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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 재실, 고택탐방(104) 경의당(景義堂)

경의당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교장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명대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경의당(景義堂)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증 가선대부(贈 嘉善大夫) 감정공(監正公) 이장( -1637) 선생이다. 공은 모헌공(慕軒公) ()의 현손으로서 옥계공(沃溪公) () 7 1녀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과 절개가 강직하고 의분이 강하여 고을에서 명사(名士)로 이름이 났다.
  당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인조 임금이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으자, 공은 나라의 백성으로서 선대 이래 왕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으니 내 비록 관직은 없으나 의리로서 임금의 부름에 따르련다.” 하며 창의병(倡義兵)을 일으켜 동생 하()와 함께 달려갔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으며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당당한 형과 아우는 나라를 위하여 죽어서 돌아가리라. ()는 능히 천리를 밟아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노라. 堂堂兄及弟 爲國死如歸 爾踝能千里 生還或庶幾란 절명시(絶命詩)를 지어 말에 매어 집으로 보내고 형제가 함께 장렬하게 순절했다. 그때가 1637(인조15) 정월 어느 날이었다.
  한편 남편을 기다리던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의마(義馬)에게 부친 절명시를 보고 공이 전사했음을 알고 시신을 수습할 길이 없어 의관(衣冠)과 유물(遺物)로 초혼장(招魂葬)을 치르고, 비통해하다가 그 해 3 7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전쟁이 끝난 뒤 병란의사(丙亂義士)로 인정받아 군자감 정(軍資監 正, 3)에 증직 되었다. 묘소는 청도군 매전면 아음 사곡동 화령에 있으며 배위와 합장했고 공의 말도 죽자 묘소 아래 의마총(義馬塚)을 만들었다.
경의당은 1961년에 창건한 이래 2008년에 중건한 목조와가 팔작지붕 5칸이다.
  도주(道州) 김재화(金在華) 경의당기문 공의 대의를 위한 그 뜻과 절의는 한결 같았다.”고 했고 역시 묘갈명(墓碣銘)’을 찬()하면서 지아비는 충의로 죽었고 지어미는 열부로서 죽었으니 한 집안의 두 절개는 세상에서 드물도다.”했다.
  방예손(傍裔孫) 승돈(承墩) 증 가선대부 고성 이공 숭모비(贈嘉善大夫固城李公崇慕碑)’ 배운 대로 올바른 길로 나아갔으니 당당한 군자로다.”했다.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경의당 상량문 상량한 이후에 오래도록 평안하고 명성은 아름답게 밝음을 더하여 집과 나라를 길이 도모하여 오래 자손의 세대에 미치게 할지어다.” 했다.
마당에 경의당 종중 회장인 승열(承烈)이 쓴의마비(義馬碑)가 있다. 이는 의마의 주인 위한 충절을 기리고자 함이다.
  공의 후손들은 현손인 오위도총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시룡(時龍) 1748(영조 24) 밀양시 초동면 봉대리에 거처를 옮긴 이래 일가를 이루어 공의 장거(壯擧)한 큰 뜻을 기리고 있다. 이날 후손 승열님이 재실을 안내하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장 선생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내 한 몸 던져서 호적胡賊을 물리치랴
절명시 말에 매고 산화한 우리 님은
언제나 꺼지지 않는 구국救國의 등불이라

경의당 기문
경의당 전경
숭모비
의마비
경의당 중건 표성기