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21)
청도읍 안인리(安仁里) 함안조씨(咸安趙氏)의 경동재(景東齋)와 영모재(永慕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前 청도문인협회장, 前 교장
청도군 청도읍 안인리(安仁里), 일명 곰실 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함안 조씨(咸安 趙氏) 집성촌이며 입향조는 조지경(趙之瓊, 1591〜1612) 선생이다. 공은 문과 급제후 내금위 찰방(內禁衛察訪)을 지냈으며 경남 함양(咸陽) 덕곡에서 이 마을로 택거(擇居)하였다.
함안 조씨의 시조 정(鼎)은 호가 모당(慕唐),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이 되었다.
찰방공의 고조 승숙(承肅)은 호가 덕곡(德谷)이며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가운데 한 분이다. 저작랑(著作郎)으로 충하사(充賀使)가 되어 북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북원의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았다. 1391년(공양왕 3) 부여감무(扶餘監務)에 임명되었으나 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덕곡(德谷)에 은거하여 교수정(敎授亭)을 지은 뒤 후학 양성에 힘썼다. 조부 이(珥)는 조봉대부예빈시정(朝奉大夫禮賓寺正)이었다. 아들 훈(訓)은 통덕랑(通德郞)이었으며 손자 윤적(允迪)은 현릉참봉(顯陵參奉)을 지냈다.
증손 성린(成麟)은 호가 동은(東隱)이며 한강 정구(寒岡 鄭逑) 문(門)에 종유(從遊,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여 문학과 덕망이 당세에 높이 받들어져 귀하게 되었다. 그를 배향하는 경동재(景東齋)가 있다.
성린의 동생 성인(成仁)은 호가 경은(耕隱)이었으며 그를 배향하는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경주(慶州) 이온우(李溫雨)는 묘지(墓誌)에 “자계서원 유생의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 이름을 올렸으니 문학, 덕행을 가히 알만하다”라고 했다.
후손 용관(鏞寬)은 호가 괴정(槐亭)이며 자선(慈善)을 베풀고 학문을 좋아했다. 병자년(1936) 흉년에 동민에 부과된 세금을 전담하여 대납하였고 한해(旱害)가 심한 이 지역에 저수지를 방축하여 농사를 짓는데 큰 혜택을 베풀었다.
후손 치현(致顯) 부부는 성균관장으로부터 효자·효부상을 수상했으며 내승(來承)은 아세아 자동차 사장과 기아산업 부사장을, 명수(明守)는 청도군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해현(海顯)은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화랑무공훈장 외 4개 훈장을 받았으며 ‘경은공 보감’ 등 6부를 발간했다. 원현(元顯)은 동산병원 원장, 대한이식학회(大韓移植學會) 회장을 지냈고 내정(來正)은 변호사이다.
이곳 함안 조씨 집안에는 경동재와 영모재가 있다. 정면 5칸의 경동재는 1905년에 후손 용관이 창건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했다. 대청마루에는 박효수(朴孝秀)가 쓴 ‘경동재기’와 후손 래영(來榮)과 용태(鏞泰)의 시가 걸려 있다.
영모재는 1867년에 창건했으며 정면 4칸 재사와 4칸의 염수당(念修堂)이 있다. 대청 마루에는 후손 채언(采彦)이 쓴 ‘영모재 상량문’, 송병화(宋炳華)의 ‘영모재기’ 및 후손 용호(鏞昊) 등이 쓴 ‘중수유감(重修有感)’, 이충기(李基忠) 등이 쓴 영모재운(永慕齋韻) 등이 걸려 있다. 이날 해현씨가 족보 등 여러 자료를 펼쳐놓고 안내해주었다.
‘안인리’라는 시제로 글을 올렸다.
용각산 기슭의 편안하고 어진 마을
조상의 뜻 받드는 경동재와 영모재
대대로 융성하소서 안인리 조씨 가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