靈 窮聖賢之蘊奧 曷能臻於此哉 李太祖定鼎 以幣聘先生 先生托以
盲聱 坐自如不迎幣 禮官權陽村還報曰 天翊不顧王幣所重 視死如生 臣不得致
也 上曰天翊曾已知心者 雖曰吾家不良 乃王氏忠臣也 予何以論罪哉 果若仲連
子推之輩也 前後屢徵 以工刑禮吏四曹判書左議政 而終不就 戊寅病革 以十一
月二十七日終 享年六十七 訃聞上悼之 贈以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經筵
春秋館 弘文館藝文館觀象籃事 卞春亭季良 請于朝 賜諡忠肅 人臣處鼎革之際
所以報本朝者 在盡其心而已 故 先生 罔僕 終始不貳 勇退之決 旣如此 隱德
之潔 又如此 使表裏首末 粹然一出於正 此可見先生平日 學問之力 有所講明
而畢竟成就都由夫箇中得來 則先生正 夫子所謂 知進退存亡 而不失其正者歟
金三足堂大有 其貞忠卓節 與日月爭光 至於冶隱之贊 先生畫像曰 掎歟德容
理學之宗 春亭之贊曰 千載之宗 百世之師 此足爲千古之斷案 現在士林後孫 春
秋奉享 于淸道龍岡書院麗忠祠 嗚呼 君臣大義 無所逃於天地之間 凡在橫目之
列者 孰不知之 而値危亡之除 威武怵於前 富貴誘於後 乃頓顙屈膝 甘爲臣僕者
滔滔焉 一有忠志之士 矢死全節 守其常經 以爲萬世 臣子之模楷 則烏可不褒之崇之垂之無窮乎
1회 과거 재현 행사 생원지 과지 해석
姓 名 (한글) 박영환 (漢字) 朴永桓    
과제 송은 선생 학덕과 은둔 사상
공의 휘는 익인데 처음 이름은 천익이다. 본관은 밀성박씨이며
자는 태시이고 호는 송은이다. 신라 밀성대군의 후예로 고려 충숙왕
임신 칠월 밀성 삽포리 고향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착한 품성으로
부모에 효도, 형제 간에 우애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 자애하였다.
점점 자라며 문장이 충일하였으며 공민왕 때 과거에 올라 한림문학 소
, 예부시랑을 역임하였고 충성을 다해 국정에 이바지했고 왜구와 변방의
호적을 정벌,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여 시정
이 날로 잘못 되어 분한 마음에 깊이 한탄하며 세상사에 뜻을 끊었다.
이때 선생은 관을 찢고 옷을 헐어버린 다음 향리로 돌아와서 솔을 심어
시내 이름을 송계라 한 것은 옛 서울 송경을 생각함이요, 산 이름을 기산이
라 함은 허유와 소부처럼 살겠다는 취지였다. 스스로 산수에 의지하여 시드
는 꽃 지는 달에 거문고를 타고 술 마시며 시를 지어 읊었는데 그 여러 시
문은 마치 초나라 삼려대부(굴원)가 못가를 거닐면서 읊은 것과 송나라 문
(문천상)이 경구에서 남쪽을 가리키던 것과 같아서 풍천의 감개함을 발하
고 진령의 생각을 의탁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입지잠과 지신잠에 이르러서
는 말이 친근하면서도 뜻은 원대하고 문장이 넓고 고상하면서도 이치는 절
실하니 선생은 마음에 둔 바가 지극히 정교하고 세밀한데까지 묘하게 부합
하고 수양한 바가 지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로 천지의 정기를 천부
적으로 타고나서 성현의 온오한 학문을 궁구하지 않았으면 어찌 능히 이 경
지에 이르겠는가?
이 태조가 개국을 한 뒤에 예폐를 갖추어 선생을 초빙하였으나 선생은 눈
解 釋
멀고 귀 먹은 맹오라 핑계하고 태연하게 앉아 예페를 맞이하지 않으니 예관
권양촌(권근)이 돌아가서 왕께 보고하기를 천익은 소중한 왕폐를 돌아보
지도 않고 죽는 것을 삶과같이 여기고 있으니 신은 그를 오게 할 수 없었나
이다.”하였다. 왕께서 말하기를 천익은 일찍부터 내가 그 마음을 아는 자
이다. 비록 우리 조정에는 어질지 못한 사람이나 왕씨의 충신이다. 내가 죄
를 어찌 논하랴. 과연 노중련과 개자추 무리의 사람이로다.”라고 했다.
전후로 공, , ,  4조 판서와 좌의정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
가지 않았다.
무인년(1398)에 병이 위중해져 동짓달 스무이렛날 고종하니 향년 예
순 일곱이었다. 부음을 들은 주상이 슬퍼하며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
의정 겸 경연춘추관 홍문관 예문관 관상감사로 증직하였으며 변춘정
계량이 조정에 청하여 ‘충숙’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다른 사람의 신하로서 나라가 혁명당할 때 본 조정에 보답하는 길은
그 마음을 다하는데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남의 신하 노릇하
지 않겠다는 마음이 처음과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용기있게 물러난
결단이 이미 이와 같고 숨은 덕의 고결함이 이와 같으며 겉과 안, 처
음과 끝이 순수한 정도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선생께서 평소에 학문하
신 힘이 강명한 바가 있었음을 가히 알 수 있고 마침내 성취한 것이
그 중에서 나왔으니 선생의 바른 행적은 공자께서 말씀하신 바 “진퇴
와 존망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라는 것이 아닌가?
삼족당 김대유는 그 정충과 탁절은 일월과 광채를 다투었다고 했으며
야은은 선생의 화상을 찬하면서 “거룩하고 덕스러운 얼굴은 성리학의
조종이었다”하였고 춘정은 “천재의 종사요, 백대의 사표로다”하고
찬하였으니 이것은 천고의 단안이 되기 족하다. 현재 사림과 후손들이
청도 용강서원 내 여충사에서 춘추로 향사를 올리고 있다.
아! 임금과 신하 사이의 대의는 천지간에 피하여 달아날 곳이 없음을
무릇 사람 축에 드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위급한 상황에 다달아 앞에서 무력으로 겁 주고 뒤에서 부귀로
유혹하면 곧 이마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어 신복이 되는 것을 달게 여
기는 자도 많다. 한 사람의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선비가 있어 죽기로
맹세하고 절의를 다해 그 상경을 지켜서 만세의 신자에게 모범이 되었
다면 어찌 포창하고 우러러 받들어 무궁하게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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