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19)
동래정씨 교서랑공파(校書郎公派) 청도 입향조인 정복(鄭鰒) 선생의 동화재(東華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花山里)에 자리잡고 있는 동화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동래정씨 교서랑공파(校書郎公派) 청도 입향조인 정복(鄭鰒) 선생이다. 공의 자(字)는 직선(直善)이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설학재(雪壑齋) 정절공(靖節公) 구(矩)의 5대손이며 정헌대부호조판서(正憲大夫戶曹判書) 동평군(東平君) 선경(善卿)이 고조이고 가선대부경주부윤(嘉善大夫慶州府尹) 봉동평윤(封東平尹) 시호(諡號)가 양평(襄平)인 오로재공(吾老齋公) 종(種)이 증조이며 충의위(忠義衛) 부사직(副司直) 성린(成璘, 한훤당 김굉필의 사위)이 아버지이다.
공이 1573년(선조 6)에 출생하여 거창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여 비슬산에 피란을 했으며 그 뒤 원명을 거쳐 안심(安心)을 할 수 있다는 창녕 안심에 잠깐 머물었고 다시 복지(卜地)라 여긴 화산(花山)에 새 터를 잡아 옮겼다.
아들 덕수(德壽)는 선무랑(宣務郎)이었으며 손자 승립(承立)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학문이 높았고 6세손 동식(東寔)은 증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문행이 있었다. 7세손 흥래(興來)는 좌승지(左承旨), 8세손 득춘(得春)은 호조참판(戶曹參判)이었으며 9세손 기폭(紀輻)은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였고 치묵(致黙)은 호군(護軍)이었다.
동화재는 원래 1945년에 창건하였으나 60여년 만에 퇴락하여 2005년에 상량을 한 뒤 2008년에 준공했다.
2단 석축위에 목조와가 팔작지붕 4칸이며 중앙에 대청,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 협실형이고 재사 보호를 위해 툇마루 앞에 유리창을 달았다. 대문채는 한 칸이며 관리동은 양옥이다. 대청 벽에 서건수(徐健洙)가 지은 ‘동화재기(東華齋記)’ 및 장화식(蔣華植)이 찬한 ‘동화재 상량문(東華齋上樑文)’이 걸려있다. 마당에 ‘동화재 중건기념비’가 있으며 재실 뒤에는 직선공의 제단소(祭壇所)가 설축(設築)되어 있는데 서흥(瑞興) 김희달(金熙達)이 비문을 지었다. 특히 이 재실은 문화재 보유 시공인 이오희(李五熙)가 맡아 중창했다.
세상에서 씨족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동래 정씨를 대성(大姓)이라하고 풍수지리가는 시조 문도(文道)의 묘인 부산 동래 화지산(華池山) 정묘(鄭墓)를 명당이라고들 한다. 동래군지(東萊郡誌)에 의하면 공이 돌아가시어 장사 지내려 할 때 상여가 화지산에 이르니 눈이 녹은 자리에 범이 지키고 있어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동래정씨 문중에는 수많은 문과 급제자와 상신(相臣)이 배출되었다.
이곳 화산리도 비슬산 조화봉 주 능선이 뻗어내린 곳에 형성된 명당이다. 이곳에 동래 정씨들이 400여년 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이날 동화재를 찾았을 때 후손인 규섭(圭燮), 규호(圭浩)씨가 족보 및 선대들의 문적을 내어놓고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동화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東과 華는 동래 정씨, 화지산 첫 글자
근본을 지키자, 조상 은혜 받들자
숭모와 교육의 장 잇고 있는 동화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