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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1)선무랑(宣務郎)과 청도 교수관(敎授官)을 역임한 박린(朴麟) 선생의 화룡재(化龍齋)

화룡재
청도신문(2024년 7월 24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1)

선무랑(宣務郎)과 청도 교수관(敎授官)을 역임한 박린(朴麟) 선생의 화룡재(化龍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인협회장,  교장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 화룡마을에 자리 잡은 화룡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박린(朴麟)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밀성이며 호는 눌암(訥巖)이다. 문학과 덕행이 뛰어나 영남 사림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중종 때 선무랑(宣務郎)이 되고 청도 교수관(敎授官)에 제수되었다.

  공은 밀직부사공 박양언 파(密直副使公 朴良彦派)의 입향조이며 공민왕 때 등제하여 선무랑(宣務郎)이 되고 김천도독우(金泉都督郵)를 지낸 양무(揚茂) 5세 종손이다.

  할아버지는 청도읍 한재에서 신안으로 거처를 옮겨 훈령산 아래 서당을 열어 성리학을 전수한 계은(繼恩)이며 아버지는 호재 맹문(湖齋 孟文)이다. 호재에 대하여 직제학(直提學) 최연(崔淵)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 중에 박공같은 이는 매우 드물다고 하였다. 성종 때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제수되었다. 호남 사림(士林)에서 그를 본보기로 삼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생 난()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청도향교 향로당기(鄕老堂記) 향헌(鄕憲) 10  향규(鄕規) 5를 정하였다. 위의 네 분은 훈령서원 숭절사(崇節祠)에 배향되고 있다.

  눌암의 아들 광신(光新)은 명종 때 부장(部將)을 지냈다. 광신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의병군에 합류했다. 이 때 장남 성(, 무과습독 역임), 둘째 눌(), 넷째 해() 3형제는 전사하고 3남 담()만 겨우 살아남아 가계를 이었다.

  담은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이때 하나를 물으면 세 가지 이치를 드러내어 명료하게 대답함으로 한강이 우리 사림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라고 극찬했다. 첨정(僉正)을 지냈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담의 증손자 만()은 일찍이 문장과 글을 성취하였으며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지냈다. 담의 7세손 태환(泰煥)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밀직부사공파 입향조인 두촌의 종손인 원규(元圭)는 덕을 닦아 몸소 실천했으며 화산정(華山亭)에서 자작한 한시가 청도문헌고에 실려 있다.

  화룡재는 팔작지붕 와가 5칸이다. 1902년에 마을 입구에 창건했으며 그 뒤 1947년에 마을 뒤편으로 이건하여 중창(重創)하였다. 그 뒤 1999년에 도색 및 담장을 보수하는 등 중수했다. 당시 헌성자(獻誠者) 명단을 헌성록 현판에 등재하였다. 대청마루에는 문암 손후익(文巖 孫厚翼)이 쓴 화룡재기와 화산 권용현(花山 權龍鉉)이 쓴 화룡재 이건기가 걸려 있다.

  ‘化龍 화룡등천(化龍登天)’에서 나온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용샘에서 오랫동안 용이 되기를 기다리던 구렁이가 용이 되어 등천하면서 꼬리를 치는 바람에 골[]이 생겼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자리잡은 맹문(孟文)이 후손들이 융성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化龍으로 정했다고도 한다. 이날 후손 희달(熙達)씨가 집안의 내력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화룡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용의 마을 화룡에 용을 닮은 인물들

대대로 이어져 승천하는 기상이라

큰 길을 가르쳐주는 사림의 본보기

 

화룡재기
화룡재 이건기
화룡재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